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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금빛 찬란한 미륵대불과 고색 찬연한 석물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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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12 월 [통권 제140호]  /     /  작성일24-12-05 10:17  /   조회15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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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50_ 법주사 5

 

팔상전의 1층과 2층은 5칸으로 되어 있고, 3층과 4층은 3칸이며, 5층은 2칸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각층 사이에는 간단히 창만 두고 있어 다채로운 구조로 높이 세운 일본의 5층 목탑과는 차이가 있다. 일본의 5층 목탑은 화려하기도 하거니와 올라갈수록 좁아드는 비율을 작게 하여 전체가 장중하고 우람하게 보인다. 

 

사진 1. 교토 동사東寺 5층 목탑. 사진: 京都の名所. 

사진 2. 경주 황룡사지 9층 목탑 주춧돌과 심초석. 사진: 樂出虛.

 

중국에 산재한 고층의 탑이나 누정의 건물도 좁아드는 비율이 작다. 1238년 몽골침략 때 소실된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80m 정도의 높이로 추정되는 황룡사 9층 목탑의 복원 문제를 두고 학계에서는 수년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팔상전의 구조와 팔상도

 

목탑 내부의 가운데에는 5층까지 바로 닿는 속 기둥인 심주心柱=찰주刹柱를 세우고 바깥에 4층까지 닿는 4개의 기둥을 세워 속 기둥과 연결시켜 놓았다. 이를 중심으로 하여 네 방향으로 마루를 설치하여 참배자로 하여금 마루를 따라 돌며 8개의 장면으로 된 붓다의 일대기인 팔상도八相圖를 배관할 수 있게 했다.

 

팔상도는 ①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모습의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② 룸비니Lumbini 동산에 붓다가 탄생하는 모습의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③ 네 문으로 나가 세상을 둘러보는 모습의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④ 성을 떠나 출가하는 모습의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⑤ 설산에서 수행하는 모습의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⑥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들을 항복시키는 모습의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⑦ 녹야원Sarnath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의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⑧ 쿠시나가르Kushinagar의 사라Sala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의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되어 있다.

 

사진 3. 팔상전 내부.  사진 4. 팔상전 내부. 

 

현재의 팔상도는 1897년에 약효若效(1846∼1928), 봉수奉秀(1868∼?) 등 유명한 화승畵僧들이 제작한 것이다. 동쪽에서 남, 서, 북쪽으로 도는 방향으로 배치되어 탑 내부에서도 시계방향으로 탑돌이를 하며 경배할 수 있게 공간을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팔상전에는 314위의 납석 불상과 18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남쪽 중앙에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오른쪽에는 미래의 미륵보살, 왼쪽에는 과거의 제화갈라보살을 봉안하였다. 속 기둥 아래의 심초석心礎石 위에는 사리공舍利孔을 파서 이곳에 사리를 담은 사리장엄구를 봉안하였다. 이 사리장엄구는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팔상전에서 서쪽으로 보면 금색미륵여래입상이 서 있다. 원래 이쪽으로는 조선 후기까지 2층 35칸으로 지은 금당인 용화보전이 있었고, 그 안에는 금색의 미륵장육상이 있었다. 그러나 1866년에 이 미륵장육상과 용화보전이 헐린 후 1939년에 태인泰仁 갑부 김수곤金水坤의 발원으로 산호전 자리에 시멘트로 미륵대불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석고로 금산사 미륵대불을 제작했던 조각가 김복진金復鎭(1901∼1940)이 작업 중 갑작스레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4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발원으로 신상균에 의해 완성되었다.

 

사진 5. 수정봉을 배경으로 한 금색미륵여래상. 

 

그 후 1987년에 이 시멘트 미륵대불을 없애고 옛 용화보전 자리에서 옆으로 조금 옮긴 현재의 자리에 수정봉을 배경으로 33m에 달하는 금색의 청동미륵여래입상을 다시 조성하여 1989년에 완공하였다. 아래 기단 내부에는 용화전을 조성하였다.

 

사자를 조각한 석등으로는 가장 오래된 쌍사자석등

 

팔상전을 지나 참도를 걸어가면 그 유명한 쌍사자석등이 있다. 원래 이 석등 앞에는 강당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 극락전이 들어섰는데 이 건물도 후에 없어지고 다시 문수전이 세워졌다가 헐리고 현재 석등만 영문도 모른 채 보호각에 들어 있다. 이 석등은 법주사 창건 당시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지금은 팔상전을 지나면 대웅보전까지 시야가 탁 트이는 넓은 공간으로 되어 있다. 문수전은 1970년대 몰려드는 단체 관광객들이 대웅보전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을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다는 아우성에 못 이겨 헐려졌다고 한다. 인간의 욕망과 무지 앞에서는 아미타불이든 문수보살이든 맥을 못 추는 모양이다.  

 

사진 6.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극락전을 복원하는 것이 흐트러진 가람배치의 격을 다시 높일 것 같다. 법상종에서 아미타신앙이 수용된 것은 바수반두가 『정토론淨土論』에서 극락왕생을 염원한 것에서 비롯한 것인데, 신라에서는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미타신앙이 법상종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많은 유식학의 거장들도 『아미타경阿彌陀經』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쌍사자석등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다. 현재 법주사, 광양 옥룡사, 합천 영암사에 통일신라시대 때 만든 3점의 쌍사자석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법주사의 석등이 가장 아름답다. 쌍사자석등은 가운데의 간주석竿柱石을 통상의 팔각 돌기둥 대신에 서로 마주 선 두 마리의 사자가 앞다리를 뻗어 화사석火舍石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을 한 석등을 말한다.

 

사진 7. 쌍사자석등.

 

법주사의 쌍사자석등은 720년(성덕왕 19)에 조성한 것으로 사자를 조각한 석등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사자를 본 적도 없는 그 옛날에 이런 조각을 한 것도 놀랍거니와 비례와 균형이 뛰어나고 사자의 뒷다리와 앞다리의 근육이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의 갈기뿐만 아니라 몸 전체도 힘을 주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 살아 있는 사자처럼 표현되어 있다. 두 마리의 사자도 같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배 부분은 붙이고 나머지는 떨어지게 하여 공간감을 살린 것에는 실로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사자가 딛고 있는 돌에도 연꽃을 새기고 앞발로 떠받치고 있는 돌에도 두 줄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도대체 어떤 석공이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을 한 것일까? 보면 볼수록 놀라울 뿐이다. 이 석등의 전면으로 왼쪽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약사여래를 봉안한 약사전이 있다.

 

사진 8. 쌍사자석등 뒤로 보이는 조선시대 조성된 사역.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의 약간 뒤에 석물로 위계가 구분이 되는 석단의 선이 있는데, 이 축선 뒤로부터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영역이다. 이 영역에 진영각, 명부전, 삼성각, 선희궁 원당, 대웅보전 등이 조성되어 있다. 원통보전과 약사전 사이에 있었던 극락전은 헐렸고, 그 터는 널찍한 마당으로 바뀌어 대웅보전이 훤하게 바로 보인다. 동쪽에 있는 강원, 동요사채, 북요사채, 승방은 근래 조성한 건물이다. 원통보전, 약사전, 극락전은 원래 있었던 회랑의 축선 위에 세워진 것인데, 원통보전의 기단과 계단, 초석 등 하부구조는 원래의 것들이다. 원통보전에는 임진왜란 후 사찰을 중창을 할 때 조성한 2.8m의 목조 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사진 9. 원통보전.

 

쌍사자석등은 강당 앞에 세운 것이었지만 그 강당(나중에 극락전, 문수전이 건립)이 사라진 지금에는 쌍사자석등이 왜 이곳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더구나 봉발석상, 사천왕석등, 석련지 등도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오늘날 법주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여기저기 서 있는 석물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쌍사자석등이 있는 곳에서 앞으로 가면 석단으로 구분되는 한 계단 높은 구역으로 올라가게 된다. 바로 대웅보전의 앞마당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이다. 이곳에는 8면으로 된 화사석에 4면에는 창을 두고 나머지 4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긴 사천왕석등이 서 있다. 연꽃을 조각한 3단의 받침돌을 두고 8곳의 귀퉁이가 약간 올라간 옥개석을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한 것으로 본다. 현재 이 석등은 대웅보전 앞에서 불을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산호전을 장엄했던 석물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석등이 조선시대에 건립한 대웅보전 앞에 서 있으니 더욱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사진 10. 사천왕석등. 

 

대웅보전과 아름다운 봉발석상

 

1624년에 지은 대웅보전은 외견상 2층으로 된 전면 7칸 측면 4칸의 장대한 건물이다. 다포 양식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가운데는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로 높이 5.5m의 삼신불三身佛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의 조성에는 벽암 대사가 참여하였는데, 개금은 1747년에 와서 하였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의 불상 가운데 가장 일찍 조성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삼존불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 약사불(동쪽)과 우 아미타불(서쪽)로 구성하는 삼계불三界佛의 경우와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여 약사불과 아미타불로 구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법주사와 같은 구성은 구례 화엄사에서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이 전각의 명칭이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이라고 했다. 비로자나불을 가운데 봉안했으므로 현재의 대웅보전이라는 명칭은 옳지 않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대광명전大光明殿으로 하는 것이 옳다.

 

 사진 11. 사천왕석등과 대웅보전.

 

1706년 9월에 속리산 유람을 떠나 법주사를 방문한 이현익 선생은 5층 전각이 1동, 2층 전각이 2동, 십자각十字閣이 1동, 산형각傘形閣이 1동이 있다고 「유속리산기遊俗離山記」에 기록하였다. 5층 전각은 팔상전이고, 2층의 전각은 산호전과 대웅보전을 말하는 것 같은데, 십자 모양의 전각이나 부채 모양(아마 8각)의 전각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대웅보전에서 나와 원통보전 옆 산자락 구석으로 보면 보호각 속의 봉발석상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발우를 들고 있는 돌로 만든 상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궁금하다. 

 

사진 12. 봉발석상. 

 

『법주사사적기法住寺事蹟記』에 의하면 석조희견보살입상石造喜見菩薩立像으로 되어 있다. 희견보살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보살인데, 이 세상에 공양을 하기로 원을 세워 종국에 자신의 몸을 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하고 약왕보살藥王菩薩로 다시 태어나는 보살이다. 이에 반해 이 석물의 원래 자리가 미륵신앙 공간임을 착안하면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따라 미륵보살이 세상으로 내려와 중생을 교화할 때 가섭존자가 석가모니의 가사와 발우를 받들어 유훈을 전달하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연꽃을 새긴 아름다운 발우를 받침대에 얹어 받들고 있는 사람은 마하가섭摩訶迦葉(Mahākāśyapa) 존자가 된다. 이 석상도 원래 미륵불을 봉안했던 산호전(=용화보전) 앞에 있었다. 

 

이제 금색미륵여래입상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옛날 산호전이 있던 자리를 확인할 수 있고, 이 미륵여래입상 앞 보호각에 있는 195m 높이의 석련지를 볼 수 있다. 국내 어느 절에도 없는 석물이다. 신라시대 쌍사자석등을 조성할 때 만든 것이다.

 

사진 13. 석련지. 

 

8각의 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연꽃무늬를 새기고 3단으로 다듬은 상부에 복련으로 장식을 하였다. 그 위에 구름무늬를 가득 새긴 돌을 잘록한 허리 모양으로 얹고 다시 그 위에 피어나는 연꽃봉오리 모양을 한  석물을 얹었다. 크기는 거대하지만 통통한 연꽃봉오리가 막 피어나는 생동감으로 인하여 그저 예쁜 연꽃봉오리처럼 보인다.

 

꽃봉오리의 아래에는 8개의 연꽃잎을 새기고 그 위에 다시 8개의 커다란 꽃잎을 조각하고, 그 꽃잎마다 보상화문寶相華紋을 새겨 넣었다. 그 사이에는 작은 꽃잎들을 여러 겹으로 겹쳐 조각하였는데, 참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석물의 입 가장자리에는 난간 모양으로 작은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천인상天人像과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나는 이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멈추기도 하고 둘레를 돌기도 하며 한참 동안이나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사진 14. 연꽃 장식 발우 모양의 사리기. 탁실라박물관.

 

너무나 정교하고 화려하다. 작으면 붓다에게 봉헌하는 찻그릇이라고도 하겠지만, 이 큰 석물이 그럴 리는 없겠다.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붓다에게 봉헌한 발우鉢盂=鉢多羅(pātra)라고 보는 것이 봉발奉鉢 신앙과 미륵신앙과 합치할 것이다. 파키스탄 탁실라Taxila 박물관에서 이와 흡사한 연꽃 장식을 한 발우모양의 사리기舍利器를 보았을 때 이 석련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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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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