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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禪, 禪과 시]
그저 이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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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09:18  /   조회1,77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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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어 어제는 종일 비가 왔습니다. 오늘도 비 예보가 있지만, 산우회의 산행은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오늘 올라갈 산은 명봉산(401m)입니다. 평생 대구에 살았지만, 명봉산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산입니다. 조선시대 봉수가 있었던 산이라고 하는군요. 나는 수성못 뒤에 있는 법이산(333m) 봉수대에는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에 몇 번이나 올라가 보았습니다. 파동 버스 종점에서 바로 능선으로 올라가면 봉수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까지 검게 그을린 봉수 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수성관광호텔 자리 부근에는 고아원이 있었고 사나운 개가 몇 마리 있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

 

조선시대 경상도를 지나가는 봉수 2로는 경주, 의성으로 넘어갑니다. 대구, 칠곡은 봉수 2로 선상에 있지 않았기에 정확한 고증은 어렵습니다. 전국의 봉수로 선상에 있는 산은 대체로 조망이 트여 있되 너무 높지 않은 산입니다. 너무 높은 산은 봉수를 올리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체력과 기상 조건을 고려하여 절반 정도만 올라갑니다. 양지마을 기점 1.9km에 있는 명봉정까지 올라갑니다. 날씨는 흐려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하산 도중 는개가 약간 흩뿌렸지만 산행하기 좋은 날입니다. 처음 와보지만 걷기 좋은 산이로군요. 맨발 걷기 길이 조성되어 있어서 맨발로 걷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숲이 의외로 짙어서 녹음의 뉘앙스가 다양합니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많은 가운데 까마귀, 뻐꾸기, 박새 소리가 끊임없이 들립니다.

 

사진 1. 맨발 걷기 길이 조성된 명봉산.

 

산행할 때 중요한 것은 초반에는 되도록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산길은 조곤조곤 친절하게 이어지고 새소리가 그 위를 날아갑니다. 나는 그저 산길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산에 오면 육신이 있는 줄 알게 되죠. 고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도 알게 되고요.

 

산은 옛날부터 신성하고 신비한 곳이었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신성과 신비에 가까이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첫 설교이자 가장 긴 설교는 산상설교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거대한 바위산 시나이산이었죠. 산은 높은 산이나 낮은 산이나 다 신비한 곳입니다.

 

산에 갈 때마다 대자연의 다채로움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구불구불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길, 시시각각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 우거진 나무들, 수없이 재잘거리는 산새들, 대자연은 거대한 수수께끼이자 신비입니다. 산에 들어서면 천박한 자기 중심성이 사라집니다. 대자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본래면목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집니다.

 

그저 이것뿐!

 

쇼펜하우어(1788~1860)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조용히 관조할 때 단지 순수한 주관으로서 객관을 비추는 맑은 거울로서 존재하게 된다.(주1)

인식이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더 이상 개체가 아니며, 개체는 잊히고 단지 순수한 인식 주관일 뿐이다. 우리는 단지 세계를 보는 하나의 눈으로써 현존한다. 만일 우리에게 객관만이 현존한다면, 현재의 객관에 의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고통스러운 자아에서 벗어나 순수한 인식 주관으로서 객관과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이다.(주2)

 

쇼펜하우어는 자아가 사라지고 객관에 의해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별세계’라는 평범한 단어로 지칭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천재성은 적절한 인용과 함께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평범한 단어들로 표현해 낸 것에 있습니다.

 

자아가 사라지고 고통스러운 자아에서 벗어난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경험을 표현하려 했지만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21세기가 되었으나 인류는 아직도 그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인류는 결국 ‘그것’, ‘이것’, ‘그’, ‘너’ 등의 일상적 대명사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대명사는 직관적으로 진리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뜻이 분명하지 않고 비논리적이라 듣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중국의 선종사에도 ‘이것’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조동종을 개창한 동산양개(807~869)는 영묵에게 배웠고, 다음에는 남전, 위산에게 참례했으며, 위산의 권유로 운암(782~841)을 방문하여 마침내 그 법을 이어받았습니다. 동산이 운암을 찾아간 시점은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 30세 전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운암은 55세 전후였을 것입니다. 동산은 운암에게 무정설법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다시 행각에 나섭니다.

 

동산이 행각에 나설 때 운암에게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 어떤 사람이 저더러 ‘스님의 진면목이 무엇이지?’ 하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을까요?”

운암이 말했다.

“그 사람에게 말해주려무나. ‘그저 이것뿐이라고’.”

동산이 한동안 말이 없자 운암은 다시 말했다.

“양개야, 이 깨치는 일은 정말로 자세하게 살펴야 한다.”(주3)

 

동산은 ‘그저 이것뿐只這是’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해합니다. ‘그저 이것뿐’이라는 말은 “별다른 것은 없다, 네가 보는 그대로다.” 그런 의미로도 해석되는 말입니다. 운암의 말에 그런 뉘앙스도 분명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가 당황스러워하자, ‘그저 이것뿐’이라는 말에는 깊은 뜻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양개야, 이 깨치는 일은 정말로 자세하게 살펴야 한다.”

 

이 문답 장면은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노승과 젊은 학승의 작별 대화인데, 구구절절 정감이 넘치면서도 불도를 향한 치열한 구도심이 느껴집니다.

행각을 계속하던 어느 날 동산은 시냇물을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비로소 운암의 진의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기쁨에 겨워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습니다. 이 게송이 유명한 과수게過水偈입니다. 

 

다른 데서 나를 찾지 말아라

자신과는 멀어질 뿐이다

나는 이제 홀로 가지만 

곳곳에서 그를 만나리라

그는 지금 바로 나이지만 

나는 지금 그가 아니라네

모름지기 이렇게 깨달아야만

비로소 여여에 계합하리라(주4)

 

동산은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바로 “이거다” 하고 알아차렸습니다. 그림자는 결코 나(진아眞我)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거죠. 이 시에서 ‘나[我]’는 오도悟道한 ‘진아眞我’를 말하며, ‘그[他, 渠]’는 그림자, 즉 생각이나 감각 등 현실태의 ‘가아假我’를 말합니다.

동산은 비로소 운암이 말한 ‘그저 이것뿐’의 ‘이것’이 진아라는 것도 알아차린 것입니다. 시의 첫머리에서 동산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림자에서 진아眞我를 찾지 말아라 / 찾을수록 진아와는 더 멀어진다” 탄탄한 상징 덕분에 이 시는 심미적 감동과 함께 적확하게 사람들을 진아의 세계로 이끌고 갑니다. 이처럼 철학적인 탐구를 노래한 시는 중국 문학의 역사에서는 완전히 이례적인 것입니다.

 

운암이나 동산이 그토록 추구하는 ‘이것[眞我]’이란 무엇일까요? 쇼펜하우어의 언어를 빌린다면, 객관을 비추는 순수한 인식 상태, 즉 자아는 사라지고 세상을 맑은 거울처럼 비춰보는 것입니다. 진아란 일상 속에서 자신의 본래성(무념無念, 부작의不作意)을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산은 현실태란 본래성(진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 시는 그림자[假我]를 통하여 오도悟道한 진아를 표현한 것입니다.

 

머리 숙여 한 번 보고 스스로 기뻐하네

 

아이고, 역시 ‘이것’을 이야기하면 머리가 아프죠? 그러나 그림으로 표현하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나타납니다. 동산이 물을 건너다가 활연하게 깨치는 장면을 그린 「동산도수도」가 도쿄국립박물관에 있습니다. 남송 영종의 황후인 양후(1162~1232)의 인장과 제찬題贊이 있습니다. 「동산도수도」의 찬시입니다.

 

사진 2.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동산도수도」.

 

주장자 끌고 많은 선지식 찾아다니느라 

산 오르고 물 건너는 번거로움 면치 못했네

발 닿는 곳이 모두 진리임을 알지 못하더니

머리 숙여 한 번 보고 스스로 기뻐하네(주5)

 

동산이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깨달은 것을 우리는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우리도 자신의 생각과 감각에서 벗어나 무념의 상태로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임을 자각한다면 깨달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분명 사는 맛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진 3. 근심을 잊게 한다는 원추리꽃.

 

대자연에서는 식물도 동물도 내재된 생명의 숭고함으로 빛이 납니다. 산길에 화려한 악센트를 주는 원추리꽃도 피었군요. 산은 햇살 하나 낭비하지 않고 구석구석 농밀한 생명의 잔치를 보여줍니다. 이 산엔 고사리도 많고, 까치수영, 으름덩굴, 개모시풀도 많습니다. 나무에 녹음이 많듯, 풀들 또한 자신만의 작은 그늘 위에 떠 있습니다.

 

오늘 특히 기뻤던 것은 작은 박새의 노래를 끊임없이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묘비에 “쯔비 쯔비” 두 음절만 새겨 달라던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를 생각합니다.(주6)

쯔비 쯔비, 그것은 박새의 울음소리인데 우리가 어찌 그 소리를 흘려듣겠습니까. 

 

<각주>

(주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 34. 순수한 인식 주관.

(주2)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 38. 미적 만족을 느끼는 주관적 조건.

(주3) 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新脩大藏經』 47), “師臨行又問雲巖。 和尚百年後。 忽有人問還邈得師真否。 如何秖對。 巖曰。 但向伊道。 只這是。 師良久。 巖曰。 价闍黎承當箇事。 大須審細。”

(주4) 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新脩大藏經』 47), “切忌從他覓。 迢迢與我疎。 我今獨自往。 處處得逢渠。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應須與麼會。 方始契如如。

(주5) 東京國立博物館 所藏, 「洞山渡水圖」 讚詩, “携藤撥草瞻風 未免登山涉水 不知觸處皆渠 一見低頭自喜”

(주6) 로자 룩셈부르크, 베를린 감옥에서 「마틸다 야코프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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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1976년 시). 전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대학교 사범대 겸임교수, 전 영신중학교 교장.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저서로 『보물찾기』(시와시학사, 2000), 『납작바위』(시와반시사, 2012), 『글쓰기 노트』(집현전, 2018) 등이 있다.
jtsu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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