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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뼈아픈 성찰 속에 밝은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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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13:23  /   조회2,19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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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납이 1972년 1월에 출가한 백련암은 가야산 동편 쪽 해발 750~800 미터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해인사를 가려면 백련암에서 옛길을 따라 2미터 정도의 넓이로 다져진 흙길을 300미터 내려가 희랑대사希朗大師(889~967)가 주석하셨던 희랑대 암자 속을 지나면 30여 미터의 절벽에 계단식으로 돌들이 놓여 있고, 꺾여진 돌계단을 몇 층 지나면 흙길에 닿고, 이어서 엉성한 나무로 엮은 목책교를 건너 해인사 선원을 옆으로 끼고 한 산등성이를 둘러 내려가 극락전을 지나서 방장실인 퇴설당堆雪堂에 이르는 길이 유일하였습니다. 

 

쌓인 눈을 털어 대나무를 세우던 시절

 

백련암은 한겨울을 지나 1~2월이 되면 두세 번씩 30cm가 넘는 폭설이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백련암에는 지금 적광전과 관음전이 들어선 옆에 대나무밭이 있었습니다. 밤새 눈이 내려 댓잎에 눈이 소복이 쌓이면 대나무 가지가 땅에 닳을 듯 말 듯 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사진 1. 백련암 입구 고목나무가 있는 옛길을 걸어 올라오시는 성철 큰스님.

 

그러면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누구라도 댓잎의 눈을 털어 대나무들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백련암 대중들의 큰일이었습니다. 만약 큰스님께서 마당에 나오셔서 대나무 가지가 땅에 닿을 듯 말 듯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곰새끼들만 모여 있나!!” 하고 야단야단이셨기에, 눈만 오면 대중 스님들에게 기합이 쫙 들어가 있었던 기억입니다. 

 

당시 백련암에는 다른 법회는 없고 1년에 네 번 ‘아비라기도’라는 법회가 있었습니다. 음력으로 1월 4일~7일, 4월 12일~15일, 7월 12일~15일, 10월 12일~15일로 동안거·하안거 결제 끝으로 법회를 해 오고 있었습니다. 1981년 1월에 큰스님께서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으로 추대되시고는 그 기도 동참자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 동참자들이 자꾸 늘어나니 당시 백련암 방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마당에 천막까지 치게 되었습니다. 1988년 5월 17일에 적광전 상량식을 하고 관음전 불사를 마치니 기도 공간에 숨통이 좀 트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눈 치우는 운력에 비지땀을 흘리고

 

큰스님 시자로 큰절(해인사)로 큰스님을 모시고 다니던 때, 큰스님께서는 그 가파른 희랑대 계단을 휘적휘적 쉽게 오르셨는데 뒤따라가는 소납은 오히려 숨이 차 헉헉대면 휙 뒤돌아보시면서 “젊은 놈이 그리도 힘드나?” 하시고 득의연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진 2. 2024년 2월 눈오는 날의 백련암, 적광전에서부터 염화실, 천태전, 고심원, 영자당, 새 장경각, 원통보전, 정념당까지 도량의 모습이 갖춰지니 감회가 새롭다. 사진 현봉 박우현.

 

그러시던 큰스님께서 하루는 “내가 이제 늙었나 보다. 옛날에는 큰절 다녀오는 것이 힘도 안 들고 날아갔다 올 것 같더니만 이제는 힘이 든다. 나중을 대비해서 큰절에 다닐 수 있는 찻길을 내 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있는 자연환경의 손실을 최소한도로 하면서 길을 낼 수는 없을까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국일암 뒷길을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희랑대 밑 골짜기에 눈길을 멈추고 주위를 무심코 둘러보는데 갑자기 길이 훤히 뚫려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숲을 헤치고 내려오니 지금의 지족암 가는 갈림길까지 쉽게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팔뚝만 한 잡목들은 있었지만 큰 소나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에게는 미안한 길이 되었지만 자연환경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백련암에 이르는 일차로의 찻길을 닦게 되었습니다.

 

사진 3. 1967년 장경각이 지어지기 이전의 백련암.

 

그 길이 생긴 이후로 겨울인 1월과 2월에 눈이 오면 아침 공양을 마치자마자 백련암에서 해인사로 돌아서는 큰길 입구에 이르기까지 약 1km 넘는 눈길을 쓰는 게 백련암 대중의 큰 운력이 되었습니다. 만에 하나, 누군가 눈길을 달려 기도를 올 분의 안전을 위해서 길은 항상 말끔하게 뚫려 있어야 했으니, 백련암 대중들에게 겨울 눈 치우기는 큰 운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해인사에도 기후 변화가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한 해 겨울에 두서너 번은 희랑대를 경계선으로 해서 희랑대 아래로는 비가 오고 그 위 백련암 산등성이로는 눈이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희랑대 아래로는 비가 내리는데 백련암에는 눈이 펑펑 내려 백련암 주위를 장엄한 산봉우리에 금세 눈이 쌓이는 장관이 연출되었습니다.

 

사진 4. 1970년대 중반의 백련암.

 

무엇보다 장경각과 고심원이 없던 때와 고심원과 새 장경각이 우뚝 자리하고 있는 현재의 백련암의 눈 풍경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장엄함을 시현示顯하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쾌지나칭칭입니다. 어찌나 설경雪景이 아름다운지 저도 젊은 친구들처럼 폰으로 사진을 찍어 『고경』 지면에 보태볼까 생각하고 마당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런 날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모든 백련암 신도님들에게 연락을 해서 “백렴암에 어서 오세요!!”라고 전갈을 띄우고 싶습니다.

 

물론 백련암 대중 스님들은 눈이 내리면 예나 지금이나 약수암 뒷길을 지나 큰길에 이르기까지 천 미터 거리 눈을 치우는 일을 자기 일로 삼아 운력에 힘쓰고 있습니다.

 

뼈아픈 성찰이 있어야 미래가 밝다

 

잠시나마 펼쳐진 설경에 취해 옛일을 회상하며 3월호 목탁소리 전반을 쓰고 난 후에 2024년 2월 6일 0시 카타르 도하 앗수마마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요르단과의 2023년 AFC 카타르 아시안컵 4강전 중계를 보려고 TV 앞에 앉았습니다.

 

문득 2022년 12월 중순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이 극적으로 포르투칼을 2대 1로 꺾고 16강에 진출하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검은색 얼굴 보호대를 한 주장 손흥민 선수의 어시스트 골을 넘겨받은 황희찬 선수가 역전골을 성공하고도 10여 분간 숨죽여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를 지켜보던 순간, 16강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의 감격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때의 감동을 떠올리며 오늘도 요르단과의 4강 대결에서 넉넉히 승리하기를 기대하면서 중계를 기다렸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이번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64년 만에 우리나라가 우승하기를 바라는 주장 손흥민의 각오가 언뜻언뜻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4강전에서 거둔 성과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사진 5. 원택스님이 찍은 백렴암 석등과 불면석. 스님께선 이 사진에서 ‘나만의 비밀’을 말씀하셨는데, 『고경』 독자 여러분은 무엇이 보이시나요?

 

2023년 AFC 카타르 아시안컵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요르단, 말레이시아, 바레인으로 구성된 E조 그룹에 속했습니다. 조별 리그에서도 바레인과는 3대 1, 요르단과는 2대 2 무승부, 말레이시아와는 3대 3 무승부로 1승 2무에 그치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요르단전에서는 2대 1로 끌려다니다가 추가시간 1분 만에 겨우 1골을 만회하여 2대 2 무승부를 연출하였습니다. 말레이시아전에서도 3대 2로 이기다가 추가시간에 1골을 허용하여 3대 3 무승부로 경기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당초 E조 1위가 유력했지만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하여 축구팬들로부터 큰 우려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E조 경기가 끝나고 우리나라는 1월 31일 새벽 1시에 F조 1위인 사우디아라비아와 토너먼트 16강전을 치렀습니다. FIFA 랭킹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훨씬 앞서 있지만 아시안컵 대회에서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전반전을 0대 0으로 마쳤으나 후반 시작 1분 만에 상대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응원소리는 마치 홈경기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패색이 짙던 후반 추가시간에 조규성 선수가 극적인 헤딩골을 터트리면서 경기는 연장전으로 갔습니다. 그동안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공격수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조규성 선수에 대한 악플이 넘쳐났는데, 이 한 방으로 모든 허물이 벗어졌습니다.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양 팀이 승부차기에 돌입해 우리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를 4대 2로 물리치자 그렇게 시끄럽던 경기장은 무거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2월 3일 0시에 시작된 호주와의 8강전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16강전과 다름없었습니다. 카타르 알라이얀의 아흐마드 빈알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호주와의 8강전 경기에서 전반전에 1점을 먼저 내주고, 후반전에 추가시간이 6분 주어졌는데, 2분을 남기고 손흥민이 상대 수비수의 파울을 유도해 얻어낸 패널티킥을 황희찬 선수가 성공시켜 극적으로 1대 1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이어 연장전 전반 14분에 손흥민 선수가 골에리어 밖 3미터 지점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어 찬 볼이 앞을 가로막으며 골대를 지키고 있던 호주 선수들의 머리 위로 날카롭게 날아가 좌측 골대로 빨려 들어가는 골을 성공시켰습니다. 한밤중에 숨죽여 경기를 지켜보던 대한민국을 들썩거리게 한 멋진 골이었습니다. 정말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한 역전골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해서 4강에 올랐습니다. 여기에 모 신문기사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 등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 월드클래스급 선수들로 대표단을 꾸렸는데도 전·후반 90분 이내에 승부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추가시간과 연장전, 때로는 승부차기까지 끌고 가는 상황에 대해 “불편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기어이 골을 넣고 다음 라운드에 올라선다는 점에서 “스릴만점”이라거나 “어지간한 드라마나 영화보다 재밌다”는 등의 긍정 반응도 나온다.

 

사진 6. 호주와의 8강전 경기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고 날아오른 주장 손흥민 선수.

 

4강전, 소납은 우리나라 대표팀이 64년 만에 아시안 우승컵을 품에 안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요르단과의 경기를 관전했습니다. 시작 휘슬이 울리고 난 뒤 눈앞에서 벌어진 4강전에선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나약한 한국 축구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승리의 소식은 간 곳 없이 4강전은 요르단에 2대 0으로 맥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64년 만에 한국이 우승할 수 있다.”라는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지금껏 눈앞에 펼쳐졌던 경기들, 요르단전에 90+1분, 말레이시아전 90분+4분, 사우디전 90분+9분, 8강 호주전 90분+6분에 모두 동점골이 터져 연장전까지 끌고 4강에 오른 한국 축구의 치열한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허허롭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요르단에 충격적으로 패배를 하고 난 뒤에 대표팀이 보여준 경기력에 아쉬워하고 있던 축구팬들은 올해 초 대표팀의 주장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SON축구아카데미 감독의 발언을 재조명하며 씁쓸한 마음을 달랬습니다. 손 감독은 “냉정하게 한국 축구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번에 우승하면 안 된다. 당연히 우승하기를 바라지만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우승해 버리면 그 결과만 가지고 또 얼마나 우려먹겠느냐. 그러다가 한국 축구가 병들까 봐 걱정된다.”라고 한 인터뷰 발언이 재조명되었습니다. 대표팀 주장 완장을 차고 혼신의 힘을 다한 아들과 선수들의 투지와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아는 손 감독의 뼈아픈 질책은 한국 축구의 현실을 정확히 짚은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래도 4강까지 촌음을 다투며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낸 모든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진정으로 축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손 감독의 냉정한 일침과 성찰에도 응원을 보내는 바입니다. 

 

정월 아비라기도, 원만성취하소서

 

설이 지나고 나면 백련암은 정월 아비라기도로 새해맞이와 더불어 봄을 맞게 됩니다. 아비라기도도 축구 선수들처럼 몸과 마음의 준비가 없으면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매일 일과로 108배를 하여 다리 힘도 붙고 30여 분간의 장궤합장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정신력을 갖추고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자비심도 갖추어야만 합니다. 스물네 파트를 원만히 성취해 내기 위해서는 3박4일 간의 극진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동참자 모두가 승리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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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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