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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가야산 사자후]
“이것이 무엇인고?”- 1983년 부처님 오신 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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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1997 년 3 월 [통권 제5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9,66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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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오늘은 천하가 다 봉축하는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가? 보통은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반대로 본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실 중생을 제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 제도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고생으로 꽉 차 있는 이 사바세계의 중생을 제도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오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요새 말로 하면, 현실이 즉 절대라는 것입니다. 현실세계는 상대적 세계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현실세계를 잘못 본 것이고 현실 이대로가 절대세계이니만큼 절대세계를 다른 곳에서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철 대선사의 친필 일원

 

 

그러면 우리는 어째서 절대세계를 상대세계로 보고, 극락세계를 사바세계로 보고, 부처를 중생으로 거꾸로 보는가? 비유를 하나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큰 보물산에 살고 있습니다. 이리 가도 보물이고 저리 가도 보물이고 앉아도 보물이고 서도 보물입니다. 전체가 다 보물인 그런 큰 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보물을 보는 눈이 없어요. 눈이 없어서 보물을 모두 석돌이나 자갈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보물을 보물로 모른다 말입니다. 몰라서 발에 채이는 것도 귀찮고 보이는 것도 귀찮아서 이리도 내버리고 저리도 내버리고 캐버리고 던져버리기도 하며 막 천대를 합니다. 마침 보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지나다 보니, 큰 산 전체가 다 보물로 천상천하에 없는 보물이 하나도 없는데 사는 사람이 모르고서 천대하며 막 짓밟아버리고 있다 말입니다. 하도 안타까워서 당신은 이것을 석돌 취급을 하지만 실제는 보물이라고 가르쳐 주어도 거기에 사는 사람은 눈이 어둡기 때문에 곧이 듣지를 않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이 보물을 바로 보고, 이 보물을 바로 쓸 수 있겠습니까?

 

이 보물을 보려면 어떤 눈으로 봐야 하느냐 하면, ‘마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우리의 눈, 육안(肉眼)에는 한계가 있어서 아주 미세한 것도 못 보고 저 먼데 있는 것도 못 봅니다. 미세한 것을 보려면 어떻게 하는가? 현미경을 들이대고 봅니다. 그러면 상상도 못할 만큼 미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망원경을 가지고 보면 저 무한히 먼 천체의 세계도 볼 수 있습니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이용하여 보지 않으면 그것들이 있다고 해도 말짱 거짓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 미세한 세계, 저 무한한 천체가 있다고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와 꼭 같습니다. 이 육안은 시력의 한계가 있어서 미세한 것도 못 보고 저 먼 데 것도 못 보는데, 하물며 참으로 깊은 진리, “중생이 부처다”,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이다” 하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현미경도 소용없고, 망원경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마음, 마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탁 뜨고 보면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여기에도 부처님, 저기에도 부처님, 극락세계를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고 부처님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습니다. 세균세계를 보려면 현미경이 필요하고, 저 먼 천체를 보려면 망원경이 필요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 현실이 극락, 현실 이대로가 절대세계라는 것을 바로 보려면 마음의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라니! 그렇다면 마음이란 본래 어떻게 생긴 것이며, 마음의 눈은 어떻게 뜰 수 있는가?
우리 마음은 거울과 같습니다. 깨끗한 거울, 명경(明鏡)과 같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앉으면 아무 것도 비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본디 저 거울보다 깨끗하고 저 허공보다 깨끗하지만 중간에 잘못하여 번뇌망상, 잡념이 마음속에 자꾸 일어난다 말입니다. 번뇌망상, 잡념이란 거울을 덮은 먼지와 같습니다. 잡념이 자꾸 일어나서 본 마음을 가려버리면 먼지가 거울을 가려버리듯이 그만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모든 사물을 바로 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럼, 본래 마음을 되찾고 마음의 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울과 꼭 같습니다. 거울을 따로 구할 것이 없고 새로 만들 것이 없습니다. 거울 위에 끼인 먼지, 그것만 싹 닦아버리면 온 천지만물이 환하게 거울 위에 다 비칩니다. 우리 본마음을 덮고 있는 잡념, 번뇌망상 그것만 탁 털어버리면 본마음이 환히 드러나게 됩니다. 거울이 환히 드러나듯이 마음의 눈을 뜨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늘 눈을 뜨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잡념이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 다시 뜨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본래의 눈을 회복할 뿐입니다. ‘본마음의 눈을 뜬다’고 억지로 그렇게 표현할 뿐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체가 보물이고 전체가 절대이고 전체가 극락세계이고 전체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곤란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해가 공중에 환하게 떠서 온 천하를 다 드러내고 있어도 눈 감은 사람은 캄캄합니다. 이리 가도 어둡고 저리 가도 어둡고 빛은 하나도 못 봅니다. 빛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이 온 천하를 빙 둘러싸고 있어도 눈 감은 사람은 캄캄할 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뜨고서 광명을 달리 구하고 해를 달리 구할 것이 없습니다. 눈만 뜨고 보면 전체가 다 광명입니다. 그러나 눈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암흑입니다. 이렇듯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광명이고 전체가 극락세계이고,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암흑이고 동시에 사바세계이고 중생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을 뜨느냐 못 뜨느냐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나,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명경 위의 먼지를 닦아버리면 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듯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잡념을 털어버리면 본마음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명경 위의 먼지는 손으로 닦든지 걸레로 닦으면 아주 쉬운데, 마음속의 잡념, 이것은 어떻게 털어버릴 수 있는가. 참 어렵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잘해 봅시다.

 

내가 지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야기하고 있는 ‘이것’ 속에 알맹이가 있다 말입니다.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이것’을 알면 됩니다. 밥 먹고 옷 입고 가고 오고 듣고 보고 하는 ‘이것’, 작용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근원을!

 

보통 피상적으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고 하는 그 작용하는 뿌리, 근원을 알아라 이것입니다. 그 뿌리를 알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가? 가나  오나 늘 밥 먹을 때도 “밥 먹는 이것이 무엇인고”, 옷 입을 때도 “옷 입는 이것이 무엇인고”,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무엇인고” 생각할 뿐, 딴 것이 없습니다. 그 작용하는 원 뿌리, 그것을 캐보라는 말입니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돈을 달라고 합니까, 삯을 달라고 합니까.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이것이 무엇인고”를 자꾸 합니다. 그 뿌리를 캐나가면 자연히 마음속에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잡념이 떨어지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하는 것만이 근본이 되어서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에 몰입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낮에 생활하고 활동할 때만 되는 것이 아니라 꿈에도 됩니다. 일반적으로 꿈은 생시하고는 영 틀려서 그 세계가 다르지만 “이것이 무엇인고”를 자꾸 찾을 것 같으면 나중에는 꿈에도 “이것이 무엇인고”를 하게 됩니다. 더욱 열심히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이것이 무엇인고”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더욱 열심히 하면 참으로 모든 망상의 뿌리가 다 빠져버리는 동시에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그것을 바로 볼 수 있게 되고 마음의 눈이 확철히 열리게 됩니다. 그때에는 자기가 어디로 가든 암흑이 없습니다. 눈감은 사람에게 암흑이 있지 눈 뜬 사람에게 어떻게 암흑이 있겠습니까. 눈 감은 사람이나 대낮에 어둡다 어둡다고 하지 눈 뜬 사람이 누가 환한 대낮에 어둡다고 하겠습니까 정신병자 아닌 이상에 말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눈을 확철히 뜨고 보면 “아하 여태까지 내가 여기를 사바세계인 줄 알았더니 여기가 참으로 극락세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중생이 아니고 부처님인 것을 두 눈으로 역력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부지런히 하여 그 뿌리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 근원을 바로 보면, 모든 잡념이 다 떨어지는 동시에 우주의 근본원리를 알 수 있고, 모든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지(一切智)라고 합니다. 일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말입니다.

 

이제야 우리는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부처이고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인고”를 하는 데는 무슨 종교를 믿든지 무슨 직업을 갖든지 관계가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이것’은 다 있으니까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하고 의심하면 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법당에서 목탁을 치면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는데 “나무아미타불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의심하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교회에서 “하느님 아버지시여, 하느님 아버지시여” 하는데 “하느님 아버시여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의심하고, 나뭇꾼은 “나무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춤추는 사람은 “춤추는 이것이 무엇인고?”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하면 됩니다. 사람이란 각각이 천차만별이고 직업도 천차만별 아닙니까? 직업을 내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직업 가지고 있는 그 뿌리를 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술장사도 상관없고 떡장사도 상관없습니다. 밥 이야기를 천번만번 해봤자 배가 부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고”를 늘 마음속으로 의심하기를 계속해 나아가면 결국 마음의 눈을 뜨게 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는 열반회상에서 일입니다. 백정 한 사람이 칼로 고기를 베다가 “이것이 무엇인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마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날마다 소나 돼지를 잡으니 남의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천대를 합니다. 자기도 으레 천한 사람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고”를 알고 보니 자기가 백정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본시 부처란 말입니다. 고기 베던 칼자루를 탁 놓고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본시 부처다.”
좀 오래 전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스님, 저는 바둑이 취미입니다. 바둑 잘 두는 비결이 있으면 가르쳐 주십시오.”
“비결? 있고말고. 그런데 공짜는 안 돼. 절 3천배를 해야지.”
벼락같이 3천배를 하고 와서는 바둑 잘 두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고?를 열심히 하면 돼.”
이 여학생이 돌아가서는 죽자하고 “이것이 무엇인고”를 해서 고등학교 학생으로 일본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바둑대회에서 두 번이나 승리를 했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가 타고난 어느 한계가 있어서 그 한계에 딱 부딪히면 더 이상 못 나가고 맙니다. 이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하면 됩니다. 그러면 시 쓰는 사람은 시를 더 잘 쓰게 되고,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더 잘 그리게 되고, 글씨 쓰는 사람은 글씨를 더 잘 쓰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인고”를 자꾸 하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아 잡념이 적어지고 마음이 맑아지니 저절로 마음이 밝아져서 무엇을 하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확실히 능률이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캄캄하여 탁한 정신하고 마음이 맑아 밝은 정신하고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그래서 마음이 맑아져 정신이 밝아지면 무슨 직업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지 능률이 오를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는 콩나물 장사, 떡장사 하는데 “이것이 무엇인고”가 무슨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거기에도 머리 쓰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장사하는 수법이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마음속으로 “이것이 무엇인고?”를 자꾸 하면 마음이 맑아져서 콩나물 장사 떡 장사 하는 수단이 더 생긴단 말입니다. 그러면 장사에 능률이 오를 것 아닙니까.

 

무슨 직업을 갖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것이 무엇인고?”를 하여 ‘이것’을 바로 보면 우주의 근본진리를 바로 보게 되어 있는데, 혹자는 실제 생활에는 필요 없는 것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고”를 자꾸 의심하다 보면 그 전에라도 자기의 생활이나  직업에 따라서 각자의 정신활동에 큰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큰 혁명이 옵니다. 혁명이! “이것이 무엇인고”를 끝까지 해가면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 전에도 조금씩 조금씩 자기 행동에 실제 이익을 본다 그 말입니다. 생일날에 잘 먹을려고 이레를 굶다가 그만 굶어죽을 죽어서야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인고”를 하면 보통 생활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고 결국에 가서는 마음의 눈을 떠서 우주의 근본인 본래 부처를 완전히 알게 됩니다. 근본적인 인생문제를 해결하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법문의 골짜는 나의 뿌리인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하고 의심하는 거기에 있다 말입니다. 자 모두 일어서서 따라하십시오.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
억!

 

1983년 부처님 오신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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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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