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불교]
“기쁘게도 한 움큼 증갱차를 얻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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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2020 년 8 월 [통권 제88호] / / 작성일20-08-28 12:18 / 조회7,850회 / 댓글0건본문
13세기 고려는 몽골의 난이 종식된 후 왕실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還都하면서 불교계는 변화를 겪는다. 수도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교단이 쇠퇴하였다가 왕실이 개경으로 복귀하고, 전쟁 중 훼손된 사찰들이 중창되고, 그 사찰들이 교단의 중심적인 지위를 다시금 회복했기 때문이다. 강화 천도 시기 당시 담선법회談禪法會는 몽골에 대항하는 불교 의례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런 흐름은 원의 정치적 입장이 고려 조정에 강하게 미치기 시작하면서 원元나라의 또 다른 압박의 빌미로 작용하게 된다.
원감국사 충지
원래 담선법회는 고려 초기 개경 보제사에서 선승들이 모여 선을 담론하고 수행하는 모임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무신정권기에 권세가였던 최충헌과 최이가 이 법회에 관심을 두자 법회는 더욱 활발해지는 경향을 띈다. 수선사는 최씨 정권으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으며 대몽항쟁기에 불교를 주도한 사찰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원이 가장 경계할 불교 세력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회유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까닭에 원은 1273년 삼별초군의 대몽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군량미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수선사 사유지를 몰수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감 국사 충지(園鑑國師沖止, 1226-1292, 사진 1)가 원 황제에게 「복토전표復土田表」를 올린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준 황제는 원 세조였다. 이에 대한 답례로 원감 국사는 원 황제에게 감사의 글을 올리는 한편 축성祝聖을 맹세하였다.
원감 국사가 원 황제를 만나기 위해 원을 방문한 것은 충렬왕 1년(1275)이다. 이때 원 황제는 원감국사를 극진히 대접하였고 그에게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수장삼碧繡長衫, 불자拂子 한 쌍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베풀어진 원 황제의 대접이 어떤지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들은 고려 왕실의 정치적인 의도도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시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왕정王政 복고를 이루기 위해 원과의 강화를 긴밀하게 맺고자 했던 정치적 의도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가 출중한 수행력을 갖춘 국사國師였던 점도 원 황실의 특별한 예우를 받았던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불교계는 원의 간섭기에 현실과 타협하여 불교를 안정적으로 보존하려는 입장을 가졌다.
송광사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원감국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를 대표했던 수행승으로, 송광사(사진 2) 16국사 중의 한 분이다. 생애를 살펴보면 전라도 장흥 출신으로 속성은 위魏씨이고 속명은 원개元凱다. 1242년 사원시司院試를 거쳤으며, 『고려사』에는 고종 갑진(甲辰, 1244)년 예부시禮部試에 장원급제 했다고 나온다. 영가서기永嘉書記를 시작으로 환로宦路에 올랐던 그는 1254년 원오 국사 천영(圓梧國師天英, 1215-1286)에게 나아가 출가하였는데 이 무렵 고려는 어려운 격랑을 겪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은 수행자인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그가 어려움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그의 「병중언지病中言志」에 나온다.
일실엔 일이 없어 고요하니 一室靜無事
세상의 어지러움일랑 아랑곳하지 않네. 任他世亂離.
늙어지니 다시 게으르고 산만해져, 硏衰便瀨散
오랜 병에 유희도 달갑지 않다오. 病久謝遊嬉.
진한 차는 갈증을 없애주고 釅茗聊澆渴
향기로운 나물, 족히 배고픔을 없애주네. 香蔬足療飢.
이런 가운데 깊은 맛이 있는데도 箇中深有味
이 기쁨, 아는 이가 없구려. 且喜沒人知.
윗글은 『위씨대동보』의 「지장록誌狀錄」에 수록된 시이다. 세상이 어지러워도 수행자가 머무는 곳에는 인위적으로 일을 만들지 않기에 고요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갈증을 씻어주는 차가 있음에랴! 그러므로 그도 고려 후기의 승려들처럼 차를 즐기며 수행했던 수행자임이 분명한 셈이다. 더구나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에는 차와 관련된 다시茶詩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승으로 칭송하여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그의 다시茶詩 중에는 고려 무신정권기에 권력을 장악했던 최이가 차와 향을 보냈기에 이에 감사하며 지은 시다. 「최이崔怡가 차와 향, 시를 보낸 것에 감사하며[謝崔怡送茶香韻]」이다.
여윈 학이 소나무 위에 걸린 달 곁에 잠잠히 서 있고 瘦鶴靜翹松頂月
한가한 구름, 고갯마루 바람을 가벼이 따르네. 閒雲輕逐嶺頭風.
개중에 면목은 천리 밖에서도 한 가지리니 箇中面目同千里
무엇하러 새삼스레 편지를 보내랴? 何更新飜語一通?
수행자의 담담한 경지를 나타냈는데, 그와 최이(崔怡, ?-1249)와의 관계를 알려줄 자료이기도 하다. 최이가 보낸 사자가 답신을 재촉하기에 이 시를 지어 회신을 대신한 것이니 이런 상황을 자세히 밝힌 것이 「최이가 차와 향, 시를 보낸 것에 감사하며」의 협주夾註이다. 그의 설명에 “마침 최이가 순천 지주사가 되어 편지와 함께 차와 향, 『능엄경』을 보냈다. 사자가 돌아가며 답장을 청했다. 스님은 ‘나는 이미 속세를 벗어났으니 편지는 왕복하여 무엇 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자가 하도 졸라대므로 이 시를 써 주었다[崔怡爲順天知奏事, 以書遺茶香及楞嚴經. 使還請報書, 師曰: ‘何修書往?’ 使强迫之, 且以詩贈].”고 하였다.
여읜 학은 수행하는 자신을 말하는 듯하고 천리 밖 먼 곳에 있어도 수행자의 삶은 매한가지일 터인데 구태여 회신을 보내 안부를 전할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차와 향을 보낸 최이는 최충헌을 이어 고려의 권력을 장악한 권력자로, 무신정권기에 강화 천도遷都를 결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강화 천도는 원의 정치적인 장악력을 피해 보려는 의도였지만 결국 개경 환도이후 무신정권의 조종弔鐘이 울렸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최이는 강화 천도처럼 환난 중에 있는데도 1245년에 연등회를 장황하게 열었다. 이는 『고려사』 「열전」의 기사에서 확인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4월8일 최이가 연등회燃燈會를 열어 채붕彩棚을 설치하고 기악伎樂과 각종 놀이를 벌이게 해 밤새도록 즐기니, 구경하는 강화경江華京의 남녀들이 담을 이루었다. 5월에 사공司空 이상의 종실과 재추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채붕을 산처럼 높게 설치하고, 비단 장막과 능라 휘장을 둘러친 후, 그 가운데 그네를 매달아 수놓은 비단과 화려한 조화造花로 장식하였다.”
단차 모양
무신정권 말기의 현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원나라가 침략해 강화로 천도한 상황에서도 왕실과 무신정권기 최고 실세인 최이가 베푼 연등회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백성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던들 ‘천도遷都라는 환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적인 환경과 흐름에 곤란을 겪어야 했던 민초의 슬픔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듯하다.
한편 차를 좋아했던 원감 국사가 햇차를 받은 기쁨을 노래한 시詩에 송 황실에 공납된 증항차가 불교계에 유입된 상황이 확인된다. 「금장 대선사가 보내준 차에 감사하며[謝金藏大禪惠新茶]」라는 시다. 이 시는 「원감국사가송」에 수록되어 있다.
자애로운 선물에 놀라 햇차를 다리니 慈貺初驚試焙新
자갈에서 자란 찻 싹이라 더욱 진귀하네. 芽生爛石品尤珍.
평소에는 가루차만 마셨는데 平生只見膏油面
기쁘게도 한 움큼 증갱차를 얻었네. 喜得曾坑一掬春.
원감 국사에게 차를 보낸 금장 대선사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증갱차曾坑茶를 얻을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증갱차는 어떤 차일까. 증갱은 지명이다. 송대 황실의 공납차로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던 북원北苑차 중에서도 증갱에서 생산되는 차를 최고로 쳤다. 증갱차는 정배正焙라 부른다. 그래서 원감 국사도 증갱차를 받고 “자애로운 선물에 놀라 햇차를 다린다.”고 한 것이다.
청자양각모란당초문완 내면.고려 12세기.높이6.1cm.지름15.5cm.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13세기 당시의 고려는 귀품의 단차(사진 3)를 즐겼다. “평소에는 가루차만 마셨는데[平生只見膏油面]”라는 구절은 이를 표현한 것이다. 향기롭고 단맛의 여운이 오래도록 입속에서 감돌던 증갱차이기에 원감 국사도 놀라워했음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보인다. 송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소식(蘇軾, 1036-1101)도 증갱차를 극찬했다. 그가 “한 줌의 증갱차/ 제후에게 공납되는 차이라[曾坑一掬春/ 紫饼供千家]”라고 읊은 것은 소식의 과장이 아니었다. 담백하고 무소유의 기풍을 지닌 원감 국사도 좋은 차에 대한 열망은 컸던 것 같다. 차에 매료된 이들의 언설言說에는 지나쳐 보이지만 순박한, 그러면서 향기로운 여운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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