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및 특별기고]
간화의 관문과 몰입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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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2023 년 11 월 [통권 제127호] / / 작성일23-11-04 21:47 / 조회2,693회 / 댓글0건본문
특집 | 성철대종사 열반 30주기 추모 학술대회 : 축사
김성철•전 한국불교학회장
근·현대의 우리나라 스님들 가운데 성철스님처럼 그 언행이 오랜 동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분은 드물 겁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 장좌불와의 수행, 3천 배 이후에 허락되는 친견…. 불자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기억하는 에피소드들입니다.

저는 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현대 한국사회와 퇴옹 성철의 위상과 역할」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스님에 대해 ‘역설逆說(Paradox)의 화신化身’이라고 평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은둔하여 수행하셨는데, 그 당시 여론 조사에서 역설적으로 해방 후 우리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으로 선발되셨고, ‘거짓말쟁이 역설(Liar paradox)과 논리 구조가 같은 인지認知의 역설[生平欺狂男女群]’과 ‘가장 낮추는데 가장 숭고해지는 감성적 참회의 역설[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을 결합한 열반게涅槃偈를 남기셨을 뿐만 아니라, “책을 보지 말라.”거나 “내 말 믿지 말라.”는 등의 평소 언행에서 보듯이 스님의 삶과 말씀이 모두 역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설은 흑백논리의 양변兩邊에서 벗어나기에 중도中道이고, 중도는 불성佛性입니다. 스님께서 중도불성의 자리에서 평생 추구하신 간화看話의 방식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역설의 딜레마’와 그 논리 구조가 다르지 않기에, 급기야 스님의 모든 언행에서 역설을 시현示顯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간화의 깊이를 가늠하는 잣대로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夢中일여, 숙면熟眠일여의 세 가지 관문을 제시하셨습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중에 항상 화두가 성성해야 하고(동정일여),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 수 있어야 하며(몽중일여), 꿈도 없는 깊은 잠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게 들려야 합니다(숙면일여). 자신이 들고 있는 화두에 얼마나 ‘몰입’했는지에 따라서 정진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성철스님께서 ‘간화 몰입’의 기준으로 제시하신 이런 세 가지 관문은 원래 전문 수행자의 정진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세속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무언가를 크게 성취하고자 할 때 우리가 자연스럽게 취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몰입’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대 재료공학과 황농문黃農文(1958~) 교수의 저술과 강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인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상한 허준이許埈珥(1983~) 박사의 경우도, ‘몰입’이라는 점에서 그 외삼촌 할아버지인 한국 최고의 조각가 권진규權鎭圭(1922~1973)를 닮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을 모두 가까이에서 지켜본 허 박사의 아버지 허명회許明會(1955~) 교수의 통찰입니다.

티벳불교의 대 학장學匠 쫑카빠(Tsongkhapa, 1357~1419) 스님은 『보리도차제론』에서 정진精進 바라밀다에 대해 설명하면서 “세간과 출세간의 성취는 모두 정진에서 이루어진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독일의 화학자 케쿨레(Kekulé, 1829~1896)에게서 정진을 통한 세간적 성취의 한 예를 봅니다. 벤젠(Benzene)이라는 탄소 화합물이 있습니다. 향기를 내뿜는다는 의미의 방향족芳香族 소속의 분자입니다. 1825년 페러데이(Faraday, 1791~1867)에 의해 분자식이 C6H6인 벤젠이 발견되었지만, 그 기하학적 구조는 미궁 속에 있었습니다. 케쿨레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고민하던 중에 난로 옆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자기 꼬리를 문 뱀의 모습을 보았고, 이에 착안하여 여섯 개의 탄소가 육각형의 고리 모양으로 맞물려 있는 벤젠의 기하학적 구조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벤젠의 분자식 발견 후 40년이 지난 1865년의 일이었습니다. 간화선 수행자가 화두를 소재로 삼아 동정일여를 거쳐서 몽중일여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케쿨레는 벤젠의 기하학적 구조의 문제에 몰입하여 밤낮으로 추구하다가 그야말로 몽중일여의 상태가 되어 과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성철스님 열반 30주기를 맞이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의 관문을 일관하는 ‘몰입’의 정신을 들고자 합니다. 불교 수행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문화와 학문과 경제와 정치 등 여러 영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의 창의적 해결을 위해 깊이 ‘몰입’하는 개개인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가 질적으로도 더욱 성숙해져서 세계 문명을 선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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