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 저편 티베트 불교]
은둔의 땅 무스탕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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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 2023 년 11 월 [통권 제127호] / / 작성일23-11-04 21:00 / 조회2,105회 / 댓글0건본문
먼저 10월 달에는 네팔의 서북쪽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Dhaulagiri 설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줄기를 따라 큰 가람이 된, 깔리간다키강 유역을 따라 인도에서 티베트 본토에 이르는 고대 교역로가 생겼다고 이야기한 바 있었다.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룬 무스탕 왕국
이번 달에는 이 척박한 땅에서 수준 높은 불교문화를 이룩했던 한 고대왕국의 이야기를 할까 한다. 이름하여 로Ro 왕국 또는 무스탕Musthang 왕국이다. 이 왕국의 기원은 14세기로 소급해 올라간다. 한때 중앙아시아의 패자였던 토번吐蕃 제국이 붕괴하면서 오랜 분열시대가 도래한 시기인 1380년 아메팔AmePal이란 왕족의 후손들이 깔리간다키 유역으로 내려와 주변을 통합해서 소왕국을 세웠다.
그리고는 티베트불교 싸캬Sakya종파의 고승 고르첸 꿍가를 초빙하여 정교일치의 왕국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점차로 강의 하류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티베트 본토와 인도 간의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네팔에 강력한 고르카 부족이 세운 샤흐Shah 왕조가 국토를 넓혀 나갈 때 로왕국도 점령되면서 네팔 권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독립적인 자치왕국의 지위는 보장받아 내려왔다. 그러다가 2008년에 이르러서는 무스탕 왕정제가 폐지되면서 네팔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어 버렸다. 그러나 왕족의 후예들은 네팔의 암묵적인 비호 아래 지금도 무스탕의 실질적인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은둔의 땅’ 또는 ‘금단의 땅’이었던 옛 왕국으로서의 지위는 유지되고 있어서 신비스럽게 보이는 무스탕을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호사가들이 많다. 그들은 여행사를 통해 허가를 받은 다음 가이드와 동행해서 입경이 가능하게 되었다.
무스탕의 젖줄 대하 깔리간다키
포카라에서 새벽에 출발하는 로컬버스를 타고 바굴룽Bagulung, 베니Beni를 지나 반나절 정도 험한 비포장도로를 지그재그로 힘들게 협곡을 지나 올라오면 갑자기 시야가 열리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드넓은 큰 강 유역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대하 깔리간다키이다. 여기서 필자가 대하大河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장대하고 스펙타클한 강이란 뜻이다. 장마철 외에는 강물은 별로 없지만, 강 유역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광활하다. 더구나 강변 오른쪽에는 닐기리, 안나푸르나 같은 거대한 설산이, 왼쪽으로는 장대한 다울라기리 설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무스탕 지역은 흔히 상·하로 나뉘는데, 이웃 지역이면서도 민족과 종교와 언어 그리고 생활관습이 완연히 다르다. 우선 우리가 그냥 무스탕으로 알고 있는 상 무스탕Upper Mustang은 티베트와의 국경지대부터 만탕과 짜랑Tsarang을 중심으로 한 윗 지방을 가리킨다. 원주민들은 티베트계 혈통의 사람들로서 스스로를 로바Lobas라고 부른다. ‘로Loh 왕국의 사람’이란 뜻이다. 원래 로는 그냥 남쪽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의역하면 그들의 조상이 북쪽 창Chang에서 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반면 하 무스탕Lower Mustang은 로왕국의 관문인 까그베니Kagbeni에서 남쪽으로 좀솜, 마르파, 툭체, 가사Ghasa까지의 깔리간다키 하류지역을 가리키는데, 원주민들은 위의 로바와 다른 네팔계의 타깔리Thakalis(주1)족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대로 옛 무역로를 무대로 활동하던 대상들이다. 하지만 교역로가 쇠퇴해지자 음식점, 숙박업, 카페 등으로 직업을 전환하거나 아예 남쪽으로 이주하여 네팔 권으로 편입하기 위해 이름도 네팔식으로 바꾸고 종교도 힌두교로 개종을 하는 과정에 있다.
로만탕
기원의 평원(Plain of Aspiration)이라는 뜻을 가진 만탕 또는 로만탕은 옛 로왕국의 수도였다. 흙벽으로 둘러싸인 요새형 성벽 안에는 왕궁을 비롯하여 4개의 사원과 민가가 좁은 골목들과 배수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이곳 성안 사람들은 스스로 로바Lobas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한다. 말하자면 촌사람과 구별되게 서울사람이란 자부심이 배어 나오는 이름이리라.
사진 6. 붉은 언덕 사이로 뻗어 있는 옛 순례길을 무심삼매에 빠져 걷고 있는 필자.
만탕의 기후 조건은 가혹하다. 겨울에는 매우 춥고 바람이 강하고 여름에도 강수량이 적어 건조하며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특징대로 일교차가 심하다. 해가 뜨면 덥고, 해가 지면 바로 추워진다. 이들은 물길을 끌어서 이용할 수 있는 강 유역에 감자, 옥수수, 보리, 메밀, 채소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여 먹거리를 해결하며 또한 야크, 죠Dyo,(주2) 물소, 염소, 닭 등을 비롯한 가축을 기르고 그들의 똥은 말려 요긴한 땔감으로 사용하여 근근히 살아간다.
무스탕의 주민들은 지금도 대략 4계급으로 분류되는 신분제를 지키며 살고 있다. 왕족들과 일부 세습 귀족들, 승려, 상인, 자영농, 임차농, 기타 잡노동자들 그리고 왕국에 소속된 관리들은 예부터 세습되어 내려온 신분에 따라 각자의 본분을 다하며 살아간다.
또한 이들 로바들은 예부터 장남상속제를 기본으로 한다. 만약 아들이 세 명이라면 장남이 집과 재산을 상속받아 노부모를 부양하는 의무를 지게 되고, 둘째(또는 자원자)는 불가에 출가하고, 셋째 이하는 집에 남아 가업을 돕는다.
여기서는 지금도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가 불문율처럼 지켜진다. 말하자면 자손을 낳을 며느리는 큰아들이 얻어서 필요에 따라 형제가 공유한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큰아들만을 아버지로 부르고 나머지는 그냥 삼촌이라 부른다.
무스탕 불교의 주류는 싸카종파
지금도 대부분의 네팔에는 힌두교가 국교였던 탓으로 힌두교가 우세하지만, 반면 무스탕은 티베트불교 일색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싸캬종파Sakya sect(주3)가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곳곳에서 이 종파의 상징물인 ‘삼색문양’을 볼 수 있다.
싸캬종파는 티베트 4대 종파 중의 하나로, 티베트 본토의 싸캬라는 지방에서 쿤씨족에 의해 창건된 씨족 종파다. 이들은 문수, 관음, 금강을 의미하는 홍, 백, 흑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상징적 문양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종파는 13세기에 몽골족이 세운 원元 나라를 등에 업고 싸캬 정권을 세워 설역 고원을 통치하였는데, 특히 고려 때의 충선왕忠宣王이 3년간 귀양살이(주4)를 했던 곳으로 알려져 흥미롭지만 본 주제 밖이어서 여기서는 건너뛰기로 한다.
참, 인적 드문 한적한 로만탕이 인파로 북적일 때가 있다. 바로 띠지축제Teeji 축제(주5)인데, 그때가 되면 초디곰바Chyodi나 왕궁 앞 광장에는 크기가 5×10m나 되는 대형 탕카Thanka(주6)를 내걸고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인 참Cham을 추는 거창하고 인상적인 축제를 벌인다.
사진 10-1. 왕국 앞 광장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기원법회’라는 주제로 대형 탕카를 걸어 놓고 띠지축제를 벌린다.
사진 10-2. 싸카파 승려들에 의한 가면춤 참 댄스.
4백년된 이 탕카는 우리처럼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천에 수繡를 놓은 타피스토리 형식으로 조성한다. 구루린뽀체를 중심으로 좌우보처보살, 각종 신장들을 수놓아서 두루마리 족자 형태로 만들어 보관한다. 필요한 때가 되면 괘불대掛佛坮에 걸어 놓고 법회를 하는데 무스탕 최대의 볼거리를 연출한다.
이외의 불교적 볼거리로는 구루린뽀체와 아티샤 존자의 체취가 남아 있다는 랑충곰바, 로게까르의 가르곰바, 남걀곰바, 루리곰바 등의 불교 유적이 산재해 있지만 교통편의 열악함으로 순례자들은 대부분 아쉬움만 남기고 발길을 돌리게 된다.
<각주>
(주1) 그들은 도시로 나가서 타깔리 음식점이나 호텔 주인으로 정착하였다.
(주2) 숫야크와 암소(물소)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가축이다. 야크 뿔이 뒤로 휘어져 있는 반면 죠의 뿔은 앞으로 휘어져 있다. 이 선량하고 착한 죠는 소량의 사료를 먹지만 털이 적어 무더위를 잘 견디고 또한 추위에도 강하고 무엇보다도 짐 운반과 농사에 요긴한 일꾼이다. 무스탕은 티베트 왕족인 아메 팔 왕이 15세기 초반 세 아들과 함께 로왕국을 건립하며 시작됐다. 아메 팔 왕이 고승 고르첸 꿍가를 티베트에서 로만탕에 초대해 불교를 정착시키며 무스탕의 불교화는 시작되었다. 불교적 가치관은 건국 이후 무스탕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다.
(주3) 싸캬종파(薩迦派, 花敎)는 1073년에 창건된 티베트불교 4대 종파의 하나로 본사인 싸캬사원 담장에 홍, 백, 흑의 색깔을 칠해 놓았기에 상징적 문양으로 쓰인다.
(주4) 얼마 전 한국에 방한한 바 있는 싸캬띠진 존자는 싸캬파의 41대 종정이며, 달라이라마 존자급으로 지위가 높은 승려로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존경받는다. 1959년 싸캬사원을 떠나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하였다.
(주5) 구루린뽀체의 기념일에 거행되는데 올해 2023년은 5월 16일이었고 내년은 5월 5일이다.
(주6) 우리의 괘불탱화의 원형에 해당되는 것으로 고려 때 원나라의 영향으로 우리 불교에 전래되어 마치 우리 것처럼 동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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