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건축 이야기]
門樓 |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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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 2021 년 1 월 [통권 제93호] / / 작성일21-01-13 15:37 / 조회6,861회 / 댓글0건본문
사찰에서 하나의 건물이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부석사 안양루의 경우 안양문이라는 편액이 함께 걸려 있지만 이것은 하나의 건물이 문門과 루樓의 역할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기능 구분을 위한 것이지 이름은 ‘安養’으로 하나이다.(사진 1) 역시 대웅전과 대웅보전, 극락전과 극락보전은 서로 강조하는 관계이고, 명부전과 지장전 또는 시왕전은 이칭異稱의 관계이다. 이처럼 건물이 복수의 기능을 가지고 있거나, 도중에 바뀌지 않는 이상 하나의 건물이 두 개의 이름을 갖지 않는다.
사진1. 부석사 안양루
하지만 예외도 있는데 봉정사 만세루에 ‘덕휘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송광사 침계루는 ‘사자루’라는 이름도 달고 있으며, 내소사 봉래루는 과거 만세루 편액이 동시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직 사찰의 문루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경우로 서로 결이 다른 성격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금강산을 둘러싼 불佛·유儒의 경쟁
얼마 전 우연찮게 금강산이 금강산으로 불리게 된 과정을 차근차근 쫓아 정리한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흥미진진하게 읽은 글이었는데 사실 글을 받아든 순간 묘한 반가움이 생겼다. 오랫동안 찾고자 했지만 게으름 때문에 냉큼 나서지 못했던 것을 그 글을 읽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원하는 것에 가까운 내용을 찾을 수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조선의 유자儒者들이 천하명산 금강산이 불교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시샘했다는 내용을 발견한 것이다. 어디서 보았는지 전거를 밝힐 수 없을 만큼 가물거리지만 아주 오래전에 유자들이 금강산을 개골·풍악·설봉·봉래 등으로 부르는 이유가 불교에서 유래된 이름인 금강산으로 부르길 싫어해 이칭異稱을 사용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어서였다.
유자儒者들의 시각
유자들이 명산을 주유하면서 유산기遊山記를 남기는 전통은 시작이 언제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전통인데, 이러한 전통은 단순히 풍류를 즐기는 것을 넘어 자연친화적 공부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놀이와 공부를 모두 산에서 하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신유학新儒學이라는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한 유자들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불교를 무군무부無君無父와 무위도식無爲徒食의 종교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인식은 성리학이 고려에서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시기의 사회상과 연관 지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기억에 의존한 것이기는 하지만 17세기 최고의 성리학자 송시열이 봉암사에 들러 유숙할 때 가장 나이가 많은 노승(아마도 주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과의 몇 차례 응대를 통해 그를 ‘글 꽤나 글을 읽을 줄 아는 중’이라고 인상비평을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것을 보면 당시 주류 유자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알만하다.
유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은인의 나라’인 명나라 사람들조차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산이 하필 금강산이라니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유자들 중에도 불교의 심오한 학문적 깊이에 감복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 당시 유자라고 모두 금강산이라 부르는 것을 꺼렸던 것은 아니다.
이름이 주는 의미
금강산을 기록한 유산기에 보면 내금강은 표훈사, 외금강은 신계사가 유산遊山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유자들이 이곳에 와서 유흥을 즐기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이 두 사찰에서도 탐승 온 유자들이 유흥을 즐겼다는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신계사는 만세루萬歲樓라는 이름의 문루가 남아 있었고, 표훈사는 능파루凌波樓라는 이름의 문루가 전한다.(사진 23) 이 두 사찰의 문루 이름은 누가 봐도 그 의미가 서로 사뭇 다른데, 두 사찰 모두 만세루나 능파루 이외의 각각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사진 2. 표훈사 능파루(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제강점기 사진을 통해 두 사찰 문루의 건축형식을 살펴보면 표훈사 능파루는 정자에 가까운 건물이라고 할 수 있고, 만세루는 전형적인 사찰의 문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참 공교롭다. 능파란 이름에서부터 불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유자들의 풍류 아니, 오히려 유흥의 의미가 농후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름은 사찰에서 지었을까? 전국적으로 능파란 이름이 들어간 사찰 건축을 찾아보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놀랍다.
사진 3. 신계사만세루(개인).
이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이름으로 침계枕溪도 있다. 송광사와 대흥사는 사역 앞에 작은 개울이 있고, 이 개울가에 문루가 배치되어 있다.(사진 45) 즉, 건축적으로 수변水邊공간의 건축계획에 적합한 입지를 하고 있어 문루도 그렇게 짓고 이름도 ‘계류를 베고 있다.’는 의미로 침계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사찰 문루의 이름에서 비非불교적 성격의 이름이 많은 이유는 이미 짐작 했겠지만 당시 불유佛儒 간의 관계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자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자들의 입장에서 사찰은 쉬며 공부하며 소통하는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점잖은 표현도 가능하지만, 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술 마시고 노는 공간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사진4. 송광사 침계루(국립중앙박물관).
불교의 입장에서는 성리학 지상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불간의 회통에 적극적이었지만, 유자들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사찰을 두고 즐기러 오는 별장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승려들의 수행자다운 풍모에 감화 받은 유자가 불교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고 탐승에 도움을 주는 스님들의 고생을 안쓰러워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진 5. 송광사 침계루의 사자루 편액.
금강산 사찰의 처지
금강산을 벼르고 벼르다 유람한 18세기 한 관리의 기록을 보자. 장한철(1744-?)은 『금강은유록金剛恩遊錄』에 자신의 금강산 유람을 소상히 적고 있다. 당시 장한철은 양양에서 간성을 지나 고성, 통천, 흡곡을 통해 동북방으로 이르는 교통로를 관할하는 상운역祥雲驛의 찰방察訪(역참을 총괄하는 관리)이라서 그런지 금강산 지역에서는 유세 꽤나 했던 사람임이 분명하다.
유점사와 표훈사의 승려들이 가마를 메고 나타나 장한철을 태웠으며, 유점사에서 유숙할 때는 고압적인 자세로 이 절의 보물들을 보고 싶다고 하여 여러 성보들을 내오게 하는 위력을 보였다고 스스로 적고 있다.
또한 장한철의 기록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금강산의 사찰들은 술을 내놓아야 했으며, 흥이 고조되면 춤도 대신 추어야 했으며, 하물며 물놀이도 대신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흥에 취해 시라도 읊게 되면 그 시를 새겨 문루에 걸어 놓았어야 했으며, 절경의 바위에 남기고 간 그들의 이름은 물론 데리고 온 기생들의 이름까지 새겨놓아야 해서 스님 중에는 각수刻手의 기량을 갖춘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금강산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금강산이 워낙 많은 유자들이 한 번은 둘러보고 싶은 산이어서 다른 산이 비해 빈번했겠지만 전국의 모든 명산에서 아주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문루의 밖을 보는 유자, 문루의 안을 사용하는 불교
이때 술과 함께 차운次韻하는 놀이는 아주 보편적인 놀이인데, 그 흔적은 어지간한 사찰의 문루에 가면 다 남아 있었다. 지금이야 시판詩板이 많이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추울 때 불에 땔 정도였다고 하니…, 일제강점기 유리건판사진으로 전하는 해인사 구광루 내부에 걸려 있는 시판詩板을 보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사진 6)
이외에도 개인 문집들에 전하는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례도 있는데, 완주에 있는 대둔산 안심사 적설루에 올라 차운했을 것으로 보이는 오언율시가 서로 시기를 달리하며 각각의 문집에 남아 있는 인물이 이이(1536-1584), 조헌(1544-1592), 이안눌(1571-1637), 김익희(1610-1656) 등이다. 안심사 적설루는 이처럼 당대 유명한 유자들이 놀러와 앞 사람의 시에 차운하며 놀던 장소였던 것이다. 사찰에서 문루는 불교가 중생을 제도하는 의식을 춤과 음악, 그림을 총 동원한 서사가 있는 예술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는 공간이지만 놀러온 사람들에게는 놀이터에 불과했던 것이다.
불유佛儒의 회통은 불가피한 선택
유자들의 유산遊山은 특히 조선후기에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렇게 유산을 즐기던 유자들은 산이라는 공간이 불교적 지명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깨뜨리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봉화 청량산으로 주세붕이 불교적 이름으로 불리던 봉우리들을 중국의 명산에서 따온 이름으로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자들의 의지는 광범위한 현상이었지만 지금도 불교식으로 불리는 산 이름이 많은 것을 보면 노력만큼 실효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7. 해인사 구광루 시판.
그러나 조선후기가 되면서 승려들도 유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면서 그들처럼 유람하고, 생전의 글을 모아 문집을 내는 등 닮아가는 경향이 생긴다. 이러한 경향은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라는 비판에 대해 『부모은중경』을 판각하여 유포하고, 국난 앞에서는 발 벗고 나서 충신임을 자처했듯이 성리학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열린 공간 문루
사찰은 원래 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행과 교화를 모두 고려해 위치를 잡다보니 생활이 가능하면서도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되고, 점차 사찰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길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사진8. 봉정사 만세루 편액
나중에 이 길을 따라 유자들이 들어왔는데, 산과 골의 이름이 불교식인 것에도 불만을 가질 만큼 불교에 대해서는 남다른 반감이 있었다. 수행자 집단인 사찰을 존중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문루에 올라 데리고 온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며, 사찰 앞에 펼쳐지는 절경에는 마냥 즐거웠을 것이다.
스님들도 백성이라 어찌 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사찰을 없애자니 다음에 놀러 왔을 때 아쉬울 까봐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좋은 위치에 지어진 훌륭한 누樓의 이름이 거슬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사찰의 이름은 바꿀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이 훌륭한 뷰포인트의 이름만큼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대로 이름을 바꾸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9. 봉정사 덕휘루 편액
서글픈 것은, 절에 사는 사람들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떠나며 남긴 글자를 다음에 올지도 몰라 새겨 걸 수밖에 없는 참담함에 마지못해 시판 등은 건 것은 아닐까?(사진 78) 이렇게 문루의 이름이 상반되는 두 개로 불리는 연유에 대해 불가나 유가나 어디에도 설명을 해주는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아마도 한 쪽은 너무 당연해서, 다른 한 쪽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아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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