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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신라불교와 법상종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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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10 월 [통권 제138호]  /     /  작성일24-10-05 12:37  /   조회28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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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48_ 법주사 ❸    

 

점찰법은 그 내용도 괴이하거니와 중국의 법상종과도 이질적이어서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점찰법은 나무로 만든 점대를 굴려 나타난 상으로 점을 치는 목륜상법木輪相法으로 삼륜상법三輪相法, 육륜상법六輪相法, 신륜상법十輪相法이 있다. 진표 율사의 경우에는 189개의 간자를 던져 점을 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양나라 무제 때 시작된 점찰법회 

 

그 기원으로 올라가면, 인도에서 탑 안에 들어가 불상의 이마에서 빛이 나올 때까지 오체투지五體投地하고 울부짖으며 죄를 뉘우치는 탑참법塔懺法=搭懺法이나 이마 등 신체 일부를 땅에 찧으며 참회를 하는 자박법自撲法=자박참법自撲懺法=박참법撲懺法에 이른다. 주역점을 치는 경우와 같이 향을 먼저 피우고 진언을 외운 후 선악 두 글자를 쓴 첩帖이나 간자를 던지는 방법으로 전생의 업에 대한 점을 친다. 그런 다음 악업을 지은 것으로 나오면 그 죄를 없애기 위하여 몸 전체를 땅에 던지는 오체투지 등 신체를 학대하고 고통을 가하여 죄를 참회하는 행을 한다.

 

망신亡身, 즉 높은 곳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은 죽기를 작정하고 하는 행동이다. 진표 율사의 경우에는 바위나 돌 위에서 오체투지를 한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행동이다. 사실 이런 점찰법과 참회행은 불교철학의 정밀한 체계를 중심으로 하는 법상종과는 관련이 없다. 그래서 진표 율사를 법상종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사진 1. 숭산 달마동.

 

중국에서는 양나라 때 이런 점찰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양 무제武帝(재위 502∼549) 원년인 520년에 무제의 아들인 소명태자昭明太子(501∼531)가 지었다는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에서 참법수행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싯다르타도 잘못이라 한 것이 중국을 통해 한반도까지 전해진 것 같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볼 때, 신체를 망가뜨려 죄를 씻는다거나 점을 쳐서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부터 잘못된 것이지만, 악업을 없앨 수 있다고 하고 기이하게 참회하게 한 것이 대중들로 하여금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을 수는 있어 보인다. 『문선文選』을 편찬한 소명태자가 이런 이상한 책도 지은 것 같다. 아무튼 위진남북조의 혼란 시기에 거대한 땅을 가졌던 양나라도 무제가 불교에 깊이 빠져들며 혼돈을 거듭하다가 갈족과 선비족의 공격을 받고 결국 망해 버렸다.

 

아무튼 이런 장면 이외에 이 당시에 사실 여부를 떠나 양 무제와 보리달마菩提達磨(?∼?)가 만나는 장면도 있고, 달마대사가 중국 숭산嵩山의 동굴 속에서 면벽참선한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되어 중국에 선종이 시작되는 장면도 있다. 소림사少林寺가 있는 숭산에는 달마대사가 수행했다는 달마동達磨洞이 있다. 동시에 인도 중관학中觀學의 체계를 수용한 삼론종三論宗도 발전하였는데, 무제는 랴오뚱 출신 고구려 승려 승랑僧朗(?∼?) 화상을 높이 평가하여 512년에는 뛰어난 학승 10명을 선발하여 승랑 화상이 주석하고 있는 남경南京 섭산攝山의 서하사棲霞寺로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또 유식학의 대가인 인도 출신의 진제眞諦(Paramārtha 499∼569) 삼장三藏을 초청하여 그가 가지고 온 『섭대승론攝大乘論』, 『구사론俱舍論』,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 많은 경론들이 번역되기에 이르렀다(진제의 구유식학).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Abhidharmakośa∼śāstra)』은 당대의 대논사大論師(great scholar)인 바수반두(Vasubandhu 婆藪槃豆, 世親=天親, 400∼480년 경, 또는 320∼400?)가 푸루샤푸르 즉 현재의 페샤와르에 있었던 카니시카 대승원[葛諾歌寺]에 머물며 저술한 방대한 저작이다. 바수반두는 『섭대승론』을 지은 유가행파의 대표 논사인 아상가(Asanga 無着, 300∼ 390?)의 동생이기도 한데, 오늘날 그 형제들의 고향이자 쿠샨 왕국의 수도였던 페샤와르에 당대 세계의 인재들이 몰려들었던 카니시카 대승원과 서역 최고의 탑인 카니시카 대탑[雀離浮圖]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진 2. 샤지키 데리 출토 붓다사리기, 페샤와르뮤지엄.

 

당대 대부분의 구법승들이 그랬듯이 현장 법사도 이곳을 방문하였다. 그때에는 대탑과 대승원의 허물어진 모습과 바수반두가 머물며 집필했던 방에서나마 옛 모습을 가늠할 수는 있었다고 써놓았지만, 지금은 당시 탐구의 불을 뿜어내며 인간 지력智力의 끝을 보려고 했던 그들의 구법의 자취는 찾아보기 어렵다. 카니시카 대탑이 있었던 지역으로 비정되는 샤지키 데리(Shah∼ji∼ki∼Dheri)는 아쿠나바드(Akhoonabad)로 동네 이름이 바뀌었다. 사실 불교학의 정밀한 이론체계는 유식학에서 최고 정점에 이르렀는데, 유식학은 이들 형제에 의해 집대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종과 성종, 신라 불교의 양대 산맥 

 

신라 불교의 초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유식학唯識學은 6세기 초에 선비족 탁발씨拓拔氏=원씨元氏가 세운 북위北魏(386∼534)의 낙양洛陽에 온 남인도의 보리류지菩提流支=達磨流支Bodhiruci(572∼727)와 늑나마제勒那摩提Ratnamati에 의해 시작된 중국과 비교하여 교리적이거나 학리적으로 탐구되기보다는 미륵신앙, 미타신앙 등 이른바 왕생往生 신앙으로 종교성을 강하게 띠면서 전개되었다.

 

당나라에서 유식학은 현장玄奘(602∼664) 법사가 개창한 유가유식瑜伽唯識으로 시작되어(현장의 신유식학) 자은대사慈恩大師 규기窺基(632∼682) 화상과 원측圓測(613∼696) 화상에게서 체계화되고 발전하여 법상종法相宗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규기파의 세력들은 원측파를 견제하면서 현장 화상이 주석했던 대자은사大慈恩寺를 차지하고 종지를 체계화하여 자은종慈恩宗이라는 중국 법상종을 창종創宗하기에 이른다.

 

사진 3. 서안 흥교사의 탑(좌로부터 규기법사ㆍ현장법사ㆍ원측법사탑). 사진: 불교신문. 

 

고려에서도 법상종을 자은종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로써 화엄종, 천태종 등 여러 대승종단 내에서도 핵심 주제들에 대하여 발전적인 논쟁이 전개되는 계기가 형성되었는데, 교리나 철학에서는 이런 논쟁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신라의 유식학은 나중에 의상義湘(625∼702) 대사의 화엄사상과 경쟁하기도 하고 또 세월이 지나면서 화엄종의 요소도 수용하는 모습을 띤다.

 

효소왕孝昭王(재위 692~702) 원년인 692년에는 당나라 장안의 서명사西明寺에 주석하던 서명학파의 종주宗主 원측 화상의 유식학을 전수받은 도증道證(?∼?) 화상이 신라로 귀국하였다. 같은 시기에 의상 대사의 제자로 당나라로 건너가 현수국사賢首國師 법장法藏(643∼712) 화상에게서 공부를 마친 승전勝詮 화상도 법장의 저작들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후 신라에서는 유식학(=상종相宗)과 화엄학(=성종性宗)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전개되어 신라 불교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서명사는 현장 법사가 인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창건하고 잠시 머물기도 했던 사찰인데, 당 고종高宗(재위 649∼683)과 측천무후則天武后(재위 624~705) 사이에 태어난 홍弘이 656년에 4살로 황태자가 되면서 이를 기려 세운 절이었다. 신라승 원측 화상은 당 황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이 서명사에서 명성을 날렸다.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의 차남인 제31대 신문왕神文王(金政明, 재위  681∼692)은 686년경 무렵에 원측 화상을 신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데, 이때 측천무후는 신라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사실 686년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예기禮記』와 문장文章을 요청하였을 때, 측천무후는 관청에 명하여 『오례五禮』 가운데 길례와 흉례를 요약한 『길흉요례吉凶要禮』를 베끼도록 하고 거질巨帙의 시문총서詩文叢書인 『문관사림文舘詞林』 가운데 모범이 되는 글을 선별하여 50권의 책을 만들어 보내주기까지 하였지만, 원측 화상의 환국 요청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들의 승탑은 현재 서안西安 흥교사에 있다.

  

중국까지 명성을 날린 태현 화상

 

신라시대 법상종法相宗은 현장의 유식학을 배우려고 당나라 유학을 결심했던 원효元曉(617∼686) 대사에 의해 시작되어 8세기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대에 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주석하며 유가종조瑜伽宗祖로 명성을 날린 태현太賢=大賢(?∼?) 화상에 의해 하나의 학파적 교단으로 성립되기에 이른다. 

 

도증 화상의 고제高弟로 중국에까지 명성을 날린 그 시대 신라 불교의 대표적 거장이자 대논사인 태현 화상은 여러 경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를 위시하여 정토종淨土宗, 계율종戒律宗, 화엄종, 기신론起信論, 중관학中觀學, 논리학인 인명학因明學, 유식학 등에 관한 방대한 경론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유식학에 중점을 두면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주석함에 있어 원효의 견해와 현수법장의 견해를 모두 종합한 후 자신의 견해를 정립한 것과 같이 모든 경론의 주석에 있어서도 종래 논사들의 모든 견해를 모두 종합·분석한 후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사진 4. 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

 

『삼국유사』에는 영민하고 지혜가 뛰어난 태현 화상이 용장사에 주석할 때 항상 돌로 만든 미륵장육존상 주위를 돌았는데 그때마다 그 불상도 태현 화상 쪽으로 따라가며 얼굴을 돌렸다고 전한다. 일본 승려 응연凝然(1240∼1321) 화상은 『태현법사행장록太賢法師行狀錄』를 지었고, 당나라 천복사薦福寺 도봉道峯 화상은 『태현법사의기太賢法師義記』 서문에서 500년에 한 번 나올 정도의 걸출한 인물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00여 년 전 간다라 지역에서 뛰어난 논사들이 탐구의 불을 뿜었던 그 열기가 현장 법사의 신역불전新譯佛典들이 신라에 전해지면서 다시 신라 땅에서 그 치열한 탐구의 열기가 불타올랐던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이 올바로 사는 것인가 하는 궁극의 문제를 놓고 말이다.

 

사진 5. 용장사 계곡 석조여래좌상.

 

태현계법상종과 진표계법상종

 

불교의 철학과 지식을 깊이 탐구하여 도증, 승장勝莊(?∼?), 원효, 순경順璟, 경흥憬興(?∼?), 태현 등 유식학의 거장들이 활약한 법상종은 경덕왕 이후 신라 중하대로 접어들면서 왕실과 결탁한 화엄종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또 선종禪宗의 전개로 약화되어 갔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다시 흥기하여 고려 교학불교의 중심으로 오랫동안 전개되었다. 사실 유식학은 인도 불교철학의 최정점이었던 것에 반하여 화엄종이나 선종은 중국에서 형성된 불교이다.

 

당의 현장∼신라의 원측∼도증∼태현으로 이어지는 교학 중심의 태현계유가법상종太賢系瑜伽法相宗은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옛 신라지역을 중심으로 미륵신앙과 아미타신앙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달리 원광圓光(555∼638)∼진표眞表(?∼?)∼영심∼심지로 이어지는 진표계법상종眞表系法相宗은 점찰과 참회에 치중하면서 미륵신앙과 지장신앙을 바탕으로 신비주의적 경향을 나타내며 전개되었는데, 이는 심오한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서 평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시대에 흥기한 법상종은 태현계법상종이었다. 잠시 대중에게는 어필했을지는 몰라도 무속巫俗이나 주술처럼 이상한 점찰법회를 한 진표계는 점차 쇄락해 간 것 같다. 

 

아무튼 『점찰경』과 점찰법회는 중국에서는 수隋나라 때인 580년 경부터 퍼지기 시작한 것인데, 지장삼부경地藏三部經이라고 부르는 『점찰경』, 『십륜경十輪經』,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은 지장신앙의 핵심 경전으로 역할을 했다. 『점찰경』에는 설법자가 지장보살로 되어 있다. 원광 법사는 육조六朝 시대인 578(589?)년에 진陣나라(557∼589)로 유학을 갔다가 진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수나라에서 공부한 후 수문제文帝(양견楊堅 재위 581∼604) 20년 즉 600년(진평왕 22)에 중국에서의 11여 년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가 주석했던 가서갑嘉西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고 점찰법회를 펼친 것은 당시 수나라에서의 유행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진표 율사도 이러한 신앙 속에서 대중과 참법수행을 펼쳐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수나라에서는 593년에 이미 점찰법회가 금지되었고, 『점찰경』도 힘을 잃었다.

 

현장 법사와 법상종의 발전

 

당나라에서는 현장 법사가 651년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을 번역하면서 지장신앙이 퍼졌는데, 이 경의 서문을 지은 사람이 현장 법사 4대 고제高弟에 속하며 유식학의 대가인 신라 승려 신방神昉(?∼?) 화상이다. 신방 화상은 현장 법사의 역경에 필수筆受로 직접 참여한 신예로 법해사法海寺의 승려로 있었는데, 역시 유식학에도 해박하였다.

 

인도와 서역에서 미륵신앙은 특정 종파의 신앙이 아니었는데, 중국에서 현장 법사가 미륵신앙을 수용하고 특히 규기 화상이 개창한 법상종의 소의경전 중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십칠지론十七地論』을 저술한 논사(scholar) 미륵彌勒(Maitreya) 화상이 이름 때문에 미륵보살과 동일 인물로 오해되면서 중국의 법상종에서는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급기야 법상종은 미륵불을 주불로 하기에 이르지만, 그 맥락을 보면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고려 법상종에서의 미륵신앙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인도 마가다국 날란다(Nālandā, 那爛陀)대학에서 인식론, 존재론, 논리학, 언어학, 의학, 기술학 등 정밀한 지식체계를 철저히 공부한 당대의 천재 현장 법사가 갑자기 미륵신앙을 수용한 것은 의아스럽게 보인다. 날란다대학에는 유식학의 종장 시라바드라(Silabhadra, 계현戒賢, 529∼645)가 주석하고 있었고, 1만 명의 승려들이 모여들어 엄격한 커리큘럼에 따라 타이트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하기야 현장 법사가 뛰어난 불교학자만이 아니고 이미 불교의 고승이었기에 철학의 지식체계와 신앙의 도그마(dogma) 체계라는 서로 상충하는 두 세계를 연결시키는 난제에 직면해서는 여간 고민이 크지 않았으리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가 천재적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도미니코 수도회(Ordo fratrum Praedicatorum)의 수도사인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체계와 기독교의 도그마 체계를 연결시키는 난제를 앞에 놓고 결국 명쾌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던 고통도 이와 같았으리라 생각된다.

 

사진 6. 낙양 현장고거.

 

나는 영민한 현장 법사의 탐구적인 삶이 인상적이어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이곳저곳을 가보고 급기야 현장 법사의 고향이라는 낙양 진하촌陳河村의 ‘현장고리玄獎故里’에까지 발걸음이 닿았다. 역시 오늘날 중국답게 스토리텔링의 테마파크를 만들어 놓았다. 현장 법사의 조부 진강소陳康所가 판 옛 우물인 ‘혜정慧井’의 물을 현장 법사가 어릴 때 마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당나라 관리의 사저 모습을 재현하여 ‘현장고거玄獎故居’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주위는 넓은 공원으로 조성하여 관람료 수입을 올리는 데 관심이 있어 보였다. 특히 ‘현장기복공원玄獎祈福公園’이라고 이름을 떡하니 붙여 놓은 구역을 보고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현장 법사가 무엇을 고뇌하고 탐구하였으며, 인류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졸지에 현장이 기복의 장소에서 복을 주는 사람으로 소환되어 있었다. 

 

심의식心意識, 마음을 분석하는 세 가지 범주

 

원래 유식학은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한 것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있어서 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체계에 기반하여 구명究明하는 것이었다. 먼저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철학에서 인식론과 논리학의 문제이고, 오늘날에는 뇌과학에서 연구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마음이라는 것이 초기 경전에는 생각하는 심心(citta, 음역: 質多), 사량思量하는 의意(manas, 음역: 末那), 마음 작용의 대상을 인식·판별하는 식識(vijñāna 음역: 毘若南)이라는 개념으로 등장했는데, 학자라면 먼저 이러한 개념부터 명확히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개념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마음이라는 본체가 있는가? 마음은 하나인가 여러 개인가? 마음의 작용은 있는가? 있다면 그 성질은 어떠한 것이며, 마음의 본체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마음의 작용은 하나씩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여러 개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가? 마음에 의해 형성된 것[心所]은 마음의 본체와 따로 존재하는가? 마음의 본체는 층위가 있어 부분으로 분해되는 것인가 일체의 것인가? 마음에 층위가 있다면 그 층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인식의 과정은 있는가? 인식의 과정이 있다면 이것이 단계적으로 세분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등등의 질문이 핵심 주제였고, 이는 바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였다. 식에서도 6식설, 8식설, 9식설 등으로 설이 나뉘어졌다. 모든 의문사항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데까지 사유를 끝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는 불교에서 논의된 것이기도 하지만, 철학의 근본 문제이기도 하다. 신라에서 이 문제들을 탐구한 논사(scholar)들은 천축의 붓다가 설파한 이러한 철학을 한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인식론이 미륵신앙이나 점찰법이나 지장신앙과 결합된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신라시대에 아라한에 해당하는 고승들은 유식학에서 이 문제를 궁구한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문자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고도의 철학체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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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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