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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2 / 붓다의 가르침이 머무는 절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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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9 월 [통권 제137호]  /     /  작성일24-09-05 09:28  /   조회66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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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는 속리산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저런 일로 지난날 나도 법주사에는 여러 차례 찾아왔다. 속리산을 보러 온 김에 절에 들르기도 했고, 절에 들르는 길에 속리산의 풍광을 즐기기도 했다. 법주사는 신라시대 창건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가람 형태가 다소 변했지만, 사찰의 운치와 격조를 잘 간직하고 있고, 불상, 전각, 불화 등으로 가득 찬 불교유산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사역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속세를 멀리 떠나 붓다의 세계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 있다. 산지 승원(Buddhist Mountain Monasteries)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이기도 하리라. 

 

흰 노새에 싣고 온 불경을 봉안한 절

 

법주사의 개산조開山祖로 알려진 신라시대 의신義信(?∼?) 화상이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러 당나라로 갔다가 다시 천축국, 즉 인도로 가서 불교를 배우고 귀국하여 553년(진흥왕 14)에 법주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당시 의신 화상이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보관하였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法]이 머무는[住] 절이라는 뜻에서 법주사法住寺로 불렸다.

 

법주사는 이후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 때 중수重修하였는데, 원통보전圓通寶殿의 기단, 능인전能仁殿의 기단, 팔상전捌相殿의 기단,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석련지石蓮池, 봉발석상奉鉢石像 등 지금 남아 있는 석조 유구遺構들과 석물石物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사진 1. 낙양 백마사 경내.

 

의신 화상의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세상에 전해오는 설화라고만 기록되어 있듯이, 이를 증명할 객관적인 자료는 찾기 어렵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낙양洛陽 백마사白馬寺의 창건 설화가 각색된 것 같은 인상도 주지만 현재의 법주사가 창건되기 전에 이미 속리산에는 불교 난야蘭若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여 이런 설화가 이 부근의 어떤 절의 창건 설화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의신 화상 설화는 그렇다고 치고 법주사가 진흥왕 시대에 창건된 것을 전제로 하고, 이 시절 상황을 잠시 본다. 제24대 진흥왕은 제23대 법흥왕法興王(재위 514∼539)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徙夫智=徙夫知)의 아들로 작은 아버지인 법흥왕을 이어 왕이 되었다. 신라에서는 법흥왕 때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502∼557) 나라에 사신을 보내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528년(법흥왕 15)에는 이차돈異次頓(506∼527)의 순교로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하였다.

 

6세기 중후기의 정세와 불교 

 

신라 최초의 왕실 사찰인 흥륜사興輪寺(고려시대 몽골군의 침략으로 소실)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다시 지어 544년(진흥왕 5)에 완공하고 사람들의 출가出家를 허락하였다. 진흥왕은 549년(진흥왕 10) 양나라에서 사신과 신라 최초의 중국 유학승인 각덕覺德(?∼?) 화상을 신라로 파견하면서 붓다의 사리를 보내왔을 때 백관들과 함께 흥륜사 앞에서 이를 맞이하기도 했다. 양나라는 남북조시대에 북쪽의 동위와 서위와 경계를 하고 현재 중국의 남쪽 반을 모두 차지한 거대 왕조였는데, 이 당시에는 무제가 불교에 너무 빠져 있어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갈족의 공격을 받아 수도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는 사로잡히고 일가친척은 갈족의 노예로 전락하는 극도의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결국 선비족 군사들에게 망해 버리고 남쪽에는 진陳나라가 들어섰다.

 

사진 2. 경주 황룡사지 9층목탑 심초석과 주춧돌.

 

나중의 일이지만 817년(헌덕왕 9)에는 흥륜사의 영수永秀 선사가 주도하여 이차돈의 제삿날에 향도香徒들이 모여 예불禮佛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이후에도 매월 5일에 이런 모임이 이어졌다. 이 당시에는 유식학을 하는 법상종 즉 유가瑜伽의 대덕들도 선사라고 불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천경림天鏡林에 흥륜사가 세워졌다고 되어 있다.

 

흥륜사 터의 비정 문제에서는 현 경주공업고등학교가 있는 자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고, 흥륜사 명문이 있는 기와도 출토되었다. 현재의 ‘흥륜사’ 이름의 절이 있는 곳은 금당 터와 당간지주, 출토된 기와의 명문으로 볼 때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대에 창건한 영묘사靈妙寺의 터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553년에 진흥왕은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곳에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이를 사찰로 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황룡사皇龍寺=黃龍寺이다. 554년에는 백제 성왕聖王(재위 523∼554)이 오늘날 충북 옥천 지역인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는데, 김무력金武力(?∼?, 김유신의 할아버지)이 한강 지역인 신주新州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삼년산군의 고간高干인 도도都刀(=苦都=谷智)가 성왕을 죽이고 백제군 29,600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564년에는 중국 선비족이 지배층을 이룬 북제北齊(559∼577)에 사신을 보냈고, 이듬해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재위 562∼565)는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持節 東夷校尉 樂浪郡公 新羅王’으로 봉하였다.

 

신라는 중국 남조의 양나라를 계승한 진陳(557∼589) 나라와도 사신과 승려를 보내고 토산물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는데, 진나라에서도 불교의 경론 1,700여 권을 보내주었다. 566년에는 기원사祇園寺, 실제사實際寺와 황룡사를 완공하였으며, 574년에는 황룡사에 금으로 도금한 장육상丈六像을 조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아쇼카왕(Ashoka, 阿輸迦, 阿育王, 金剛智, BCE 273?∼BCE 232)이 오래전에 불상을 조성할 황철과 황금을 배에 실어 세상 밖으로 띄워 보냈는데, 이것이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800년 후에 신라 땅에 도착하여 이것으로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같은 이야기다.

 

576년에 진흥왕은 화랑花郞 제도를 공인하였고, 이 해에 수隋(581∼619) 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운 안홍安弘 법사가 서역승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함께 귀국하면서 『능가경楞伽經=稜伽經』, 『승만경勝鬘經』과 붓다의 사리를 가지고 왔다. 안홍 법사가 누구인지는 문헌상 확인하기 어려운데, 그의 증손에 해당하는 사람이 단속사斷俗寺의 신행神行(704∼779) 선사라고 전한다. 신행 선사의 스승이 도당 유학승 법랑法朗(?∼?) 선사라고 하는 바에 의하면, 안홍 법사는 법랑 선사의 선배가 되는 셈이다. 아무튼 진흥왕은 불교에 독실하였고, 말년에는 승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고 하였다. 왕비도 이를 따라 비구니가 되어 법흥왕 때 지은 신라 최초의 니승 사찰인 영흥사永興寺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진 3. 경주 서악동 고분군. 사진: 경주시.

 

이런 진흥왕의 능은 어디에 있을까? 서울의 북한산 비봉碑峰과 함흥의 황초령黃草嶺에 세워진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를 찾아 이를 고증·분석한 논문을 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은 내친김에 진흥왕릉에 대해서도 짧은 논문을 썼다. 그에 의하면 경주 서악마을에 4기의 고분군이 있는데, 문헌에 나오는 서악리西岳里, 영경사永敬寺의 북쪽, 공작지孔雀趾라는 곳이 모두 서악리를 지칭하는 것이고, 이에 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眞智王(재위 576∼579), 46대 문성왕文聖王(재위 839∼857), 47대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1)의 능이 있다고 했으니, 개별적으로는 특정할 수 없으나 4기의 고분을 이들 왕의 능이라고 보았다. 문성왕과 헌안왕이 29대 태종무열왕의 후대 왕임에도 위치상 어떻게 그 위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후대의 묘를 선대의 묘보다 위에 쓰는 도장법倒葬法은 나중에 와서 금지한 것일 뿐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과 같은 산기슭이라고 하지만 4기의 고분은 방향이 무열왕릉과 우측으로 비껴 있고 또 간격도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법주사는 창건 이래 미륵 법상도량法相道場으로 그 역할을 해왔는데,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때 활동한 백제 유민인 진표眞表(717∼733) 율사에게서 그 법을 전수 받은 영심永深(?∼?) 화상이 무열왕계의 마지막 왕인 제36대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 때 진표 율사가 점지해 준 지금의 법주사 자리에 사찰을 창건하고 법상종의 도량을 열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하여 8C 후반기부터 9C 전반기에 진표계 법상종이 펼쳐진 것으로 본다.

 

진표 율사와 점찰법회

 

『삼국유사』에 의하면 완산주 만경현=벽골군 출신의 진표 율사는 12살 때 당시 당나라 선도善道=善導(613∼681) 삼장에게서 공부하고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로부터 5계戒를 받은 도당 유학승 순제順濟=崇濟(?~?) 화상이 주석하고 있던 금산수金山藪로 찾아가 배우고, 순제 화상의 가르침에 따라 전국을 다니며 수행하였다. 

 

나중에는 자신이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열며 7년간 주석하던 금강산 발연사鉢淵寺에서 나와 23세 때인 740년(효성왕 4)에 부안의 선계산仙溪山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참회를 하면서 피가 나도록 팔다리를 바위에 찧는 등 신체를 학대하는 고행苦行을 하다가 급기야 바위에서 몸을 던지는 망신참회亡身懺悔(일찍이 싯다르타는 이런 고행을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를 한 끝에 살아나 762년에 지장보살地藏菩薩로부터 계戒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처음부터 뜻을 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행으로 나아가 변산邊山의 영산사靈山寺에서 용맹정진한 끝에 미륵보살(보살인 동시에 붓다인 존재)로부터 『점찰경占察經』 2권과 길흉을 점치는 패인 189개의 간자簡子=선자銑子 가운데 8간자와 9간자를 받았는데, 이는 미륵보살의 손가락뼈로 만든 것이었다. 이를 불자간자佛子簡子라고 했다. 그 이후 진표 율사는 금산수로 돌아와 주석하면서 법을 베풀고 계를 널리 펼쳤는데, 이로써 풍속과 교화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극단적인 신체 학대를 하는 참법 수행이나 미륵보살과 문수보살의 현현, 미륵보살의 손가락뼈 등의 이야기는 기이奇異하고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기록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금산사는 766년 혜공왕 2년에 진표 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순제 화상이 머문 때에도 금산수라고 부른 난야가 있었던 것 같다. 『점찰경』은 수隋(581∼618) 나라 승려 보리등菩提燈이 번역한 것으로 추정하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말한다(점술, 참회와 같은 중국적 특징 때문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진표 율사에게는 수제자인 영심永深, 보종寶宗, 신방信芳, 체진體珍, 진해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화상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일찍이 속리산에서 융종融宗, 불타佛陀 화상 등과 함께 진표 율사를 찾아와 복숭아나무 위에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행동을 보이며 간절히 가르침을 구한 영심 화상에게 불자간자가 전해지면서 진표 율사의 법은 그에게로 이어졌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신라 말에 석충 화상은 진표 율사의 가사 한 벌과 간자 189개를 고려 태조 왕건王建(재위 918∼943)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동화사에 전해져 온 간자라고 되어 있다.

 

사진 4. 진표율사.

 

진표 율사는 금산수에서 발연사로 돌아가 그곳에서 천화遷化하였고, 그의 사리는 발연사에 안치되었다. 이곳에는 「발연사진표율사장골탑비鉢淵寺眞表律師藏骨塔碑」가 있다. 이러한 것은 일연一然(1206∼1289) 선사의 제자인 보감국사寶鑑國師 무극혼구無極混丘(1251∼1322) 화상이 『삼국유사』를 보완하면서 추가한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嶽鉢淵藪石記」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는 1199년에 발연사의 주지인 영잠瑩岑 화상이 진표 화상의 사적비 비문으로 지은 것이다. 

 

진표 율사는 법을 전한 영심 화상에게 속리산으로 가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 절을 세우라고 하였다. 이곳은 지난날 그가 절을 지을 터를 찾으려고 금산수에서 속리산에 갔을 때 보아 둔 곳이었다. 영심 화상은 바로 이곳에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고 입적할 때까지 속리산에 주석하면서 점찰법회를 이어 갔다. 그의 법은 헌덕왕憲德王(재위 809∼825)의 아들인 심지心地(?∼?) 화상에게 전해졌다. 법주사라는 이름은 그 후 창건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이 길상사가 개명된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에는 산의 이름에서 따 속리사俗離寺로 주로 불렸는데, 조선시대 말까지 이 절은 법주사와 속리사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린 것 같다. 세종 때 전국 사찰을 선교양종으로 나누어 혁파할 때 속리사는 교종 사찰로 분류되어 지원을 받았다.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와 김정호金正浩(1804?∼1866?)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에서 속리산의 서쪽에 속리사가 있고 남쪽에 법주사가 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이 당시에는 지금의 법주사와는 따로 속리사라고 불린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복천암은 그 당시에는 복천사福泉寺라고 불렸다.

 

심지 화상은 영심 화상에게서 간자를 전해 받고 이를 던져 간자를 봉안할 자리를 점을 쳐본 결과, 지금의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 심지 화상은 이곳에 동화사를 창건하였다. 이로써 진표 율사의 법맥은 영심 화상을 거쳐 심지 화상에게로 이어졌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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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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