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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퇴옹당 성철 종정 예하 열반 30주기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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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3 년 12 월 [통권 제128호]  /     /  작성일23-12-04 15:58  /   조회2,35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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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옹당 성철 종정 예하의 열반 3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를 알리기 위해 지난 9월 25일 오전 11시 조계사 템플관 3층 담소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 성철 종정 예하께서 선별한 <선림고경총서> 전37권을 성철넷에 e-book으로 무료 공개함(http://www.songchol.com/bbs/board.php?bo_table=3090)

■ 성철 대종사 열반 30주기 추모 학술세미나와 퇴옹학술상 시상식 개최

■ 10월 28일 성철 종정 예하 사리탑전에서 추모 3천배 참회기도 봉행

■ 백련암에서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4일4야 4만8천배 참회기도 봉행

■ 11월 3일 해인총림 대적광전에서 추모다례재 봉행

 

교계기자와 사회 언론기자들 20여 명이 넘게 참가하여 기자간담회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나의 현대사 보물」 - 나의 보물 1호는 성철스님

 

그간에 <조선일보> 김한수 부장이 “조선일보 연재물에 <Culture>란이 있는데, 여기에 ‘나의 현대사 보물’이라고 하여 소장하고 있는 물건 중에 역사적 보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습니다. 원택스님께서는 성철 종정 예하의 유품 중에 세상에 소개할 만한 귀중한 물건을 소장하고 있지 않으신지요? 이 기회에 한번 대중에게 소개하시죠.”라는 제안을 해 온 일이 있습니다. 

 

사진 1. 백련암 염화실에서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와 인터뷰 중인 원택스님.

 

소납은 “큰스님께서 워낙 검소하게 사시고 해외여행 한 번 가신 적이 없으신데 귀한 물건이라고 하며 세상에 내놓을 만한 게 뭐 있겠습니까.”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흐르는 세월 동안 어쩌다 김 부장을 만나면 그 질문을 또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소납의 대답은 늘 똑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7, 8월경에 김 부장은 좀더 구체적으로 “큰스님께서 1967년 백일법문 강의를 하셨을 때, 큰스님은 반대하셨지만 맏상좌 천제스님께서 그 법문을 릴 테이프에 녹음하셨고, 스님들이 그것을 카세트 테이프에 복사하여 서로 돌려가며 큰스님의 법문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원택스님께서도 그 테이프를 들으셨고, 그것을 혼자 듣기 아까워 노트에 녹취하셨고, 그 녹취록을 정리하여 ‘성철스님법어집’을 기획 출판하셨고, 큰스님께서 백일법문을 하신 지 47년 만에 『백일법문』 상·중·하 3권을 출간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그 릴 테이프와 카세트 테이프는 보관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어왔습니다. “그것은 큰스님의 소중한 유품이니 백련암에 잘 보관해 오고 있지요.” 그러자 김 부장은 반색을 하며 “그럼 그 큰스님 릴 테이프를 백련암이 간직한 보물로 해서 발표해도 충분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진 2. <조선일보> 인터넷 기사 화면.

 

그리하여 지난 9월 중순 백련암에서 인터뷰와 촬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추석 전에 게재될 것이라 하여 기다렸는데, 회사 내부 사정으로 미뤄졌다가 10월 17일 자 <조선일보>에 ‘나의 현대사 보물 24, 성철스님 제자 원택스님’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었습니다. 또 인터넷으로 보면 릴 테이프를 들고 있는 제 사진과 함께 2분 22초짜리 짧은 동영상도 있는데, 소납의 첫 번째 보물로는 ‘47년 만에 완간된 백일법문’, 두 번째 보물은 ‘책보지 말라던 성철스님의 장서藏書’, 세 번째 보물은 ‘성철스님 사리탑’이라는 제목과 함께 글과 여러 장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사진 중엔 종이신문에는 없는 사진도 있는데, 그중에 성철 종정 예하가 평생 간직한 장경각 장서 앞에서 찍은 사진은 소납의 인생 샷이 된 듯합니다.

 

오후가 되니 뜻밖에도 고등학교 동창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와! 스님아! <조선일보>에 사진과 기사가 크게 났네. 하도 반가워서 내 전화했다. 너무 기쁘다.” 하며 감격해하는 전율이 전해져 왔습니다. 또 조금 있으니 대학교 선배였던 분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받으니 “요새 한참 잊고 있었는데 마침 <조선일보>를 보고 깜짝 놀랐네. 이렇게 크게 기사가 난 후배를 보니 성철 큰스님을 위해 큰일을 하고 살기는 사는 모양이제. 나도 이렇게 기쁜데 다른 아는 분들은 오죽하겠나. 큰스님을 잘 모시려면 건강해라.” 하며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난데없이 여러 분들의 전화를 받으니 어리둥절했지만 김한수 부장에게 한없는 감사를 마음속에 담고 또 담았습니다.

 

사진 3. <동아일보> 인터넷 기사 화면.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동아일보> 이진구 기자가 10월 27일 자 A20면에 1/3 크기의 인터뷰 기사를 실으며 “큰스님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만나도 만나지 못한 것 같아”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평소 소납이 성철 종정 예하를 생각할 때마다 되뇌던 문구라 제목만 보고도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이렇듯 여러 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성철 종정 예하의 열반 30주기를 추모해 주셨습니다.


청명한 가을 햇살 아래 사리탑전 3천배

 

10월 28일에는 해인사 운양대에 건립된 퇴옹당 성철 종정 예하의 사리탑전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성철대종사 열반 추모 3천배 참회기도’를 올렸습니다. 1998년 11월, 열반 5주기 때 퇴옹당 성철 종정 예하의 사리탑 회향법회를 마친 다음해부터 추모다례재 날을 전후하여 토요일을 선택해서 3천배 참회기도를 30년간 봉행해 왔습니다. 코로나로 3년 동안은 공식 행사를 중지했으나 그래도 2~30명의 최소 인원이 모여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사리탑전 3천배 참회기도를 이어왔습니다. 

 

사진 4. 성철 큰스님 열반 30주기를 추모하며 ‘30’이라는 숫자를 국화꽃으로 장엄하고 5백여 명의 신도들이 청명한 가을 햇살 아래 3천배 참회기도를 하는 모습.

 

올해는 코로나가 해제되고 처음으로 하는 행사라 과연 대중이 얼마나 모일지 염려스럽기만 했습니다. 아비라카페 회원들을 위시하여 문도 사찰 신도님들에게 참여를 부탁하였는데, 마침내 행사 시작 10분 전에는 백련암에서 들고 내려와 사리탑전 바닥에 깐 좌복 500여 개가 모자라 좌복 두 개를 포갠 신도님들에게 하나씩 양보하도록 안내방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도님들도 이렇게 많이 모이다니 하며 깜짝 놀라며 모두 푸근한 마음으로 3천배 참회기도를 무사히 잘 마치니 소납의 마음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30년 동안 사리탑 전에서 3천배를 해 오는 동안 15년 전부터 서래심 보살님이 독獨시주자가 되고 대구 정인회 소속 신도님들이 힘을 합쳐 사리탑 원둘레 안을 4, 5백 분의 소국小菊으로 장엄하니 동참한 분들이 모두 흔연한 마음으로 3천배를 올릴 수 있는 분위기가 연출되었습니다.

 

사진 5. 4일 4야 추모기도 회향식에서 문선이 신도회장이 원택스님에게 죽비를 반납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퇴옹당 종정 예하의 열반 30주기를 추모하며 1미터가 넘는 크기로 ‘30’이라는 숫자를 국화꽃으로 장엄하니 사리탑전 3천배 참회기도의 분위기가 그 어느 해보다도 더욱 고취되었습니다. 청명한 가을 날씨도 한몫을 하였고, 해인사 단풍 관광객들도 사리탑전에서 울려오는 ‘지심귀명례’ 염불 소리에 이끌려 탑전으로 올라와선 500여 명의 대중이 함께 절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하였습니다. 한 중년의 남성 외국인은 “very beautiful sound!!”라고 하며 엄지척을 했다고 합니다. 

 

연합뉴스와 가진 강경구 교수의 글 중에서

 

그런데 11월 2일에는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가 성철 종정 예하의 『선문정로』를 연구 텍스트로 하여 ‘성철선’ 사상을 오랜 시간 탐구해 온 동의대 강경구 교수와 나눈 인터뷰 내용이 <연합뉴스>에 자세히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연합뉴스> 기사를 찾아보니 기사화되기 전에 소납이 전해 받은 강경구 교수의 서면 인터뷰 내용이 다 실린 것이 아니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빠진 내용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진 6. 『정독 선문정로』(2022년, 장경각 발행)의 저자 강경구 교수.

 

- 성철스님이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철스님이 보여준 초인적 수행과 확고한 깨달음입니다. 우선 초인적 수행입니다.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감행했던 8년간의 장좌불와(눕지 않고 좌선함)와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주석하는 도량 주위에 철조망을 치고 행한 10년간의 동구불출(암자의 산문을 나서지 않음)은 불교의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하나의 신화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확고한 깨달음입니다. 성철스님은 일상생활은 물론 잠자는 중에도 화두 참구가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삼매가 있어야 하고, 그것조차 뚫고 지날 때 깨달음의 차원이 열린다는 것을 체험하고 그것을 깨달음의 표준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수행 중에 일어나는 특별한 경계의 체험이나 선문답의 막힘없는 답변을 깨달음으로 인정하던 기존의 풍토를 뒤집을 정도로 강력하고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성철스님이 주관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실천한 봉암사결사는 한국불교의 수행, 교육, 포교, 의식주의 모든 측면에 있어서 그 불교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조계종은 봉암사 결사의 초석 위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성철스님이 대중들에게 남기려고 한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첫째, 물질을 넘어서는 정신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예외없이 티끌로 돌아가지만 정신은 불생불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불생불멸의 본래 정신이 우리의 영원한 자산이므로 그 계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모두 절대적 존엄성을 갖춘 부처라는 점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춘 본래 부처는 태양과 같습니다. 그런데 시비선악의 분별로부터 시작되는 번뇌망상이라는 구름이 그것을 가리고 있으니, 이 구름을 걷어내고 본래 청정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사진 7. 우리 시대의 부처로 추앙받는 성철 큰스님(1920~1993).

 

둘째, 불교를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속이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불법은 머물지 않음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머물지 않는 마음을 실천하되 가능하면 화두를 가슴에 품은 사람으로 삶의 모든 현장을 상대하자는 것입니다.

 

셋째,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에 의지하여 성립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자기를 위한 기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앞의 모든 존재가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절은 지금 당장 눈앞의 부처에게 올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3천배를 시키면서 가장 강조했던 것도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성철스님이 한국 불교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업적을 꼽으라면 『백일법문』에서 이론을 정립하고 『선문정로』에서 그 실천의 길을 제시한 ‘중도법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불교는 대승 우월주의에 서서 근본불교를 성문연각의 가르침, 혹은 소승의 가르침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현재에는 또 근본불교의 ‘근본성’을 강조하면서 대승불교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근본불교의 가르침이나 대승의 전체 교설이 한결같이 중도를 설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불교의 핵심이 중도에 있으므로 중도를 깨닫는 실천의 길 역시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부처님의 수행법(여래선)이 역대 조사들이 실천한 수행법(조사선)과 완전히 같은 것임을 강조해서 설했던 것입니다. 

 

- 성철스님은 장좌불와, 동구불출 등 극한 수행이나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3천배를 요구한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성철스님의 이런 수행이나 전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 일반인들이 성철스님처럼 그렇게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렇지만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이든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든 그 추구하는 바를 위해 전력을 기울일 필요는 있습니다. 성공, 행복, 사랑, 그 어떤 것을 추구한다고 해도 가만히 있는 곳에 그것이 저절로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위해 몸을 던져 오랜 시간과 지극한 정성을 들일 때 추구하는 바의 성취가 뒤따르게 됩니다. 특히나 행복은 그렇게 일심으로 추구하는 과정 자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8년씩 잠을 안 자고, 10년간 문을 닫아걸고 수행하는 일은 아니라 해도 우리 또한 그렇게 8년씩, 10년씩 간절히 마음 쓰는 일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성철스님은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절돈 3천 원’을 내라고 하면서 3천배를 요구했습니다.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절에 오는 목적과 보람이 부처님을 만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3천배 기도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이 너무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자신을 높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정스님도 처음에는 3천배에 대해 그것을 ‘굴신운동’이라고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언론사의 요청에 의해 대담을 진행하면서 “나를 보겠다고 온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기회에 부처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 3천배를 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남을 위해 기도를 하라고 하고 있다.”는 성철스님의 설명을 듣고는 감탄하며 그것에 공감한 일이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3천배는 성철 문도의 사찰에서 가장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기도에 속합니다. 성철스님은 진리에 들어가는 다양한 문을 제시하는 법문을 베풀었는데, 3천배는 그 최초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도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참선을 함께 하자고 권하는 편인데 3천배를 한 뒤 참선에 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3천배를 한 뒤 참선을 하는 사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3천배 자체가 기도이고 참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3천 번의 절을 하는 동안 ‘나는 잘났다’를 내려놓고 ‘당신이 부처님입니다’라고 찬탄합니다. 이만한 기도와 참선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3천배는 그 자체로도 성철선의 실천에 해당합니다.

 

큰스님을 시봉하는 그 마음 그대로 

 

그동안 백련암에서는 10월 30일 오전 7시부터 11월 3일 오전 7시까지 두 시간에 1천 배씩 릴레이 참회기도를 하여 4만8천배를 하는 참회법회를 회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9시부터 사리탑전에서 회향법회가 봉행되었습니다. 올해는 뜻밖에도 원圓 자 상좌들이 22명, 일日 자 손상좌들이 30여 명, 그리고 참회법회에 동참한 10여 명의 스님까지 합하여 60여 명에 가까운 스님들이 사리탑에 모였습니다. 

 

사진 8. 백련암에서 봉행된 성철 큰스님 열반 30주기 추모재에 참석한 문도스님들.

 

그래서 소납이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서 선뜻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스님이 모인 것도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종정 예하께 마지막 3배를 올릴 때 사리탑 바깥의 둥근 원둘레에 올라가 사리탑을 향해 3배를 올립시다. 그리고 추모다례재에 동참하기 위해 모이신 120여 명의 신도님들도 스님들의 뒤를 이어 원둘레에 올라가 3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리탑 추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서울 정심사 신도회장인 삼광월 보살이 다가와 “회주스님, 오늘 이렇게 스님들과 신도들이 번갈아가며 사리탑 원둘레에 올라가 큰스님께 3배를 올리니 너무 좋습니다. 이제 매년 사리탑 원둘레에 올라가 3배를 올리며 회향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며 크게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장님, 저도 매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원圓자, 일日 자 스님들이 20여 명도 채 모이지 않으니 그런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올해가 성철 종정 예하의 열반 30주기가 되니 상좌와 손상좌가 이렇게 많이 모여서 시도를 해서 모두에게 감동을 드렸다 생각하니 저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사진 9. 해인총림 대적광전에서 봉행된 추모다례재에서 문도대표로서 인사를 하고 있는 원택스님.

 

그리고 오전 10시 30분, 해인총림 대적광전에서 한 시간에 걸쳐 ‘퇴옹당 성철 종정 예하 30주기 추모다례재’를 엄숙히 마쳤습니다. 더욱이 동화사 방장 의현 대종사, 범어사 방장 정여 대종사, 학림사 전 원로의장 대원 대종사께서 참석하시어 그 어느 해보다 더욱 빛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백련암 염화실에 올라와 앉으니 다탁 위에 11월 3일 <문화일보> 23쪽 면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소납이 이를 환히 드러내며 웃고 있는 모습을 중심으로 기사가 배치된 데다 전면 기사라 깜짝 놀랐습니다. 전면 광고는 자주 봐 왔지만 이렇게 인터뷰를 전면全面으로 싣다니…, 무엇보다 “한국 현대불교의 가장 유명한 고승이 남긴 무거운 이름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삶이 원택스님만의 참선이고 수행이다.”라는 표현이 소납의 삶을 돌이켜 보게 하는 울림을 주는 표현이라 마음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진 10. 성철대종사 열반 30주기에 대해 전면 기사로 다룬 문화일보.

 

성철 종정 예하의 열반 30주기를 맞이하여 인터뷰 기사를 써 주신 <동아일보> 이진구 기자, <연합통신> 이세원 기자, <문화일보> 유승목 기자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일면식도 없었는데, 이렇게 지면을 할애하여 많은 분들에게 성철 종정 예하의 모습을 되살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뛰어넘어 성철 종정 예하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에게 잊히지 않고 또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서는 디딤돌 역할을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성철 종정 예하의 열반 30주기 추모행사가 원만히 치러질 수 있도록 애써주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2023년 올 한해 마무리가 풍성하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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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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