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책의 향기]
초기 선종과 북종선 연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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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 2019 년 1 월 [통권 제6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72회 / 댓글0건본문
화중우火中牛 | 불교학자 · 자유기고가
비교적 담백淡白한 맛을 자랑하는 한국 불교계와 불교학계에 그나마 ‘학술적學術的 담론談論’이 끊이지 않고 산출되는 분야 가운데 한 곳이 선종사와 선학사상 파트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강단講壇에서 간간이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거나 펴내고 있고, 매년 동안거·하안거 때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선객禪客들이 선원 문지방을 오르내리며 화두話頭와 씨름하고 있기에 대단히 풍성하게 보인다.
그런데 한 걸음만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강단이나 선원에서 거양擧揚되는 주요 화제話題는 당나라의 혜능·마조·임제·운문·조주, 송나라의 원오·대혜와 관련된 정도에 불과하다. 남종선과 화두선에 변재辯才와 화력話力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선학사상 전개에 영향을 끼친 중국선학사상의 발전 과정에 역경譯經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 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불학이 선사상 태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선의 사상적 토대는 어떤 것인지, 이른바 소승선과 대승선의 차이는 무엇인지, 북종선과 남종선은 사상적으로 정말 완전히 다른 것인지, 선이 추구하는 것이 과연 대승불교의 실천방향과 일치하는지 등은 논의의 대상에 대개 오르지 못한다. 논의하는 화제話題가 상당히 좁은 것이다.
운주사가 펴낸 초기 선종 관련 책. 왼쪽부터 『능가사자기』, 『달마선』, 『선과 깨달음』.
사실 선禪사상의 전개는 불교사상의 발전에 좌우되어 왔다. 선이 불교사상의 발전을 주도해 온 것이 아니다. 초기·부파불교에서 대승으로 넘어가듯이 선의 사상도 그렇게 변해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승불교도 하루 아침에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불교사상의 발전 도상途上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체형體形을 키우고 가다듬은 것이 대승大乘이다. 부파불교의 거두들이 사력思力을 모아 펴낸 『아비달마대비바사론』 같은 논서가 없었다면 『대지도론』이나 『유가사지론』 같은 희대의 사상思想 · 수행修行 논서論書들은 출현하기가 아마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법실상諸法實相 · 제법성공諸法性空을 관조觀照하는 대승선법이 처음부터 등장한 것은 아니다. 개인과 개인의 문제를 주요하게 관찰하던 초기 · 부파불교 시기의 수행법이 불교사상의 발전에 발걸음을 맞춰 등장한 것이 대승의 선법禪法이라 할 수 있다.
민족사에서 번역 출간된 미국학자 존 매크래의 『북종과 초기 선불교의 형성』.
초기 · 부파의 불교도들은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비교적 중시했다. 그들이 선정禪定 · 선관禪觀에 들어 주로 관찰한 대상이나 관조한 교리敎理는 고 · 집 · 멸 · 도의 사제四諦와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였다. 즉 삶과 죽음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를 중점적으로 탐구했다. 한역漢譯된 경전들을 내용적으로 조망해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중국역경사의 서막을 장식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안세고다. 그가 168∼172년에 번역한 중요한 경전 가운데 하나가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이다. ‘안반安般을 통해 마음을 지키는 것’임을 제목에서 알 수 있다. 문제는 안반이다. 범어 ānāpāna를 음역한 것이 안반이다. “안安은 들이쉬는 숨, 반般은 내쉬는 숨, 숨을 생각해 끊이지 않기에 안반이라 한다. 수守의 의미는 집중[止. 삼매]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주1)라고 『안반수의경』은 설명한다. 반면 축법호가 번역한 『수행도지경修行道持經』은 “무엇이 숨을 헤아리는 것인가? 무엇이 안安인가? 무엇이 반般인가? 내쉬는 숨을 안, 들이쉬는 숨을 반이라 한다.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헤아려 다른 생각을 없도록 한다. 이것을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헤아리는 것이라 한다.”(주2)며 내쉬는 숨을 안, 들이쉬는 숨을 반이라고 다르게 설명해 놓았다. 아무튼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안반이다. 소위 소승선법小乘禪法 가운데 유명한 수식관數息觀을 통해 번뇌를 끊고 해탈 경계에 도달하는 수행법을 설명한 경전이 『안반수의경』이다.
중국학자가 펴낸 『선종북종연구禪宗北宗연구』.
축법호가 번역한 『수행도지경』도 실은 선법과 관련된 주요한 경전 가운데 한 권이다. 오음(색 · 수 · 상 · 행 · 식) · 십이인연을 관찰하는 법, 사대(지 · 수 · 화 · 풍)와 육대(지 ·수 · 화 · 풍 · 공空 · 식識)를 관상觀想하는 법, 수식관, 부정관, 사제관四諦觀, 37도품, 사선四禪, 수행 과위果位 등에 대해 소개하고 있기에 그렇다. 무상 · 고 · 무아를 인식해 ‘네 가지 전도된 집착(상 · 락 · 아 · 정)’을 끊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구마라집(344~413)이 한역한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역시 ‘오문선五門禪’을 자세하게 논술한 선경禪經이다. 탐욕과 음욕이 강한 사람이 닦으면 도움 되는 부정관不淨觀, 화 잘 내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비관慈悲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수행하면 좋은 인연관因緣觀·연기관, 잡념이 많은 이에게 필요한 수식관數息觀, ‘여러 종류의 번뇌’(주3)와 죄악에 시달리는 사람이 닦으면 효과 있는 염불관念佛觀(주4) 등 다섯 가지가 오문선이다. 『좌선삼매경』 후반부에 대승선법에 속하는 ‘제법실상을 관觀하는 법’도 소개하고 있지만, 오문선 설명에 무게가 실려 있다. 역시 구마라집이 한문으로 번역한 『선법요해경禪法要解經』 · 『선비요법경禪秘要法經』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네팔 출신의 불타발타라(359∼429)가 옮긴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도 부정관, 계분별관, 사념처四念處(주5), 사무량四無量(주6), 오음五陰을 관찰해 무상 · 고 · 무아를 체득하는 것, 사제를 관상하는 것 등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이들 경전들의 내용에 성공性空[본성상 공함]을 이야기하는 반야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총체적으로 보면 인생의 무상 · 고 · 무아를 관조해 번뇌를 끊는 것이 중심적인 가르침이다.
혜원 스님이 저서 『북종선』.
반면, 안세고와 함께 중국역경사의 초반에 큰 역할을 한 지루가참(지참)이 옮긴 『반주삼매경』과 『관무량수경』 등은 대승선법을 설명한 경전에 포함된다. 대승선법의 주요한 특색이 공성空性이나 불佛을 관觀하는 것인데, 이들 경전은 모두 붓다를 관상觀想하기 때문이다. 반주般舟는 범어 ptatyutpanna의 음역이다. ‘붓다가 서다[불립佛立]’ 혹은 ‘붓다가 바로 앞에 나타나다[불현전佛現前]’는 의미다. 만약 반주삼매에 들면 바로 눈앞에 ‘여러 붓다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래서 가르침을 받고, 신속하게 최고의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고 경전은 설명하고 있다. 특히 아미타불을 관상하는 관법觀法을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다. 『관무량수경』은 설명하지 않아도 제목에서 내용을 알 수 있다.
도서출판 씨·아이·알에서 출간된 『북종선 법문 – 돈황문헌 역주Ⅱ』.
대승선법의 특색을 무엇보다 잘 설명하고 있는 경전은 『유마경』인데, 「제자품」에 나오는 좌선을 설명하는 단락은 압권이다. “사리불이시여!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반드시 좌선을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의 작용이 삼계三界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좌선입니다. 멸진정滅盡定을 일으키지 않고도 온갖 위의威儀(행·주·좌·와)를 나타내는 것이 좌선입니다. 진리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고도 세속의 일상생활을 드러내는 것이 좌선입니다. 마음을 안으로 집중하지도 않고 밖으로 분산시키지도 않는 것이 좌선입니다.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분별하지 않고 37도 품을 수행하는 것이 좌선입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좌선입니다. 만약 이같이 앉을 수 있다면 붓다도 인정할 것입니다.”(주7)
결국 대승선법은 대승불교가 강조하는 사상 · 교의敎義 즉 제법성공諸法性空이나 제법실상諸法實相 · 중도불이中道不二를 관조하거나 혹은 선정과 좌선을 새롭게 해석해 실천하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뱀의 발’을 붙이면, 사제四諦를 중심으로 생사고해에서 벗어나 해탈을 추구하던 초기·부파불교 시기의 교의敎義는 반야계 경전의 출현과 함께 ‘우주와 존재의 본체本體 문제’로 관심의 방향이 전환된다. 제법성공 · 제법실상을 수행과 관찰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성공性空 · 중도中道 · 불이不二사상이 주된 중심어가 됐으며,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며, 보살과 불佛은 현실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해야 될 책무가 있다는 것이 보다 강조되기 시작했다.
서출판 씨·아이·알에서 출판한 『하택신회 선사 어록 – 돈황문헌 역주Ⅰ』.
반야계 경전들 보다 약간 늦게 출현한 『화엄경』 · 『대반열반경』 · 『승만경』 · 『능가경』 등은 심성心性문제를 주요하게 다루었다. 선관禪觀의 중심이 마음(불성 · 진여 · 여래장 · 아뢰야식)이 됐다. 마음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것을 통섭統攝했다. 이 점은 『능가경』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구나발타라가 한역한 4권본 『능가경』은 전 경전이 하나의 품品, 즉 ‘일체불어심품一切佛語心品’밖에 없다. 특히 『능가경』 권1에 나오는 “해탈로 인도하는 대승의 여러 가르침 가운데 여래장자성청점심如來藏自性淸淨心[본유불성本有佛性]을 깨닫게 하는 법문이 제일 중요하다[大乘諸度門, 諸佛心第一].”는 구절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건주 씨의 저서 『중국 초기 선종 능가선법 연구』.
『능가경』이 강조한 ‘이 마음’을 정신적 본체인 ‘심성心性’으로 해석하면 선종이 그렇게 강조한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어렵지 않게 ‘경전적인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마음’은 순수하게 개인적이고 내재적인 체험의 문제이지, 문자나 언어로 해석되고 전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을 본인이 직접 마셔봐야 뜨거운지 차가운지 혹은 어떤 맛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지, 물을 마셔본 다른 사람에게 물맛이 어떠한지를 물어봐야 “네가 직접 마셔보면 알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대답만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를 풍미한 『대승기신론』은 반야계 경전들이 중시한 ‘우주와 존재의 본체 문제’와 여래장계 경전들이 강조한 ‘심성 문제’를 심心에 종합 · 융합해 편찬한 책이라 할 수도 있다. ‘세간과 출세간의 본체本體’를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일심一心’에 통합해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대반열반경』 권제7 「여래성품」)는 구절의 ‘불성’을 『대승기신론』이 ‘중생심’으로 바뀌어 설명한 데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이 일심一心은 ‘이문二門’에서 고찰된다. 본체로서의 마음은 깨끗하고 움직이지 않는 심진여문心眞如門에, 오염되고 번뇌에 쌓인 마음은 심생멸문心生滅門에 각각 해당된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불일불이不一不異]’ 이 둘[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 ‘우주의 본체’가 된다. 진여는 일심의 체體가 되고, 생멸은 일심의 용用이 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불상리不相離]’ 관계다.
『대승기신론』의 이 결론에 따르면 ‘일체 중생의 마음’은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것을 가진 존재이자, 모든 것을 파생派生시킬 수 있는 존재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신’이나 ‘다른 그 무엇’에 의지하거나 그들에게서 진리를 구할 필요가 없다. ‘부처[불佛]’도 이 마음에 있고, ‘정토[淨土]’도 이 마음에 있고, ‘지혜[지智]’도 이 마음에 있고, ‘이치[리理]’도 이 마음에 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컨트롤하고 체득하는 것이 바로 ‘초범입성超凡入聖의 방법’이자 ‘해탈’이 된다. 달마 이래 중국 선학사상이 걸어온 길은 『대승기신론』이 제시한 바로 이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 “무릇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많겠지만 요약하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이치로 들어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실천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치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은 경전에 의거해 핵심을 아는 것이다. 모든 생명 즉 범부나 성인은 모두 같은 진실한 본성을 갖고 있는데 다만 밖에서 온 번뇌와 망상에 덮여 그 본질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번뇌와 망상을 떨쳐버리고 진실한 본성에 돌아가, 마음을 응집시켜 벽처럼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자기나 타인 그리고 범부나 성인이 본성적으로는 동일하며, (마음을) 굳게 평등한 상태로 유지해 움직임이 없고, 말에 의한 가르침을 절대 따라가지 않는다면 근본 이치와 완전히 계합해 차별이나 분별도 없이 고요하고 함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이를 이치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주8)(달마의『이입사행론』)
[2] “청신사 · 청신녀들이여! 일행삼매에 들고자 하는가? 마땅히 한적하고 고요한 곳을 찾아 여러 혼란스런 생각을 버리고 모양이나 모습도 취하지 말고, 마음을 한 분의 부처님께 연결해 일심으로 그 분의 명호를 외워라. 부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몸을 바르게 세우고 한 분의 부처님을 끊임없이 생각하거나 명호를 외우면 그 가운데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들을 볼 수 있다. 왜 그러한가? 한 분의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공덕은 한량이 없고, 여러 많은 부처님들의 명호를 외우는 공덕과 다르지 않아 (공덕을)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일행삼매는) 불법과 동등하고 차별이 없어 하나의 수레를 타고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고, 무량한 공덕과 말재주를 구비하게 해준다. 이처럼 일행삼매에 들면 갠지즈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님 · 법계와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릇 몸 안의 작은 마음을 알면 발을 들고 발을 내리는 것이 항상 도량 안에 있는 것이 되고, 일체의 움직임이 바로 깨달음이 된다.”(주9)(도신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
[3] “무릇 수행의 근본은 이 몸이 본래 청정하고,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고, 분별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무엇보다) 원만하고 깨끗한 마음이 자성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스승임을 알면 시방제불의 명호를 염송하는 것보다 낫다.”(주10) (홍인의 『수심요론』)
양기봉 씨가 번역하고 김영사에서 출판된 『달마어록』, 『초기 선종사Ⅱ-역대법보기』, 『초기 선종사Ⅰ-능가사자기·전법보기』(왼쪽부터). 일본학자 야나기다 세이잔의 저작들이다.
[4] “가르침과 수행의 근본을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마음을 잘 지켜라. 마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열반의 근본이며, 깨달음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며, 십이부경의 핵심이며, 삼세제불의 원조에 해당된다.”(주11)(홍인의 『수심요론』)
[5] “마음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가 마음에서 생겨난다. 마음을 제대로 알면 모든 행이 구비된다.”(주12)(『관심론』)
[6] “삼계의 업보業報는 오직 마음에서 생겨난다. 만약 마음을 제대로 알면 삼계 안에서 삼계를 벗어난다. 악업은 자기의 마음에서 생긴다. 다만 마음을 모을 수 있으면 모든 삿된 악들을 떨칠 수 있다. 삼계와 육도에서 윤회하는 괴로움도 자연스레 소멸된다.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이것을 일러 해탈이라 한다.”(주13)(『관심론』)
2015년 중국에서 번역 출판된 존 매크래의 『북종과 초기 선불교의 형성』.
아무튼, 남종선과 간화선의 시각으로만 모든 것을 보는 시각에서 탈피해 보다 폭넓게 선禪을 조망眺望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굳이 남종선과 간화선 중심에서 맴맴 돌 이유가 있을까? 다행히 근년에 초기선종사와 북종선을 연구한 책들이 다수 출판되었다. 남종선과 간화선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게 선사상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들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다.
운주사에서 출판된 책들이 두드러진다. 능가사들의 역사를 기록한 『능가사자기』(박건주 역주譯註. 2001), 우두법융의 「절관론絶觀論」 등 초기 선종 문헌들을 번역한 『선과 깨달음』(박건주 역해譯解. 2004), 초기 선종의 사상을 연구한 『중국 초기 선종 능가선법 연구』(박건주 지음. 2007), 『달마선』(박건주 지음. 2006) 등이 그 책들이다. 도서출판 씨 · 아이 · 알에서 나온 『하택신회선사 어록-돈황문헌 역주Ⅰ』(박건주 역주譯註. 2009)과 『북종선 법문-돈황문헌 역주Ⅱ』(박건주 역주. 2009) 등도 주목된다.
북종선과 관련해서는 연구서들이 다수 출판되었는데 혜원 스님의 『북종선』(운주사. 2008), 미국학자 존 매크래(1947~2011)의 책을 번역한 『북종과 초기 선불교의 형성』(김종명 옮김. 민족사. 2018)을 읽을 필요가 있다. 존 매크래의 이 책은 2015년 상해고적출판사에서 중국어로도 번역·출판됐다. 무엇보다 최근 중국에서 출간된 『선종북종연구禪宗北宗硏究』(韓傳强 지음. 北京:宗敎文化出版社. 2013)는 북종선 연구 분야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해도 좋을 듯하다.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모든 자료들을 섭렵해 북종선법의 맥락, 북종선법의 변화 · 흐름 등 여러 방면을 빠짐없이 연구해 놓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번역·출판된 지 오래된 일본학자 야나기다 세이잔의 『초기선종사Ⅰ-능가사지기·전법보기』(양기봉 옮김. 김영사. 1990) · 『초기선종사Ⅱ-역대법보기』(양기봉 옮김. 김영사. 1991)·『달마어록』(양기봉 옮김. 김영사. 1993) 등도 여전히 읽을 가치가 충분한 책들이다.
주)
(주1) “安名為入息, 般名為出息, 念息不離, 是名為安般. 守意者, 欲得止意.” T15-p165a.
(주2) “何謂數息? 何謂為安? 何謂為般? 出息為安, 入息為般, 隨息出入而無他念, 是謂數息出入.” T15-p215c/216a
(주3) 이를 한문으로 ‘다등분多等分’이라고 표현한다.
(주4) 북량의 담무참이 한역한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에는 부정관, 자비관, 연기관, 계분별관界分別觀(계차별관界差別觀), 수식관을 오문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계불변관은 지 · 수 · 화 · 풍 · 공空 · 식識의 육대를 관상觀想하는 수행법이다.
(주5)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한다. 신身은 더럽고, 수受는 고통이며, 심心은 무상하며, 법法은 무아라고 관하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주6) 사범주四梵住라고도 한다. 자비를 주는 것에 한이 없는 자무량慈無量, 중생의 고통을 없애는 데 한이 없는 비무량悲無量, 중생에게 즐거움이 있는 것을 시샘하지 않는 희무량喜無量, 차별의 상을 버리고 평등하게 이롭게 하는 것에 한이 없는 사무량捨無量 등을 말한다.
(주7) “唯, 舍利弗! 不必是坐, 為宴坐也. 夫宴坐者, 不於三界現身意, 是為宴坐; 不起滅定而現諸威儀, 是為宴坐; 不捨道法而現凡夫事, 是為宴坐; 心不住內亦不在外, 是為宴坐; 於諸見不動, 而修行三十七品, 是為宴坐; 不斷煩惱而入涅槃, 是為宴坐. 若能如是坐者, 佛所印可.”T14-p539c.
(주8) “夫入道多途, 要而言之, 不出二種: 一是理入, 二是行入. 理入者, 謂藉教悟宗, 深信含生同一真性, 俱為客塵妄想所覆, 不能顯了. 若也捨妄歸真, 凝住壁觀, 無自無他凡聖等一, 堅住不移, 更不隨於文教, 此即與理冥符, 無有分別, 寂然無為, 名之理入.”
(주9) “善男子、善女人,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諸亂意, 不取相貌, 繫心一佛, 專稱名字, 隨佛方所, 端身正向, 能於一佛念念相續, 即是念中,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何以故? 念一佛功德無量無邊, 亦與無量諸佛功德無二、不思議. 佛法等無分別, 皆乘一如成最正覺, 悉具無量功德, 無量辨才. 如是入一行三昧者, 盡知恒沙諸佛法界, 無差別相. 夫身心方寸, 舉足下足, 常在道場; 施為舉動, 皆是菩提.”
(주10) “夫修道之體, 自識當身本來淸淨, 不生不滅, 無有分別, 自性圓滿淸淨之心. 此見本師, 乃勝念十方諸佛.”
(주11) “欲知法要, 守心第一. 此守心者, 乃是涅槃之根本, 入道之要文, 十二部經之宗, 三世諸佛之祖.”
(주12)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具備.”
(주13) “三界業報, 唯心所生. 若能了心, 於三界中則出三界. 惡業由自心生, 但能攝心, 離諸邪惡, 三界六趣輪回之苦, 自然消滅. 能盡諸苦, 則名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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