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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책의 향기]
『중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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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  2018 년 8 월 [통권 제6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95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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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는 크게 3대 학파學派로 나눌 수 있다. 주관 · 객관의 본체本體와 본성本性 해명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 중관학파, 현상現象 분석에 보다 큰 힘을 쏟은 유식학파, 깨달음의 토대土臺 해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여래장학파가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중관학파가 가장 중요하고, 개창자 용수(대략 150∼250)가 저술한 『중론』은 중관학파가 의지하는 핵심 논서이다.

 

중관학파와 용수의 『중론』

 

초기 대승불교 교학을 집대성한 용수(대략 150∼250)는 불교사에서 붓다 이후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저서로 『대지도론』 등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으나 친작親作 여부에 이론이 없는 것은 『중론』이다. 현존하는 산스크리트 본 『중론』은 27품 449게송(귀경게 2게송 포함), 티벳어 번역본도 27품 449게송으로 각각 이뤄져 있다. 반면 구마라집이 청목靑目의 주석과 함께 409년 한역한 『중론』은 27품 446게송으로 되어 있다. 바로 이『중론』에서 용수는 명쾌한 논리와 치밀한 논증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교의敎義인 공空 · 연기緣起 · 중도中道 등의 의미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가명假名 · 열반 · 업業 등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때문에 『중론』의 기본사상을 이해하면 대승불학의 주요 기초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중론』은 호락호락한 책은 아니다. 문장은 짧고 의미는 다층적 · 다면적이다. 하나의 게송과 한 장章만 보아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전체를 보며 하나하나 짚어가야 비로소 독해가 가능하다. 그래서 해독이 어렵다고들 말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중론』의 주지主旨는 공空사상의 선양이다. 27품 전체가 공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토론과 논증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인因과 연緣의 결합으로 출현한 모든 존재에게는 상주常住 · 불변不變하는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sva는 자기, bhāva는 존재 혹은 존재물을 가리킨다. 자성이란 다른 어떤 물건에도 의존함이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말하며, 자기 안에 자기의 존립 근거를 모두 구비하고 있는 존재다. 따라서 자성은 절대성(絶對性. 상대적인 것이 아님) · 불분성(不分性. 나눌 수 없음) · 불멸성(不滅性. 변화할 수 없음)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세간의 모든 사물은 다양한 인因과 연緣의 결합에 의해 출현한 존재, 항상 변화 속에 있을 뿐 불멸하는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 존재의 본질本質을 결정하는 자기自己’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의 하나다. 자성을 부정하는 것이 공의 함의涵義이며, 공은 곧 무자성無自性을 의미한다. 『중론』이 밝히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공과 무자성의 도리道理이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공과 무자성의 의미를 밝힐 것인가? 『중론』은 귀류법歸謬法이나 부정법否定法으로 이를 증명한다. ‘어떤 명제[a]’가 참 · 진리임을 직접 증명하는 대신, ‘그 거짓 명제[~a]’가 참이라고 가정하여 그것의 불합리성을 증명함으로써 ‘원래 명제[a]’가 참 · 진리임을 보여주는 간접 증명법이 귀류법이다. 예를 들어 자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고 하자. [1]먼저 모든 사물은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2]그런데 자성이 존재한다면 모순이나 곤란에 직면하게 된다. [3]이런 모순과 곤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은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을 포기해야만 된다. [4]그 결과 모든 사물에는 자성이 없다는 즉 무자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귀류법과 부정법

 

부정법은 어떤 질문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반이란 A인가?” “아니다.” “그럼 B인가?” “그것도 아니다.” ……. 이런 식으로 계속 부정해 가거나 혹은 솎아내 버리면 남는 것이 답이 된다. 『중론』 첫 머리에 나오는 소위 팔불중도八不中道가 대표적인 예다. “연기하는 법法은 소멸하는가?” “아니다.” “생겨나는가?” “아니다.” ……. 결국 “소멸하지도 생겨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항상 있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연기법의 특징이다.

 

부정법은 다른 말로 차전법遮詮法 - 반대말이 표전법表詮法이다 - 이라고도 한다. 차전법에 대한 설명은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이 지은 『선원제전집도서』(권하지일卷下之一)에 상세한 설명이 있다. “여섯 번째 차전 · 표전이 다른 것이다. 차遮는 아님을 제거한다는 의미며 표表는 그러함(옳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차는 또한 여타의 것을 완전히 가려내는(제거하는) 것이며 표는 당체當體를 직접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경전 에서 ‘진실하고도 오묘한 이성理性은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며, 모습도 없고 만들어진 것도 없으며, 평범하지도 않고 성스럽지도 않으며, 본성도 아니며 모습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차전이다. [모든 경전과 논소에서 항상 ‘비非’자로 모든 법을 부정하는 것이 이것인데, 한번 사용했다 하면 30개나 50개의 비非자가 이어진다. ‘불不’자나 ‘무無’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 모든 비非를 끊는다고 말한다.] 만일 ‘지견의 깨달음이 비춤, 신령스런 거울의 광명, 깨끗하게 밝고도 밝음, 고요하고도 고요함 등등.’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표전이다.”(주1) 용수는 이런 방법들을 사용해 모든 연기적인 존재는 공이며 무자성임을, 즉 연기=공=중도=무자성임을 증명한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점이 있다. 중도中道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그것이다. 중도는 중용中庸과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결론적 · 대체적으로 말해 연기적인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다는 공성空性에 기반한 가르침이 중도라면, 실체적인 유有에 근거해 전개된 사상이 중용이라 할 수 있다. 토대와 출발점이 다르다. 이를 겉만 보고 같다고 하면 불교이해에 심각한 오류가 생긴다. 예를 들어 숫자 2와 8의 중용을 숫자로 표현하면 5가 된다. 2+8=10, 이 10을 2로 나누면 5이기 때문이다. 이 숫자 5는 상대적인 5일 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고 절대적인 개념이다. 다시 말해 2와 8을 초월한 절대적인 개념이다. 유有의 상대적인 개념은 무無다. 유와 무의 상대적인 영역領域을 초월한, 유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비유비무인 중도의 개념이다.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마삼근麻三斤!”이라고 응대하는 것은, 개념적 · 논리적인 언어로 말하는 순간 상대적 세계에 떨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상대적 세계의 진리 즉 세속제世俗諦도 참이기는 하나 절대적 세계의 진리 즉 승의제勝義諦는 아니다.

 

물아동근物我同根과 촉사이진觸事而眞의 진정한 의미

 

공사상을 오해한 대표적인 예가 『조론 · 부진공론不眞空論』에 나오는 ‘물아동근物我同根’과 ‘촉사이진觸事而眞’에 대한 해석이다. 구마라집이 409년 중론을 번역한 뒤인 410년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사상을 알리기 위해 승조가 쓴 글이 「부진공론」이다. 그런데 흔히들 ‘물아동근物我同根’을 ‘만물과 나는 같은 뿌리에서 생겼다’거나 ‘만물과 나는 일치한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촉사이진觸事而眞’을 ‘현실의 사물과 접촉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식의 도가적 해석은 불교와 전혀 맞지 않다. ‘물아동근物我同根’의 물은 외경外境 즉 인식대상을 말한다. 아我는 인식주체 즉 반야지혜를 가리킨다. 공사상에 의하면 만물도 공空이고 인식주체인 반야도 공空하다. 그래서 “만물[物·境]과 반야[我]의 본성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 물아동근의 진정한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성이다. 둘 다 공성적空性的 존재이기에 본성이 일치하는 것이다. ‘촉사이진觸事而眞’에서 촉觸은 ‘이해하다’ ‘깨닫다’는 의미다. ‘다가가다’는 의미가 심화된 것이다. 진眞은 비유비무의 중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사물의 본성인 공성을 정확하게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비유비무의 중도, 즉 진리에 계합하는 것이다.”가 ‘촉사이진’의 진정한 의미다. 사물과 접촉한다고 사물과 부딪힌다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그렇게 간단하게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상은 전혀 반대다. 사견邪見에 사로잡혀 진리를 오해하거나 모르고 사는 것이 중생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사진1. 불광출판사의 <중론>

 

때문에, 귀류법과 부정법을 역으로 활용하면 『중론』 읽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번역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중론』을 새롭게 우리말로 옮긴 책들이 최근 출간되어 주목받고 있다. 불광출판사(대표 지홍스님)가 일본의 가츠라 쇼류 · 고시마 기요타카 공저共著의 『중론』(사진 1)을 번역(배경아 옮김)출판했고, 도서출판b(대표 조기조)가 티벳어본을 저본으로 번역(신상환 옮김)해낸 『중론』(사진 2)이 그것이다. 특히 도서출판b는 『중론』을 포함 『회쟁론』·『세마론』·『육십송여리론』·『칠십공성론』·『보행왕정론』(이를 『중관이취육론中觀理聚六論』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용수육론龍樹六論』(주2)(사 진 3)으로 부른다)등 중관사상과 관련된 용수의 여섯 논서 모두를 우리말로 옮겨 펴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을 해냈으며, 높이 평가받아야 될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서 『중론송』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중론』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석우石隅 황산덕(黃山德. 1917∼1989) 박사다. 서문당에서 서문문고 247번으로 1976년 발행된 초판初版 『중론송』이 그 책이다. 이 책의 개정판 1쇄가 1996년, 개정판 2쇄(사진 4)가 2013년 서문당에서 각각 출간됐다. 1990년 동국대역경원이 펴낸『중론』(사진 5)이 두 번째로 번역 출간된 책이다. 동국대 김성철 교수가 옮긴 『중론』의 초판(사진 6)이 1993년 경서원에서 나왔고, 뒤이어 동국대 박인성 교수가 하와이대 칼루파하나 교수의 책 『나가르 주나의 중론』를 번역해 1994년 장경각에서 『나가르주나』(사진 7)라는 제목으로 상재上梓했다. 평양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팔만대장경 선역본』 시리즈(전17권)의 마지막 권으로 『중론』(사진 8)을 1994년 펴냈는데, 2001년 고려대장경 연구소가 이를 서울에서 영인 · 출간했다.

 


사진2. 도서출판b의 <중론>과 <중관이취육론>

 

이들 책에서 「관인연품제일」의 첫 번째 게송의 번역을 비교해 우리나라 『중론』 번역이 걸어온 변화 · 발전상相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번역의 평가는 독자들의 이해理解정도에 따라 갈리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내용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느냐가 번역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번역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 독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나 파급력이 약하다면 번역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도 사실이다. 『대자은 사삼장법사전』 권7에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화가 있다. 인도 구법求法을 마치고 귀환한 현장에게 당태종이 『금강경』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사진3. 중국 인민출판사가 2000년 펴낸 <용수육론>

 

“(당태종)다시 물었다 : ‘일체제불이 『금강경』으로 말미암아 탄생한다. 『금강경』을 듣고 비방하지 않으면 목숨을 보시하는 공덕을 넘어서고, 갠지즈 강변의 모래처럼 많은 보배를 보시하는 공덕도 이 경을 듣는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이치는 극히 깊은데 글은 간략해 가르침에 통달한 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금강경』을 즐겨 지닌다. 이전에 번역된 『금강경』은 뜻이 제대로 구비된 것인가 (번역은 잘 되었는가)?’ 현장이 대답했다. ‘이 경전의 공덕은 실로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서방 사람들은 모두 이 경전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지금 옛날에 번역된 『금강경』을 보면 약간 누락된 것이 있습니다. 범어 원본 에 따르면 「능단금강반야」인데 옛 번역에는 단지 「금강반야」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보살은 분별을 번뇌로 간주하고, 분별망집의 견고함은 마치 금강석처럼 단단합니다. 『금강경』이 설명하는 무분별의 지혜만이 능히 이 분별망집을 끊어낼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해 「능단금강반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옛 번역에는 앞의 두 글자 「능단」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주3)

 


사진4. 황산덕 박사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번역한 <중론송>

 


‘독자중심주의 번역’이냐 ‘원문중심주의 번역’이냐

 

현장이 이야기한 옛 번역은 후진後秦시대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과 북위시대 보리류지가 한역한 『금강경』을 가리킨다. 현장의 지적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여기서 하지 않겠다. 그런데 현장이 한역한 『금강경』과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 가운데 후대 사람들은 어느 것을 즐겨 읽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당나라부터 지금까지 중국인들이 가장 애독하는 『금강경』은 구마라집 역본譯本이다. 현장 번역의 학술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물론 구마라집 역본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현실의 신행 현장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구마라집 역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금강경』 사상을 학술적으로 분석을 할 경우에도 당연히 구마라집 역본을 이용해야 된다. 잘 읽지도 않는 현장 번역본을 연구 해봐야 사상의 저변화와 파급력 분석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5. 동국역경원이 펴낸 <중론>

 

구마라집과 현장이라는 대大역경가 두 분의 번역 특징에 대해 필자는 중국인들이 붙인 구역舊譯 · 신역新譯이란 명칭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구마라집의 번역을 ‘독자중심주의 번역’으로, 현장의 번역을 ‘원문중심주의 번역’으로 각각 부른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독자중심주의 번역이라고 원문을 무시한다거나, 원문중심주의 번역이라고 해서 독자를 고 하지 않는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만 번역문의 문장과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했을 때 그렇다는 의미다. 문제는 오늘날 경전이나 논서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어느 원칙을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된다는 점이다. 독자중심주의로 번역할 것인가? 원문중심주의로 옮길 것인가? 아니면 양자를 적절하게 절충할 것인가? 당연히 『중론』 번역에도 이런 고민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제1품의 첫 번째 게송의 번역을 보자.

 


사진6. 경서원에서 출간된 <중론>

 

[관인연품제일 첫 번째 게송 번역]  

①[구마라집譯]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②[티벳어譯] །བདག་ལས་མ་ཡིན་གཞན་ལས་མིན། །གཉིས་ལས་མ་ཡིན་རྒྱུ་མེད་མིན། །དངོས་པོ་གང་དག་གང་ལ་ཡང་།
③[황산덕譯] “모든 존재는 어디서나, 언제나, 결코 自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他로부터, 自他로부터, 또한 無因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주4)
④[역경원譯] “모든 법이 자체에서 나지 않고/남에게서도 나지 않으며/합한 것도 아니요 원인 없음도 아니니/그러므로 나지 않는 것임을 알라.”(주5)
⑤[김성철譯] “모든 法은 스스로 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며 그 양자에서 함께 생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원인 없이 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無生임을 알아라.”(주6)
⑥[장경각譯] “어떤 것이든, 어디에서든, 자기로부터, 타자로부터, 그 둘로부터, 또는 無原因으로부터 존재자가 발생하는 일은 없다.”(주7)
⑦[평양본譯] “모든 것은 자체에서 생겨나지 않고/다른 것에서 생겨나지 않으며/함께 생겨나지 않고 원인 없는 것도 아니니/그러므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네.(주8)
⑧[신상환譯] “(그)자신으로부터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도 아니고/둘로부터도 아니고 (원)인 없는 것(으로부터도)(생겨난 게)아니다./그 어떤 사태事態들이라도 어느 곳에든/생기는 것[發生]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주9)
⑨[불광사譯] “(1)자신으로부터, (2)타자로부터, (3)자신과 타자의 양쪽으로부터, (4)원인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어떤 것도 어디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주10) 

 


사진7. 장경각에서 출간된 <나가르주나>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이 한국어 번역들을 보면 열에 아홉은 오해할 가능성이 높다. 현실 을 보면 분명히 생겨남이 있고 태어남이 있다. 그런데 용수보살이 쓴 그 유명한 『중론』의 제1품 첫 번째 게송은 태어남이 없다고 강조한다. 무생無生이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현실적으로 나도 태어났고, 내 아내도 태어났고, 내 아들과 딸도 태어났다. 그런데 왜 태어남이 없다는 것인가? 들판에 파릇파릇한 저 많은 잡초와 산에 가득한 나무들도 태어나 살다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왜 용수보살은 생기는 것[發生]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성실하게 삶을 살아온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당연히 가질 수 있다. 번역에 문제가 있나? 아니면 용수보살이 잘못 썼나? 이런 의문을 가진 독자에게는 문제가 전혀 없다. 정상적으로 드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게송을 읽고 이런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독자가 더 문제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주11)

 

사진8. 평양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번역한 <중론>

 

 

정말 '태어남'은 없는가

 

용수보살은 글을 정확하게 썼고, 번역도 올바르며, 의문을 가진 독자도 정상이다. 용수보살이 첫 번째 게송에서 논파論破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다. 일반적인 인과관계는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생성변화 등의 상황에 적용되는 규율規律이다. 이것은 현실적 존재의 진실한 모습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는 누구도 부술 수 없 다. 용수보살도 마찬가지다. 다만, 인과율에 집착해 원인에 자성自性이 있고, 결과에도 자성自性이 있다는 즉 자성의 입장에서 인과관계를 대하면 이것은 잘못된 견해가 된다. 사견邪見이 되어 버린다. 자성을 가진 원인과 자성을 가진 결과의 관점에서 태어남을 대하면 그것은 사견이 되고, 이런 사견邪見은 당연히 논파대상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부숴야 된다.

 


사진9. 티벳어 번역본인 <중관육론>(2011. 라싸:서장인민출판사)

 

용수보살이 태어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성을 가진 원인과 자성을 가진 결과로서의 태어남, 그렇게 보는 관점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지, 일반적인 현상세계의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성의 입장에서 세간의 태어남을 보는 것, 그 관점, 바로 그 점을 비판한 것이다. 문제는 번역에 이런 맛이 들어있지 않아 독자들이 쉽게 문장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성의 입장에서 세간의 태어남을 보는 그런 관점은 잘못됐다. 그런 관점에서의 태어남은 없다.”를 마음속으로 게송 앞에 붙여 읽으면 된다. 다른 품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게송이 이해되면 나머지 게송, 다른 품의 게송들도 따라서 그 의미가 파악된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이런 식으로 해독하다보면 『중론』전체를 읽을 수 있다. 『중 론』을 독파하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꽉 막혀있던 배 속이 일시에 풀려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도 든다.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도 풀리고, 엉켰던 갈등들도 사라질 것 이다. 이것은 『중론』독해가 주는 공덕이다. 위에서 소개한 여러 책 가운데 한 권을 구입해 차분하게 『중론』 해독에 도전해 보길 권한다.

 


사진10. 용수의 논저들이 수록 된 <테벳대장경. 논소부(제57권)>. (북경: 중국장학연구중심, 2000)

 

주)

(주1) “六, 遮詮表詮異者, 遮謂遣其所非, 表謂顯其所是. 又遮者揀却諸餘, 表者直示當體. 如諸經所說眞妙理性, 每云: ‘不生不滅, 不垢不淨, 無因無果, 無相無爲, 非凡非聖, 非性非相等.’ 皆是遮詮. [諸經論中, 每以非字非却諸法, 動卽有三十五十箇非字也. 不字無字亦爾, 故云絶百非.] 若云: ‘知見覺, 照靈鑒光明, 朗朗昭昭, 惺惺寂寂等.’ 皆是表詮.” 『대정신수대장경』제48권, p.406b.
(주2) 이 책은 2000년 북경의 민족출판사民族出版社에서 출간됐다. 『중론』· 『회쟁론』·『세마론』·『육십송여리론』·『칠십공성론』·『보행왕정론』 등이 모두 중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 가운데 중국인들은 『세마론』을 『정연론精硏論』으로, 『육십송여리론』을 『육십정리론六十正理論』으로, 『보행왕정론』을 『중관보만론中觀寶鬘論』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번역했다. 나머지 책의 제목은 동일하다.
(주3) 『대정신수대장경』제50권, p.359a.
(주4) 황산덕譯解, 『중론송』, 서울:서문당, 2013(개정판 2쇄), p.29.
(주5) 역경위원회譯, 『중론』, 서울:동국역경원, 1990, p.24.
(주6) 김성철譯注, 『중론』, 서울:경서원, 1996(개정판 1쇄), p.34.
(주7) 칼루파하나著 · 박인성譯, 『나가르주나』, 서울:장경각, 1994, p.159.
(주) 평양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譯, 『중론』, 서울:고려대장경연구소, 2001, p.16.
(주9) 신상환 옮김, 『중론』, 서울:도서출판b, 2018, p.23.
(주10) 가츠라 쇼류, 고시마 기요타카共著 · 배경아 옮김, 『중론』, 서울:불광출판사, 2018, p.23.
(주11) 이와 관련해 『오가어록 · 동산록』에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동산양개스님이) 어린 나이에 스승을 따라 「반야심경」을 외우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라는 대목에서 홀연히 얼굴을 만지며 스승 에게 물었다. ‘저에게는 눈 · 귀 · 코 · 혀 등이 있는데 「반야심경」에선 무엇 때문에 없다고 했습니까?’ 스승이 깜짝 놀라 기이하게 여기며 다른 스승을 소개해 주었다.” 백련선서간행회, 『조동록曹洞錄』(선림 고경총서14), 장경각, 2005,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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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화중우火中牛 불교학자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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