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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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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2020 년 4 월 [통권 제84호]  /     /  작성일20-05-28 16:12  /   조회7,52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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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철학박사

 

 고려를 건국한 왕건(877~943)은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적극으로 수용했다. 이것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연등회, 팔관회, 무차회 등의 행사를 왕실에서 주관하여 불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결속시키려고 한 것이다. 태조가 942년에 지은 <훈요십조>에는 이와 같은 의도가 드러나 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이다. 연등(燃燈)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八關)은 천령(天靈) 및 명산(名山)ㆍ대천(大川)ㆍ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의 간신들이 가감(加減)할 것을 건의하여 아뢰면 금단(禁斷)하라. 나 또한 당초에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팔관과 연등회가 열리는 날에 국기를 범하지 않고 군신이 동락하여 의당 공경히 거행하라(朕所至願, 在於燃燈八關, 燃燈所以事佛, 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 後世姦臣建白加減者, 切宜禁止. 吾亦當初誓心, 會日不犯國忌, 君臣同樂, 宜當敬依行之).

 

태조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연등회와 팔관회가 간단없이 행해지기를 원했다. 고려 시대 왕실이 주관한 불교 행사에는 연등회, 팔관회뿐 아니라 공덕재, 수륙재, 무차회 등이 있었다. 민심 규합 및 사회적 통합이라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폐단이 만만치 않았다.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성종 1년(982) <시무 28조>에서 이러한 의식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최승로는 당시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이라는 관직을 맡고 있었다. 982년 6월에 성왕이 경관 5품 이상의 관직을 맡은 신하들에게 시정 득실을 논하는 봉사(封事)를 올리게 하자, 최승로는 <오조치적평(五朝治績評)> 및 <시무 28조>를 지어 올렸다. <시무 28조>의 제 2, 4, 6, 8, 10, 16, 18조 등은 왕실의 지나친 불교 비호와 불교 행사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시무 28조>는 정책 건의서로, 필요한 정치 개혁을 28개의 조목으로 나누어 기술했다. <시무 28조> 중 제2조에서 지적한 공덕재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듣건대 성상께서 공덕재를 베풀기 위해 혹은 몸소 차를 갈고 차 싹을 연마한다고 하오니 신은 성체가 피로해지실까 하여 매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이 폐단은 광종 때부터 시작된 것이니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미혹되어 죄업을 없애고자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불사를 일으킨 것이 많았습니다(竊聞聖上 爲功德齋 或親碾茶 或親磨麥 臣愚深惜聖體之勤勞也 此弊始於光宗 崇信讒邪 多殺無辜 惑於浮屠果報之說 欲除罪業 浚民膏血 多作佛事).

 

 

오백나한도. 교토 국립박물관 소장

 

공덕재를 베풀면서 왕이 몸소 차를 갈아 올리는 건 이 행사의 중요한 의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이 ‘몸소 차를 갈고 차 싹을 연마’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당시에는 단차(團茶)를 마셨다. 단차는 덩어리로 뭉쳐져 있기 때문에 차를 우리려면 먼저 단차를 분쇄하여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이때 다마(茶磨, 차 맷돌)나 다연(茶碾)을 이용하여 곱고 미세하게 가루를 만드는 과정이 중요했다. 이 과정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최승로는 왕이 직접 차를 가는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최승로는 고급품인 차를 공급하기 위해 백성에게 막중한 민폐를 끼치는 것은 성군의 태도가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당시 왕이 공덕재에서 올린 차는 맥(麥)처럼 어린 차싹으로 만든 차였다. 보리 낱알처럼 작고 여린 싹으로 만든 차였으니 이는 많은 노동력이 요구된다. 그러니 불교 행사에 올리는 차가 고급화되고 사치해지면 이에 따른 민폐도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최승로가 지적한 표면적인 이유는 차를 가는 왕의 피로를 염려한 것이지만 그의 깊은 속내는 너무 사치해진 불교 행사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고려 초기 불교 행사는 민심을 통합하려는 의지에서 거행된 것이니 본의를 어겨 민폐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윗글에서 주목할 사항은 왕실에서 주도하는 불교 행사의 폐단이 광종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지적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광종은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선종 오가(五家) 중에서 가장 늦게 성립된 법안종은 기존 선가 유풍의 유이불리(有利不利)를 가려, 선종의 바른 가풍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교전(敎典)이 중요성을 반영한 종파이다. 

 


차의 어린 싹 

 법안종의 초조 문익선사(文益禪師)는 강서 임천 승수원에서 교화를 폈는데, 오대 말(五代末) 남당(南唐, 937~976)왕 이변(李昪, 889~943)이 그를 흠모하여 정혜선사(淨慧禪師)라는 호를 내린 후, 그를 청량산으로 모심에 따라 교세가 확산하였는데, 청량산이 법안종 교화의 중심지가 된 것은 이로부터다. 그런데 10세기경 승원에서는 차를 마시는 일상이 보편화 되었다. 그러므로 문익선사의 초기 제자인 고려 출신 승려 혜거(慧炬)도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습에 익숙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로 인해 그의 귀국은 고려 왕실에 차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시키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고려에서 법안종의 번성은 혜거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정보는 <<경덕전등록>>에서 확인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고려 도봉산 법안종의 국사이다. 당말 오대 때의 승려인데, 생몰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중국에 와서 법안 문익을 따라 수행하여 득도한 후, 고려의 국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청하므로 마침내 고려로 귀국하였다. 이후 중국의 법안종은 점차 쇠락하여 미미해졌지만, 고려의 법안종은 도리어 흥성하였으니 모두 혜거의 영향 때문이다.(高麗道峰山法眼宗之国師 唐末五代时之僧 生卒年不詳 來我国跟随法眼文益修行而得悟 后高麗国主遣使來請 遂回故地 以后我国法眼宗 雖漸衰微 而高麗法眼宗却興盛一时 皆慧炬影響所致).

 


 청주 사뇌사지 맷돌. 국립 청주박물관

 

 위 문헌은 혜거선사의 귀국 연유를 상세히 밝히고 있는데, 그를 흠모하던 왕이 사신을 보내 돌아오기를 청했다는 점이다. 과연 그를 흠모했던 국왕은 누구일까. 그 국왕은 광종이라 여겨진다. 광종은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왕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므로 윗글에 “고려 국왕이 사신을 파견”했다는 국왕은 광종이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이뿐만이 아니다. 광종이 영면영수(904~975)의 <<종경록>>을 읽고 감동하여, 고려의 승려 30여 명을 파견하여 법안종을 배우게 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정보이다. 따라서 그가 선종을 정비하면서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배경은 이처럼 자명한 것이다. 

 

 한편 광종은 고려의 통치 기반을 단단히 구축한 것은 왕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는 중앙집권화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제를 시행하였고 국가 제도를 정비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 불교를 국가 운영체계에 공식적으로 포함했다. 그러므로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광종 시기에는 왕실에서 주관한 불교 행사에 차를 올리는 의례가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왕이 친히 차를 가는 행위 자체가 공덕을 상징하는 행위로 규정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법안종과 차 문화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법안종은 오월 지역을 거점으로 일어난 종파이다. 오월은 바로 파촉(巴蜀) 지역으로, 중국 차 문화의 발생지이다. 그러므로 오월을 거점으로 교화했던 법안종은 수행에 필요한 차를 수급하는데 용이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음다(飮茶)의 범용도 광범위했기 때문에 법안종을 참구(參究)했던 고려 승려들이 이곳의 발전한 음다 풍습을 자연스럽게 익혔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 구법승들이 선종 승원의 음다 풍습에 무젖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선종 승원의 제다와 탕법을 자연스럽게 습윤한 후, 귀국하여 새 흐름의 차 문화를 고려 왕실이나 귀족 사회에 전파했던 것이다. 그러니 구법승들은 고려 왕실에 차 문화를 전파한 핵심 그룹이요, 차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였다. 이런 단단한 바탕 위에 선대(先代)부터 실시했던 팔관회, 연등회는 물론 무차대회 같은 불교 행사를 적극적으로 개최했던 광종이라는 시대 환경을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왕실의 주도한 불교 행사는 풍성하고 격조 있는 차 문화의 토층을 구축하기에 족했고, 난만한 차 문화를 꽃피울 동력으로도 충분하였다. 이 밖에도 고려 시대 차 문화가 사원과 승려가 중심으로 형성된 경향을 보인 이면에는 사회, 정치, 문화, 경제 전반에 미친 승려들의 영향력과 사찰의 풍부한 경제력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실로 고려는 불교계가 차 문화를 주도했던 시대이며 불교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성을 일구어낸 시공간이었다. 

 

 그러니 신라 말, 도당구법승이 들여온 차는 미미했지만, 나말여초(羅末麗初) 구산선문의 개창이 후 차 문화가 왕실과 귀족, 그리고 관료 문인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건 차사에 밝았던 승려들의 차에 대한 안목과 선종의 영향 때문이다. 이에 따라 승원은 차 문화의 중요한 공간이 되었고, 명전(茗戰)의 아름다운 경합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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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동국대 일반대학원 선문화 전공, 철학박사. 응송 박영희 스님에게 초의선 사로부터 이어진 제다법 전승. 현 (사)동 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한국전통문 화대학교 겸임교수. 성균관대·동국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 『초의선사의 차 문화연구』 등 7권의 저술이 있다. ‘초의 선사와 경화사족들의 교유에 대한 연구’ 및 ‘한국 차 문화’ 전반을 연구하며, 순천 대광사지에서 ‘동춘차’를 만든다. 한국차 문화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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