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책의 향기]
삼예종론과 『수습차제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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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 2018 년 11 월 [통권 제6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99회 /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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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火中牛 | 불교학자ㆍ티벳불교
토번왕조 제38대 짼뽀(왕의 티벳식 명칭) 치송데짼(ཁྲི་སྲོང་ལྡེ་བཙན། 742~755~797) 이 통치하던 792~794년 불교사 및 사상사적으로 주목할만한 교리논쟁이 티벳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불ㆍ법ㆍ승을 완벽히 갖춘 채 건립된 사찰 삼예사(བསམ་ཡས་དགོན་པ།)에서 벌어졌다. 유명한 삼예종론宗論(돈점논쟁頓漸之諍ㆍ토번승쟁吐蕃僧諍)이 바로 이것이다. 당시 한반도는 원성왕(재위 785~798)이 다스리던 통일신라시대였고, 당나라는 덕종(742~779~805)이 통치하며 그런대로 성세盛世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토번에 온 샨타락시타(적호. 보디사따) 와 파드마삼바바(연화생) 등의 제안으로 775년부터 787년까지 12년에 걸쳐 건립된 삼예사 는 호카 지방 야루짱뽀 강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금도 진리의 등불이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 사찰에서 ‘인도불학과 연계된 파[점문파漸門派]’와 ‘중국 선종과 관련 있는 파[돈문파頓門派]’가 토번불교의 주류 자리를 놓고 불꽃 튀는 쟁론을 벌인 것이다.
도서출판 씨아아알이 번역 출간한 폴 드미에빌의 <라싸 종교회의>
불교사에서 보기 드문 논쟁이, 639년 즈음에서야 비로소 불교가 전파되고 공인된 토번에서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쟁론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다. 학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교리해석과 수행방식의 차이, 왕실과 귀족 사이의 권력투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교리논쟁으로 비춰지나 왕실과 귀족 사이의 정치투쟁적 성격도 이면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대 토번의 역사를 기록한 책 『바세དབའ་བཞེད།』에 쟁론이 발생된 배경을 알려주는 기록이 전한다. 약간 길지만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삼예사 대전 정문 오른쪽에 서 있는 <신불맹세비> 사진: 조병활 불자 제공
“①양의 해 겨울 삼예사에서 성대하게 점안법회를 한 후 …… 짼뽀가 말했다. ……대신 이하 모든 신하들은 (불교를 믿기로) 맹세하고는 맹세문을 새긴 비를 세웠다. …… 후일 예세왕뽀가 깨달음을 얻자 짼뽀 치송데짼이 말했다. ‘당신은 우리 왕과 백성들의 선지식이다. 당신의 모습을 보니 마치 붓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마침내 그를 승통僧統에 임명했다. …… (그러나 이런 저런 조치에 대해, 귀족출신인) 냥딩기진 등은 마음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예세왕뽀에 대해 온갖 나쁜 말을 다 했다. 이에 예세왕뽀는 짼뽀에게 말하고 호작 지방에 있는 조용한 수행처에 들어가 폐관수련을 시작했다. 짼뽀는 빠양을 승통에 임명했다.
티벳인 학자가 쓴 삼예종론 연구서 『삼예종론의 관점과 교의 연구』.
②그 즈음 중국의 마하야나 화상이 토번에 들어왔다. 토번의 많은 출가자들이 마하야나의 가르침을 배웠다. 견해가 다른 것이 생기자 충돌(쟁론)이 발생했다. 짼뽀는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랐다. 마하야나의 토번 출신 제자인 양하미는 자신의 살을 칼로 잘랐으며, 냑비마라와 냑린뽀체는 자신의 남성 생식기를 때리며 자살했다. 개라는 제자는 자기 머리에 불을 붙였다. 나머지 제자들은 저마다 칼을 하나씩 가지고 다니며 ‘점문파漸門派(ཙན་མན་པ། 인도불학과 연계된 파)를 모두 다 죽이겠다, 그리곤 우리도 궁전 앞에서 자살하겠다.’고 외쳐댔다. 짼뽀는 ‘여기 출가자들이 모두 견해가 달라 쟁론과 충돌이 발생하고 있어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다. 빨라 돌아오라!’는 말을 전하라고 예세왕뽀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예세왕뽀가 궁전으로 돌아오지 않자 짼뽀는 궁궐의 신하 논캄빠를 파견했다. 짼뽀가 논캄뽀에게 ‘만약 예세왕뽀를 데려오면 큰 상을 내리고, 데려오지 못하면 (논캄빠 너는)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며 엄한 명령조로 말했다. 논캄빠는 동굴에서 수행하고 있던 예세왕뽀에게 편지를 전했다.
불교시대사에서 출간된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 연구』.
③예세왕뽀가 궁궐로 돌아와 짼뽀에게 예를 올렸다. 짼뽀가 ‘출가자들이 견해가 달라 서로 충돌이 매우 심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하고 물었다. 예세왕뽀가 ‘짼뽀께서 마땅히 저를 왕궁으로 부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만약 제가 수행을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제대로 했다면 천신의 아들의 수명은 늘어났을 것이며, 저의 수명도 늘어났을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도 미륵불이 탄생할 때까지 연장됐을 것입니다.’라고 짼뽀에게 말했다. 또한 예세왕뽀는 ‘만약 토번 땅에 복덕이나 인연이 적다면 붓다의 가르침이 퍼지면 퍼질수록 외도의 변난辯難(시비)도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만약 붓다의 가르침이 말법시대까지 토번 땅에 전파된다면(그 때까지 있다면), 외도가 붓다의 가르침을 공격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불교도 사이에 견해가 서로 달라 논쟁이 생기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나의 제자 까말라씰라가 네팔에서 수행하고 있으니 그를 초청해 변론하게 하라. 그래서 서로 다투는 일을 없애도록 하라!’고 보디사따(적호)가 입적 전에 말했다고 짼뽀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짼뽀는 사람을 파견해 까말라씰라를 초청하도록 했다.
④ 까말라씰라가 토번 땅에 도착하기 전에 돈문파頓門派(ཏོན་མན་པ། 중국선종과 관련 있는 파)는 『십만송반야경(ཤེས་རབ་འབུམ།)』을 들고 선정관(삼예사 내부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 폐관한 채 2개월 동안 공부했다. 『해심밀경소(དགོངས་པ་ངེས་པར་འགྲེལ་པ།)』 을 무시하고는 묶어서 던져 버렸다.” (①~④는 번역자가 편의상 붙인 것이다.)
도서출판 운주사가 펴낸 『티베트 돈점 논쟁 연구』.
인용문 ①에서 여러 사실을 알 수 있다. 평민 출신인 예세왕뽀가 승통이 되자 귀족 출신인 냥딩기진 등이 불만을 품었다. 예세왕뽀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트리며 괴롭히자 예세왕뽀는 한적한 곳으로 수행하러 가버렸다. 짼뽀는 다시 평민 출신인 빠양을 승통으로 임명했다. 치송데짼 당시 토번의 평민과 귀족 사이에 불교적 신앙과 관직을 놓고 대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즈음 중국에서 마하야나(일명 마하연摩訶衍) 화상이 토번에 들어와 활발하게 활동했다. 토번 제자들도 생겼다. 따라서 마하야나가 토번에 들어온 시기가 삼예사 건립 이후임을 알 수 있다. 대략 791년 즈음이다.
티벳인 학자가 중국어로 쓴 『연화계 명저 《수습차제론》 연구』.
인용문 ②도 적지 않은 사실을 알려준다. 마하야나의 제자들과 기존 불자들 사이에 교리해석과 수행에 대한 차이가 점차 생겨났다. 관점의 차이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논쟁이 점점 격화되어 신체적 가해를 행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이런 사실들은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를 맹신하는 일부 몰지각한 무리들이 불상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를 했던, 근년에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상기시킨다. 관점의 차이로 같은 불교를 믿지만 서로 가해를 하는 일이 많아지자 짼뽀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예세왕뽀에게 자문을 구하러 사자를 보냈다.
김치온 씨가 역주한 『돈오대승정리결』.
인용문 ③ 역시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토번에 불교가 제대로 전파되면 외도가 불교를 공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는 적호의 예언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외도는 티벳 전통종교인 본교를 말한다. 치송데짼이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그의 아버지이자 토번 제37대 짼뽀였던 치데쭉짼(695~704~755)이 불교를 받아들여 전파하려 하자 본교를 믿는 귀족ㆍ대신들이 왕을 살해하고 말았다. 치송데짼이 뒤이어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권력은 여전히 귀족ㆍ대신들 손에 있었다. 티벳 고대 역사서 『현자들의 즐거운 잔치ཆོས་འབྱུང་མཁས་པའི་དགའ་སྟོན།』 에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왕자(치송데짼)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샹롬마샹좀마제가 말했다. ‘부왕이 일찍 돌아가신 것은 불교를 믿으려 했기에 불길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윤회)는 것은 거짓말이며, 현생의 재난을 없애기 위해 본교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면 됩니다. 불교를 믿고 행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외로이 변방에 유배될 것입니다.’”
도서출판 지영사에서 번역된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
762년 20살이 된 치송데짼이 권력을 되찾은 후에야 아버지가 소망하던 불교를 유포시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삼예사를 짓고, 토번 대신과 백성들은 반드시 불교를 믿어야 한다는 「신불맹세비」를 787년에 세웠다. 그런데 불교가 내부에서 분열됐다. 적호가 말한 ‘불교가 토번 땅에 퍼지면 외도가 붓다의 가르침을 공격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불교도 사이에 견해가 서로 달라 논쟁이 생긴다.’는 부분이 이것이다. 결국 네팔에서 수행하고 있던 적호의 제자 까말라씰라를 토번으로 초청하게 된다.
중국 학자가 펴낸 『종통과 설통宗通與說通』. 삼예종론을 다루고 있다.
인용문 ④에서 논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점문파ㆍ돈문파라는 단어가 티벳 고대 문헌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부뙨(1290~1364)은 자신의 저서 『불교사』에서 “소위 돈문頓門과 점문漸門은 중국어다. ‘갑자기 들어가는 파’와 ‘서서히 들어가는 파’라는 뜻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돈문과 점문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마하야나의 제자들이 『해심밀경소』를 공부하고 있다는 기록도 흘려버릴 수 없는 대목이다.
아무튼, 첫째 교리해석과 수행방법에서 기존의 불교도와 마하야나 제자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했다. 둘째 전통적으로 본교를 지지해 왔던 귀족ㆍ대신들과 불교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해왔던 왕실 사이에 갈등이 잠복해 있었다. 왕실이 인도불학을 정통으로 본 반면 귀족ㆍ대신들은 상대적으로 중국에서 온 마하야나를 지지하는 이가 많았다. 교리해석ㆍ수행방법의 차이 그리고 왕실과 귀족 사이의 대립이 삼예종론 발생의 주요한 원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논쟁은 어떤 내용으로 진행됐을까? 『바세』의 기록을 보자.
중국에서 번역 출판된 폴 드미에빌의 저서, 2013년 개정판 『토번승쟁기』
“①마하야나가 말했다. ‘선과 악은 마음의 분별심 때문에 생기고, 이로 인해 중생들은 삼악도(지옥ㆍ아귀ㆍ축생)와 삼선도(천ㆍ인ㆍ아수라)에 태어나는 등 윤회를 하게 된다.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도 생각하지 마라! 보시 등 열 가지 가르침을 행하라는 것은 선업을 닦지 않았고, 근기가 낮고, 총명하지 않는 범부를 위해 하는 말이다. 전생에 이미 선업을 닦았고, 근기가 높고,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는 검은 구름이나 흰 구름이 하늘의 태양을 가로막는 것처럼, 선업이든 악업이든 그것은 해탈에 장애가 된다. 무엇도 하지 말고, 무엇도 생각하지 말며, 무엇도 분별하지 않으면 십지十地에 이른 것과 같게 된다.’
②이에 대해 까말라씰라가 응대했다. ‘그렇게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으면 분별지分別智마저 버리는 것이 된다. 정확하고 올바른 지혜의 근본은 ‘분별지’다. 분별지를 버리면 근본을 자른 것과 같아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마저 없애는 결과가 된다. 분별지가 없다면 수행자(유가행자)는 무슨 방편에 의거해 ‘무분별의 경지(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나? 만약 일체 제법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마음에 그 무엇도 함이 없다면 ‘경험하는 일체 제법을 생각하지 않음’과 ‘마음에 무엇도 하지 않음’을 그대는 수행할 수 없다. 만약 ‘스스로 일체 제법을 생각하지 마라! 마음에 무엇도 하지 마라!’고 수행하면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면,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 것’이 바로 마음에 (무엇인가) 하는 것이 된다. 마음에 억념憶念과 작의作意가 없는 바로 그 때, 무엇으로 억념과 작의를 마음에서 없애 버리나? 억념과 작의는 분석을 필요로 한다. ‘없음’이 결코 없음에 도달하는 인因이 될 수 없다. 무엇에 의거해 ‘생각이 없음’과 ‘함이 없음의 상태’ 즉 ‘무분별의 경계’에 도달하나? 단지 그 정도에 의거해 무분별지에 도달한다고 한다면, ‘졸도한 것’과 ‘무분별지’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나? 졸도한 것도 해탈한 것이 된다. 정확한 분별지가 없으면 다른 그 무엇으로도 무념無念과 무작의無作意에 도달할 방법이 없다. 무념과 무작의에 도달할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 공성空性을 깨달을 수 있나? 깨달을 수 없다. 공성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해탈의 장애’를 없앨 수 있나? 공성을 깨닫지 못해도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항상 해탈한 것이 된다. 만약 수행자(유가행자)에게 억념憶念이 없이 무념과 무작의에 도달한다면 이는 혼미한 상태에 떨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수행자라 부를 수 있나! 분별지 없이 무념과 무작의를 수행하려 한다면 이는 바로 바보가 되고자 수행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이는 ‘올바른 지혜의 빛’을 저 멀리 던져버리는 것이 된다. … … 방편과 지혜로 깨달아야 세속제와 승의제를 올바르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장애를 없애는 지혜를 얻을 수 있어,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증득證得할 수 있다.’” (①ㆍ②는 번역자가 편의상 붙인 것이다.)
중국에서 번역 출판된 폴 드미에빌의 저서, 2001년 개정판 『토번승쟁기』
①과 ②의 주요한 차이는 분별지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다. 두 사람의 수행법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하지 않고,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겠다. 다만 변론이 끝난 뒤 까말라씰라로 대표되는 점문파가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세』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돈문파가 점문파를 변론으로 이기지 못해 꽃을 점문파에게 바치고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자 짼뽀 치송데짠이 말했다. ‘돈문에 의지해 수행하면 ‘열 가지 가르침을 행하는 것’에 어긋난다. 또한 돈문의 지침에 따르면 나와 남의 수행의 문이 막히게 되어 마음은 혼미해지고 법은 쇠잔해진다. 따라서 수행자는 나가르주나의 관점을 따르고, 세 가지 지혜(문혜ㆍ사혜ㆍ수혜)에 의지해 지止와 관觀을 닦으라!’”
후일 치송데짼은 까말라씰라에게 어떻게 수행하면 좋은 지에 대해 글을 써달라고 청했다. 이에 까말라쉴라는 『수습차제초편』, 『수습차제중편』, 『수습차제하편』을 각각 저술해 짼뽀에게 바쳤다. 동시에 보디사따(적호)의 사상에 대해 돈문파가 반대하고 왜곡할까 염려되어 『중관광명론』을 지어 공사상을 설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까말라씰라는 원한을 버리지 못한 외도가 보낸 자객에 살해된다. 삼예사 역경원에 있던 까말라씰라의 침실에 자객이 밤늦게 침입해 그의 신장을 눌러 암살했기 때문이다.
삼예종론에 대한 연구 업적은 이미 작은 산처럼 쌓여있다. 최근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까말라쉴라와 마하야나의 사상을 연구한 서적이 여러 권 출간됐다. 중국측 연구(특히 한족漢族학자)는 까말라쉴라의 승리를 의심스러워하는 시각이 다수를 차지한다. 근대 중국에서 마하야나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술한 최초의 사람은 태허(太虛. 1890~1947)다. 「마하연을 복권시키다[爲汉地堪布飜案]」 라는 글을 통해 그는 네 가지 측면에서 마하야나를 새롭게 조명했다. ①마하야나가 중국선종을 대표하나? ②그는 당시 논쟁에서 정말 패배했나? ③만약 지지 않았다면 그는 왜 졌다고 인정하고 돈황으로 돌아왔나? ④티벳불교가 지금(중화민국시기) 중국에 전파되고 있는데 선종은 여전히 패배자인가? 등이다. 태허는 “①마하야나는 중국 선종을 대표한다; ②마하야나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③당시 티벳의 시절인연이 마하야나와 맞지 않아 돌아왔을 뿐이다; ④앞의 세 가지 답변에서 네 번째 문제는 대답이 필요치 않음을 알 수 있다.”로 요약했다.
태허에 이어 마하야나를 조명한 학자는 홍콩의 라오종이(饒宗颐. 1917~2018)다. 돈황에서 발견된 『돈오대승정리결』 사본인 펠리오본 no.4646과 스타인본 no.2672 등을 교정ㆍ정리해 「왕석 ‘돈오대승정리결’ 서설 및 교기校記」라는 제목으로 홍콩 『숭기학보崇基學報』 제9권2기(1970)에 발표했으며, 이 글은 1986년 타이완에서 발행된 『대장경보편』제35권에 수록됐다. 장꽝따(張廣達) 역시 1981년 『학림만록學林漫錄』(北京. 中華書局) 제3집에 「당대 선종의 토번 전파와 관련된 돈황 문서唐代禪宗的傳入吐蕃及有關的敦煌文書」를 발표해 마하야나의 패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이러한 관점은 인빵즈(尹邦志)가 2014년 출간한 『宗通與說通』(北京. 社会科学文献出版社)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티벳어와 고전 중국어로 기록된 관련 문헌 전체를 충실히 독파한 뒤 펴낸 연구서적은 여전히 드물어 보인다. 그럼에도 티벳불교와 삼예종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의 책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연구서로는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 연구』(중암 지음, 불교시대사, 2006); 『돈오대승정리결』(김치온 역주, 은정불교문화진흥원, 2010); 『티베트 돈점 논쟁 연구』(박건주 지음, 운주사, 2017) 등이 주목된다. 번역서로는 『라싸 종교회의』(폴 드미에빌 지음ㆍ배재형 등 옮김, 씨아이알, 2017);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옮김, 지영사, 2018) 등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해 중국에 있는 티벳인 학자가 티벳어로 쓴 주목할만한 책이 있다. 바로 『삼예종론의 관점과 교의 연구བསམ་ཡས་ཆོས་རྩོད་ལྟ་གྲུབ་ཀྱི་དཔྱད་པ་བྱིས་པ་དགོད་པའི་རྫུན་རྐོང་།』(충축로상달ཁྱུང་ཕྲུག་བློ་བཟང་དར། 지음. 中國藏學出版社. 2015)가 그 책이다. 폴 드미에빌(1894~1979)이 1952년(1987년 개정) 펴낸 책이 1984년 『吐蕃僧諍記』(甘肅人民出版社)라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번역됐는데, 이 책의 개정판이 2001년(西藏人民出版社)ㆍ2013년(中國藏學出版社) 각각 출간됐다. 중국에 있는 티벳인 학자가 중국어로 쓴 『莲花戒名著《修习次第三篇》研究』(周拉著, 宗教文化出版社,2010)도 훌륭하다. 소개한 책들을 읽고 까말라씰라와 마하야나 가운데 누구의 관점과 교의가 훌륭하고 정확한지를 가려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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