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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과 도자기]
불 때기는 실패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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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  2019 년 9 월 [통권 제77호]  /     /  작성일20-06-27 17:33  /   조회7,28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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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 도예작가 

 

도자기의 작업과 수행에 대해 얘기를 풀어놓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만큼 할 말이 많은 사람이 있을까하고 덥석 대답은 했지만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이해되지 않는 도자기 작업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처음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맛볼 수는 있을는지…. 내 마음 편하자고 그럴 수도 있지만 늘 초심이 처음이자 끝이라는 생각도 한다. 늘 이어지는 불 때기의 실패. 마음이 바닥을 친 건 오래전이고 이제는 땅을 파야할 정도이다.

 

첫 회부터 도자기 장작 가마의 불 때기부터 시작을 하는 것은 하나의 그릇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 중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수화풍이 적절해야하고 가끔은 타력에 의지하고 싶을 만큼 힘든 과정이기도하다. 그래서 의례처럼 가마 불을 지피는 날은 아침 일찍 서산마애삼존불을 찾는다,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도 어찌 그리 웃어주시는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그 미소를 보면 마음은 이미 무장해제다. 운 좋으면 보원사 스님의 예불도 만날 수 있다. 전생에 이곳의 끈이 있었기에 내가 뭔가 끌리듯이 여기에 터를 잡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잠시 해 본다. 기도의 마음은 무슨 결과가 나오더라도 내가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길 바란다. 지나친 자책이나 바람이나 장작 탓이나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필요할 때만 찾아도 항상 웃어주시는 서산마애삼존불

 

하나의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두 번의 불을 때야한다. 첫 초벌은 그을림이 벗어지는 정도까지인데 그 온도가 800도 정도이다. 이는 유약을 시유하는 과정을 쉽게 하는 과정이다. 유약을 시유해서 가마 안에 차곡차곡 재임을 하고 난 뒤 나무가 들어갈 조그만 공간을 남기고 빈틈없이 막아버린다. 불을 땔 때 되도록 산소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불을 때기 전 나무는 충분히 가마 옆에 준비해 놔야한다. 봉통에 예열하는 나무는 두꺼운 나무도 상관없다. 그리고 꼭 소나무가 아니어도 된다. 그리고 우리 가마는 ‘공칸’이라는 재가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두 번째 봉통이 있다. 재나 숯이 쌓이면 열효율이 떨어진다. 이것은 가마를 지어주신 스승인 천한봉 선생님께서 만든 방식인데 여러모로 예열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식이다. 공칸은 첫 봉통보다는 가는 나무를 써야한다. 입구도 작고 온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1300도까지 올리는 칸 불을 때는 나무는 소나무를 가늘게 쪼갠 장작을 써야한다. 나무를 준비할 때 이 작업이 만만치 않다. 좋은 소나무를 가늘게 쪼개고 잘 말려야 화력이 좋아지기 때문에 이 일이 오래 걸린다. 한 사람이 전 과정을 다 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또 전체적인 과정이 하나로 연결되기 때문에 적절한 배분이 필요한 부분이다. 나는 누구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전 과정을 손수 하는데 나무를 준비하는 과정이 공부라면 공부겠지만 솔직히 누가 이 공부 가져갔으면 좋겠다.

 

나무도 준비해놓고 가마 안에 그릇도 재임을 해놓고 문도 막았으면 이제 불을 당겨야한다. 찻 사발에 차를 맑게 우려 가마 위에 올린다. 술을 안 드시는 스승님은 막걸리를 뿌리기도 하던데 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는 내가 마셔 버릴까봐 차로! 몇 번은 백팔 배를 하기도 했었는데 불 때기의 대장정에 꾀가 생겨 요즘은 삼배만 올린다.

“잘 익게 해 주십시요!”

 

불을 당기면 한 시간 정도는 가마 안에 있는 먼지 등이 타면서 연기가 많이 나온다. 이때는 나무를 자주 안 넣어도 되기 때문에 주변을 돌면서 정리도 하고 차도 마신다. 불 때기는 주로 저녁 무렵에 시작한다. 마을에 가마가 있다 보니 연기가 신경 쓰여서이다. 소나무를 때는 것이긴 한데 온도가 높아지면 내가 보기에도 민망한 시커먼 연기가 무섭게 난다. 난 밤 시간엔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한번 밤새워 불을 때고 나면 수명이 십년은 줄어든 것 같다고 농담 삼아 말한다.

 

첫 봉통은 3시간 정도를 땐다. 예열이다 보니 무겁고 긴 나무를 좌우와 가운데로 골고루 가도록 힘껏 던져 넣어야한다. 앞 머리카락이 그을리기 일쑤다. 온도는 1000도 정도 된다. 그 다음으로 예열 두 번째 칸인 공 칸으로 넘어간다.

 

이제 본격적으로 좀 센 예열을 하는 칸이다. 숯이나 재가 많으면 온도가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봉통 예열 칸을 두 공간으로 나눈 것이다. 나무를 넣는 불창인 작은 쇠문이 달아서 빨갛다 못해 녹기도 한다. 벌써 몇 번을 바꿨다.

 

불길이 붉은 강이 흐르는 것 같다. 일렁이며 맹렬하게 굴뚝 쪽으로 타고 올라간다. 뒤 칸에 불길이 올라다가 불이 사그러들면서 빠지는 것을 잘 보고 장작 넣는 것을 가늠한다.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넣은 칸인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시점을 ‘날이 났는가’로 판단한다.

 

가마불창 밖에서도 도자기가 쟁여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릇의 전부분이 광이 나면서 유약이 녹기 시작하는 것을 날이 났다고 한다. 도자기가 익었다는 것은 유약이 잘 녹는 시점을 말한다. 유리질 화되어 그릇의 옷이 입혀지는 것이다. 공칸에서의 온도는 1100도 이상이다.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날이 났으면 다음 칸으로 올라가는데 기물을 넣은 첫 번째 칸을 ‘노리칸’이라고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온도를 1300도 이상으로 높여서 도자기를 익게 해야 한다.

음악도 바꾼다. ‘세상의 모든 음악’을 여유롭게 듣다가 ‘경허스님 참선곡’이나 좀 더 힘이 필요할 때는 ‘신묘장구 대 다라니’를 듣는다. 듣는 다기 보다는 주력을 한다.

 

차 한 잔 올리고 불을 당긴다

 

이 칸에서는 온도를 1300도까지는 올려야 유약이 녹는 시점이 된다. 나무로 1300도를 올린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쇠가 녹는 온도가 1500도 정도임을 감안하면 무시무시한 열기다.

이때는 가는 소나무장작을 사용한다. 나무가 두꺼우면 산소를 너무 잡아먹기 때문에 온도가 잘 오르지 않는다. 잘 마른 소나무 장작을 가마 안의 안쪽 중간 입구 쪽에 두 개비 두 개비 세 개비를 던진다. 가마 안의 온도 편차가 크기 때문에 골고루 열이 가도록 던져야하는데, 가마 안의 온도가 너무 뜨겁다보니 장작을 골고루 던지지 못해 가운데에 쌓이는 경우가 많다. 또 급하게 던지다보니 장작이 그릇을 쳐서 그릇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지금부터는 시커먼 연기가 무섭게 타고 오른다.

 

 


 

 

두어 시간을 전투적으로 장작을 던진 후 유약이 녹았나 불보기 시편을 꺼내본다. 시편이 녹을 기미가 없으면 다리의 힘이 풀린다. 이제는 피를 말리는 불과의 싸움이다. 그리고 나와의 싸움인데 불앞에 있는 그릇이 번들거리면서 마치 유약이 잘 녹은 것 같이 보이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고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나중에 꺼내보면 앞면만 간신히 녹고 나머지는 설익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너무 힘들 때는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과 계속 싸운다. 안 녹은 줄 알면서도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 나무나 체력을 다 소모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쉽지만 포기하는 경우이다. 땀은 범벅이고 얼굴은 잘 익은 홍시 같고 눈은 계속 불길이 따라 다닌다.

 

불의 색도 달라진다. 온도가 1000도 내외일 때는 붉은색이었다가 더 높아지면 노란색으로 갔다가 그 다음엔 하얗게 되었다가 그릇이 익을 즈음은 푸른색의 서늘함이 보인다. 너무 높은 온도가 서늘한 색이라니. 밝기가 너무 밝아서 나무를 넣고 불을 바라보다보면 그 불빛이 계속 눈을 따라다진다. 내 눈 안에 가마가 들어앉은 것 같다. 

장작이 타고 남은 푸른 재가 반짝 일 때의 느낌. 뭔가 이 세상의 빛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불에 홀리는 게 이런 건가하는 생각도 든다.

 

나무를 넣고 가마 밖으로 나와 흙바닥에 잠시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초저녁에 보던 별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많이 익었다는 느낌이 든다. 달 밝은 밤은 나를 비추며 조용히 바라보는 것 같아 의지가 된다.

두 번째 칸을 지나 세 번째 마지막 칸인 ‘끌목칸’에 다다를 때 내 몸은 후들거려 제 정신이 아니지만 또 다른 담담함이 있다.

 

 


 

마침 새벽 3시 정도가 되면 개심사 위 보현선원의 불빛이 우리 집에서도 환히 보인다. 도량석 소리가 내 마음속에 들리는 것 같다. 마음이 놓인다.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불과 씨름한지 12시간 …. 해탈한 기분이 이런 걸까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스친다. 가마 안의 결과가 어떻든 그건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잘 익었으면 감사하고 아니면 또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불을 마감할 즈음 오히려 정신도 맑아지고 몸도 개운해지는 것 같다.

 

불을 때는 것은 물론 방법도 중요하고 나름 노하우도 있겠지만, ‘직감’이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단번에 깨우칠 수도 없는…. 수많은 실패와 경험이 쌓여야 그나마 조금씩 다가오는 ‘삘’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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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소천素泉 김선미

귀신사에서 찻그릇을 보고 무작정 도천陶泉 천한봉 선생에게 입문하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그릇을 만들기 위해 정진중이 다. 현재 운산요雲山窯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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