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 저편 티베트 불교]
신령함이 감도는 도출라 고개의 108개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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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10:56 / 조회2,700회 / 댓글0건본문
흔히 부탄의 랜드마크로는 호랑이 사원이란 닉네임으로 널리 알려진 탁상라캉(Thakshang Lhakhang)을 꼽는다. 하지만 나는 부탄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을 한 곳만 선택하라면 주저하지 않고 ‘108 초르뗀’을 꼽고 싶다. 그만큼 내게는 인상적인 곳이었다.
도출라 고개에 오르다
이 탑군들은 부탄식 명칭으로는 ‘둑 왕걀 초르뗀(Druk Wangyal Chortens)’ 이라 부르는데, 실은 연대가 오래된 고탑들이 아니고 현대에 기획되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인도, 티베트. 네팔, 중국)에 산재한 대부분의 스뚜빠를 섭렵한 나의 눈에도 그야말로 짱이었다. 신령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고나 할까?

이 추모탑 공원은 수도 팀푸에서 약 22km 떨어진 도출라 고개(Dochula Pass. 3,150m) 위에 있는데, 마침 해동의 나그네가 그곳으로 올라갔을 때는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어 더욱 신비스러웠다. 영어식으로 ‘메모리얼 스뚜빠(M. Stupa)’라고도 불리는 이 탑군들은 부탄의 제4대 왕인 지그메 싱 왕축(1972~2006)의 부인이자 현왕인 제5대 지그메 케샤르 남갈 왕축(2008~)(주1)의 모후母后인 아시 도르제(Ashi Dorji Wangmo Wangchuck) 여왕과 시아버지이며 부탄의 제3대 왕(Jigme Dorji, 1928~1972)을 기리는 목적으로 1974년에 만들었다.
또한 근처에 역시 선대 왕들을 기리는 사원인 둑 왕걀 라깡(Druk Wangyal Lhakhang)도 같이 세웠다. 그 사원 안 벽화에는 부탄의 역사와 역대 국왕들의 계보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일부 벽화는 다소 현대적인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노트북을 들고 있는 승려들이나 숲에서 인도 반군과 싸우는 국왕의 모습이나 현대 부탄의 항공사인 둑에어(Druk Air)가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에 시대정신을 반영하려는 부탄 예술가들의 창작열을 읽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인상적인 108개 초르뗀
고개 마루턱에 자리를 잡은 추모공원에는 중앙에 큰 스뚜빠를 중심으로 108개나 되는 작은 스뚜빠를 만달라식으로 둥굴게 배열하였는데, 전체적으로 개괄하면 탑은 모두 정방형의 형태로 벽체는 하얀색이지만 벽체 위쪽에는 갈색 띠를 두르고 그 속에 역시 하얀색으로, 점박이 둥근 점을 찍은 듯, 짝수로 그려 넣었고 또한 감실龕室을 만들어 그 속에 불상과 역사적인 인물상의 소상塑像들을 안치하였다.
지붕은 자연석 검은색 돌기와로 덮었고 그 위에는, 일반적인 탑들처럼 여러 층의 금동색金銅色의 상륜부 보륜寶輪을 올려놓아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하얀색이 주는 깔끔함에 금색과 갈색으로 대비를 이루는 미적 감각이 돋보였다. 부연하자면 부탄 특유의 전통미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대목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또한 추모공원 인근에는 부탄 최초의 왕립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특히 이곳은 고산지대 아열대 식물군의 자생지로 알려져 있다. 고산지대 특유의 긴 겨울이 지나면 천상의 화원을 붉게 물들이는 붉은 랄리구라스(Laliguras)와 천리향(Daphne)(주2) 같은 수많은 진귀한 기화요초(주3)가 피어나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안내판을 보면 좀 떨어진 곳에 동굴군이 표시되어 있다. 그곳에는 구루 린뽀체(Guru Rinpoche)를 비롯한 역대 유명한 수행자(주4)들의 수행처가 11곳이나 있다고 하나, 지는 해에 쫓기어 그들의 치열한 구도심을 맡아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고개를 넘어가면 길은 7세기에 세워진 유서 깊은 왕디 포드롱(Wangdi Phodrong) 사원을 거처 푸나카 계곡에 위치한 부탄의 옛 수도였던 푸나카종(Dzong)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티베트와 시킴 그리고 인도를 잇는 고대 순례로였다. 이를 증명하듯이 고개 주변 곳곳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가로형과 세로형의 수많은 오색의 기원의 깃발들인 다르촉 또는 룽따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고개에서 열리는 왕겔축제
이곳에서는 매년 12월 13일부터 매력적인 축제가 열린다. 바로 ‘둑 왕겔 체추(Druk Wangyel Tshechu)’로서 불교적 행사가 아니라 부탄왕국에서 직영하는 ‘체추’, 즉 축제이다. 4대 부탄왕의 전쟁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2011년 제정되었다. 주로 탈춤이 공연되는데, 부탄 히말라야 연봉을 배경으로 도출라 고개에서 벌리는 한판 축제이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관람객이 밀려들어 난장판이 벌어진다.


이 축제는 부탄의 제4대 국왕인 ‘지그메 싱계 왕축(Jigme Singye Wangchuck)’이 2003년 인도 반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역시 추모공원을 세운 아시 도르제(Ashi Dorji Wangmo Wangchuck) 여왕의 발원과 후원으로 해마다 성대하게 개최되고 있다.
아스라한 부탄 히말라야 연봉들
한눈에 108개 스뚜빠가 잘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뒷산에 오르니 그새 안개가 걷히면서 부탄 히말라야 설산들이 병풍을 두른 듯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매일 서북쪽 히말라야만 보던 나에겐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동부 히말라야의 남쪽 끝에 위치한 부탄의 산들은 흔히 부탄 히말라야 연봉(주5)이라 불리는데, 부탄에서는 국왕의 이름을 따서 지그메 상계산맥(Jigme Singye W. Range)으로 부른다. 비록 8천 미터급 고봉은 없지만, 6-7천 미터급이 19개나 솟아 있기에 장엄하다. 부탄 히말라야는 대략 5대(주6) 권역으로 분류된다. 그중 최고봉은 티베트 국경과 가까운 북중부 강카르 푸엔숨(Gangkhar Puensum, 7,570m)이지만, 오히려 제3위 봉인 초몰하리깡(Chomolhari Kang, 7,314m)의 존재감이 뚜렷하여 부탄의 랜드마크 노릇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티베트와 인도-시킴 그리고 부탄왕국 사이를 이어주었던 유서 깊은 소통로인 춤비 계곡(Chumbi Valley)의 어디에서나 올려다보이기에 예부터 ‘성스러운 여신’인 ‘쪼모(Jomo)’로 대접을 받아 왔다.
<각주>
(주1) 1980년생, 옥스퍼드 정치학 석사 출신의 훈남으로 한때 전 세계 미혼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주2) 영어명은 다프네(Daphne)로 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관목이다. 껍질 속에 흰개미가 없기 때문에 경전을 쓰는 데 사용하는 부탄의 전통 닥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주3) 향기를 뿜어내는 편백나무를 비롯하여 푸리뮬라 덴티쿨라타(Primula denticulata), 프리뮬라 브라크테오사(Primula bracteosa), 목련(Campbellii)도 자생한다.
(주4) 구루 린뽀체, 밀라레빠, 체링마, 첸라지, 쟘페양, 둑빠 쿤레이 등등.
(주5) 아홉 개의 봉우리는 높이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Gangkhar Puensum(7,570m, Gasa), 2.Kula Kangri(7,538m,Gasa), 3.Liankang Kangri(7,535m,Gasa), 4.Jomolhari(7,326m,Thimphu), 5.Tongshanjiabu (7,207m,Gasa), 6.Kangphu Kang(7,204m,Gasa), 7.Masang Kang(7,194m,Gasa), 8.Chomolhari Kang (7,046m,Gasa), 9.Jitchu Drake(6,714m,Gasa).
(주6) 그레이트 히말, 하부 히말, 블랙 히말, 동아 히말, 타왕 히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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