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속의 불교 ]
연꽃 마음을 내 그 연꽃 잎잎으로 일백 가지 좋은 빛을 내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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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 2025 년 11 월 [통권 제151호] / / 작성일25-11-05 11:14 / 조회28회 / 댓글0건본문
한국문학사, 특히 ‘현대시와 불교의 상관성’에 대한 문제는 ‘현대문학’ 자체가 식민지 시기 서구의 문학을 ‘이식’한 것으로 생각해 온 20세기적인 인식으로 인해 ‘주변적 관심거리’나 특정 ‘종교’와 관련된 영역으로 치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연재의 시작부터 줄곧 강조하고 있는 사실도 이 점과 관련된 것인데, ‘불교의 현대화’라는 문제는 20세기 초반 불교계의 숙원만이 아니라 ‘국권 상실’이라는 역사적 존망의 귀로에 놓인 민족 전체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것으로서, ‘전통’과 ‘현대’의 공존 내지 승화를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하는 ‘시대적 난제’에 직면한 상태였다.
한용운의 ‘유신’은 이 점에서 ‘동양적 가치’와 신학문의 ‘제도, 지식’을 어떻게 접합해서 미래적 비전을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었다. 20세기 초반 한국의 현대시가 ‘번역’으로부터 그 탄생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서구적인 것의 ‘번역과 이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도 이런 ‘전통’의 실질적 영향과 문화적 자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시대 내내 주변부적인 것으로 치부되던 불교가 ‘서구적 현대’라는 막강한 ‘제국의 힘’에 대등하게 맞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고, 대립의 개념으로 이 둘의 관계를 설정한다면 애초에 제대로 된 해답을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불교계와 한용운의 선택은 ‘불교의 유신’ 즉, ‘불교’와 ‘현대성’의 소통 혹은 ‘상호번역’의 방향이었다. 한용운으로 대표되는 ‘불교와 현대시’의 만남은 이 점에서 그 자체로 새로운 ‘인식적 소통과 번역’의 탄생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대화는 식민지 조선과 같은 처지에서 보면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 두 상대의 접점을 모색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화 투쟁’이나 ‘문화 권력’의 양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적 탈식민주의의 성격을 ‘불교와 현대문학’의 접촉 과정에서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한용운의 독립지사적인 측면은 이 점에서 시인 한용운의 문학 활동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현대화나 불교와 현대성의 조우는 그 자체로 ‘문화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석전 박한영과 만해 한용운, 송만공 등 불교계 승려들의 상호관계와 당시 불교계 승려들의 ‘불교지성’이 ‘현대문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도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이며, 특히 당시 경허의 계보를 잇는 불교계 선승들의 대다수가 한문으로 된 ‘선시’를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선시’가 ‘현대시’로 스며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특히 자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선시의 정신세계가 초월적인 경지가 아닌 ‘일상 생활’의 지혜와 예술적 가치를 품은 것으로 인식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편견을 더 깨뜨려야 하지만 지나간 한국 현대시의 진행 과정에 이런 성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불교적인 은유와 상상력의 특징에 대해서는 미당 서정주가 처음으로 주목하고 그 특징과 가능성을 정리하고 있는데, 서정주는 불교적 상상력과 정신세계의 가능성을 제대로 꿰뚫어 본 ‘첫 번째 현대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불교적 상상과 은유의 미학적 가능성 - 연꽃 마음을 내어 보아라
연꽃 마음을 내
그 연꽃 잎잎으로
일백 가지 좋은 빛을 내어 보아라.
팔만 사천 이랑의 맥이
하늘의 그림같이 거기 있느니
맥에 있는 팔만 사천의 빛이
모두 다 눈을 떠 두루 보게 하여라.
아무리 작은 꽃잎사귀도
가로세로 뻗쳐서 만 리는 가느니……
- 「관무량수경」 중에서
인용한 구절은 「관무량수경」의 한 구절인데, 서정주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불교적 상상과 은유의 한 출처를 여러 차례 밝히기도 한 바 있다. 그는 일찍이 “불교의 경전 속에 매장되어 온 파천황의 상상들과 은유들의 질량에 비긴다면”, ‘쉬르레알리즘’의 초현실주의가 ‘무색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현대성의 ‘첨단’을 자부하는 ‘쉬르레알리즘’의 상상력에 ‘불교적 상상’을 대비하면서 ‘무색하다’고 일축하는 이 말은 ‘불교적 자원(경전)’의 가치에 대한 그의 ‘자각’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보들레르와 니체를,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모던보이’ 서정주가 ‘생의 구경 탐구’라는 문학의 본체를 지향하면서 바라본 지점이 ‘불교적 상상’이라는 사실은 사뭇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달리 말하면, 전통 혹은 동양적 지식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는 장면이면서, 그 가치의 탐색이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돌파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 위의 아무도 아직 석가모니와 그 영롱한 제자들을 빼놓고는 이런 따위의 연꽃을 상상해 본 이도 없고, 마음의 한 밝은 상황의 은유를 이런 식으로 전개해 본 이도 없다.”(주1)는 이어지는 발언에서도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팔만 사천의 법문과 연꽃 맥의 팔만 사천 이랑을 좋은 빛, 연꽃 마음이라고 일컫는 수사, 하늘의 그림 같은 장관과 작은 꽃잎이 만리를 간다는 ‘말씀의 빛’을 암시하는 수사 등은 시적 함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구절임이 분명해 보인다.
속리산 법주사에 가면 팔상전 앞에 화강암으로 새긴 석련지石蓮池라는 신비한 강각崗刻이 언뜻 눈에는 별 매력이 드러날 것도 없이 서 있다. 그러나 자세히 눈을 씻고 보면 몇 마리의 호법신護法神의 사자가 이마로 이고 있는 것은 불법佛法의 상징인 연꽃이고, 또 그 피어 있는 연꽃 속은 맑고 향기로운 불법의 호수인 걸 본다. 이런 것은 불경에 전연 무식한 사람 눈에는 곧 그 논리를 대기가 어려워 어리둥절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으로, 가령 내가
세 마리 사자가
이마로 이고 있는 방 공부는
나는 졸업했다.
세 마리 사자가 이마로 이고 있는 방에서
나는
이 세상 마지막으로 나만 혼자 알고 있는
네 얼굴의 눈썹을 지워서
먼발치 버꾸기한테 주고,
그 방 위에 새로 핀
한 송이 연꽃 위의 방으로
핑그르르
연꽃잎 모양으로 돌면서
시방 금시 올라왔다.
- 「연꽃 위의 방」
어쩌고저쩌고 그 석련지식 미학을 빌려 시험 문자화해 보이면, 그만 당황하여 ‘무당판수’ 놀음이냐는 둥 상상에 이로理路가 안 닿는 표현이라는 둥 말한다.
쉬르레알리슴의 시들이 처음 발표되어 나왔을 때도 논리라는 속물을 앞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하였다.
안 보던 미의 새로운 세계를 접할 때는 논리는 차라리 던져버리고 겸허하고 순수한 센스로만 접하는 것이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일 것이다.(주2)

앞의 연재에서도 말한 바처럼, 시집 『신라초』와 『동천』을 출간할 즈음, 서정주는 “불교적 은유와 신라의 내부에 빚진 바가 크다.”고 자신의 시적 성취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당시 문단의 반응은 찬사도 있었지만, “그만 당황하여 ‘무당판수’ 놀음이냐는 둥 상상에 이로理路가 안 닿는 표현이라는 둥 말한다.”와 같은 반응과 ‘샤머니즘과 주술’, 심지어는 ‘선적 역설이 지닌 한계’ 등의 비판도 동시에 제기된다.
인용한 내용은 결국 이런 비판에 대해 ‘불교적 상상과 은유’의 가능성을 서정주가 직접 옹호하기 위해 쓴 글인 셈이다. 『신라초』와 『동천』이 서구적인 미학과는 다른 우주관과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미당 서정주 자신이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그의 실험과 모험적인 행보에 대하여, 4·19세대가 주도하던 당시의 문단은 ‘합리주의 정신’과 ‘이로理路’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어서, 그의 시가 ‘근대성 미달’이며 한국시가 토속주의로 역행하는 것이라는 우려를 보냈던 것이다.

당시 평론가들의 이런 비판은 고대주의나 향토주의를 일종의 ‘관주도적 내셔널리즘이나 복고적 미학주의’로 보고 경계한 까닭도 없지 않으나, 그보다는 미당 서정주의 표현대로 전통적 우주관이나 불교에 무지한 점, 주변부 컴플렉스와 오리엔탈리즘적 사유가 역으로 ‘불교’를 전근대적인 것으로 단정하게 만든 점 등의 이유가 더 크다고 하겠다.
불교적 삼세를 통한 현실관과 중생일가관衆生一家觀의 상상세계를 현실과는 무관한 ‘설화’의 영역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종교적 가치나 선적 지혜 역시 ‘통용될 수 없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불교의 설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불교적인 진리를 가리키는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마리 사자가 이고 있는 ‘연꽃 방’과 그 연꽃 위의 호수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한 은유이며, 연꽃의 마음 또한 형체가 없고, 향도 없고, 공空한 마음을 가리키는 하나의 수사이다. 애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가리키는 수사야말로 놀랍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서정주의 시적 상상력은 이 점에서 단순한 미적 유희의 영역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다시금 평가받아야 할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용어를 빌리자면, ‘색色’에 머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공’과 ‘색’을 횡단하는 시적 수사는 ‘영혼’과 ‘신령’, ‘마음’이라는 영역을 현대시 안에서 품을 수 있게 했고, 현대성과 합리주의가 지닌 폭력성을 역으로 드러나게 해 주었다. 『삼국유사』에 대해 서정주가 말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불교문학’의 가치에 대한 그의 분명한 자각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어떤가. 이것이 앞에 보인 내 시적 표현이라는 것의 모형이다. 이만하면 여태까지 동서양의 시에서 우리가 맛보던 상상의 세계나 은유들보다는 훨씬 다르고도 아름다운 신개지가 아닌가? 나는 이런 불교문학의 발굴과 시험에 동업을 구하고 싶어 이 무변蕪辯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주3)
<각주>
(주1) 서정주, 「불교적 상상과 은유」, 『미당 서정주 전집 13』, 은행나무, 2017. 314쪽.
(주2) 위의 글, 314~315쪽.
(주3) 위의 글,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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