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面石]
법전스님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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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1996 년 9 월 [통권 제3호] / / 작성일20-07-03 14:36 / 조회61,716회 / 댓글0건본문
대담 : 원택스님
어느 새 처서(處暑)를 지났던가. 이삼일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흩뿌린 산사에는 한낮에도 완연한 가을바람이 풍경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아직은 푸른 기가 더한 나뭇잎 사이로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을 피하며 해인사 부방장으로 계시는 법전스님을 뵈러 가는 길은, 이렇듯 계절이 서로의 자리를 바꾸는 어느 초가을 날이었습니다. 하나둘 바랑을 짊어지고 선방을 나서는 젊은 수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경내로 들어서니, 한여름의 폭염만큼이나 치열했던 구도의 열기가 아직도 한가득 남아 있어 마음이 조심스러워집니다. 성철 큰스님의 열반 3주기를 맞이하여 현재 해인사 부방장으로 계신 법전스님을 찾아뵙고, 큰스님의 법제자로서 느끼시는 감회와 여러 인연 이야기 등을 들었습니다. 한 시간 여 넘게 이어진 대담을 마치고 삼배를 올리고 보니, 마치 생전의 큰스님이 앉아계신 듯하였습니다.
◉ 스님, 어느덧 큰스님께서 열반하신 지도 3주기가 가까워옵니다.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를수록 큰스님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더 깊어져 가고, 그 크신 가르침을 스스로 체득하기 위해 백련암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큰스님께서는 진정 우리 시대에 어떤 분이셨는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스님께서는 언제 어디서 처음 큰스님을 만나 인연을 맺으셨습니까? 그때의 이야기부터 들려주시지요.
스님께서 문경 봉암사에 계실 때니까,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네 살이던 가을이었습니다. 백양사에서 그 해 여름살림 해제를 하고 가야총림(해인총림을 말함)을 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도반스님들과 함께 법주사 복천암에 들러 하루 쉬고 다음날 봉암사에 들렀습니다. 거기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니 그때까지는 전혀 보지 못한 특이한 방식으로 살고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장삼도 옛날에는 두루마기에다 뭘 달아 가지고 비단가사를 입었는데, 거기 스님들은 모두 보조장삼을 입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가사 장삼이 바로 봉암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청담스님, 향곡스님, 종수스님 등 좋은 스님이 많이 계셨고, 마침 성수스님이 직역을 보고 계셨습니다. 생활하는 모습이 어찌나 바르던지 같이 간 도반스님에게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규칙이 까다로워서 못 살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해인사에 갈 생각이 없고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말하고 그 도반을 돌려보내고, 성수스님에게 가서 여기서 살겠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큰스님은 지금 주지실 옆에 있는 자그마한 방에 계셨는데 오라고 한다기에 가니까, 여기는 일도 많고 규칙도 까다롭고 장삼도 밤에 잘 때나 대소변 볼 때, 지게지고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입고 지내야 하는데 그래도 살겠느냐고 물으시더군요. 나는 어쩌든지 대중이 하는대로 지내고 싶다고 했지요. 그래서 있게 되었습니다.
◉ 당시 큰스님께서는 부처님법대로 살자고 하시며 모든 것을 울력으로 자급자족하고, 공양도 탁발해서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우리 큰스님하고 자운스님, 스님께서 탁발을 제일 많이 다니셨다고 들었는데, 그 인연얘기를 해주시지요.
음력 시월 보름에 결제를 하고 나면 두 사람씩 갈라서 너는 어디로 가고 너는 어디로 가고 하며 동냥을 갔습니다. 그렇게 한 번 나가면 2주일 있다 오는 분도 있고, 20여 일 지나서 오는 분도 있었지요. 나하고 자운스님은 주로 수안보를 거쳐 괴산 방면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 당시 봉암사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았나 보지요.
식량사정이 좀 어려웠지요. 산중에 농사짓는 것이 있기는 했으나 주로 화전이었지요. 쌀이 조금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 잡곡이었고, 동냥도 하고 군에다 얘기해서 배급 쌀을 타다 먹었지요. 배급 쌀이 나오면 가은면까지 대중이 전부 지게지고 걸어 내려가서 져 올렸습니다.
◉ 봉암사 결사 당시 대중은 몇 명이나 있었으며, 그 중 법명이 생각나시는 분은 어떤 분이신지요.
대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한 30명 정도 있었는데, 청담, 향곡, 자운, 종수, 응산, 만성스님, 보경스님, 지금 감로사에 계신 보안스님, 나이가 제일 많았던 청안스님 등 지금 우리나라에 중요하다고 하는 스님네는 거기 다 모여 계셨었지요. 그런데 중간에 이리저리 가시고, 내가 갔을 때는 우봉, 월산스님 등은 나가시고,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 봉암사 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며, 현재 조계종 승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당시 내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지만 절에 간지가 꽤 오래되었고 했는데, 봉암사의 생활은 그 전에는 전혀 해보지 않은 판이하게 다른 생활이었어요. 그런 생활은 처음이었어요. 그것은 우리 선종사(禪宗史)에만 있는 일로서, 보통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이 들 것입니다. 그때 노장님께서 공부하는 제자들 다루는 것도 앉아서 존다든가 방일하는 태도가 보이면 지나가다가도 소리를 지르고 그렇지 않으면 몽둥이로 내리치셨지요. 그러고 일은 일대로 해야 하니까 도저히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주위환경이 화두일념 안하면 베길 수가 없었지요. 그런 환경을 배겨내지 못하는 다 가버렸어요. 밭 메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동냥하고, 공부하고….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았어요.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 살 사람이 있었는데, 요새 그리 한다면 아무도 살 사람이 없을 겁니다.
또 큰스님께서는 부처님 율장에는 목바루를 못 쓰게 돼있다고 하시며 쓰고 있던 목바루를 다 망치로 때려서 불사르고, 내 가사에도 은고리 장식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도 떼어서 두들겨 없애고, 노장님도 담요를 하나 가지고 다니셨는데 그것도 불살라버렸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입고 있던 붉은 색의 가사 장삼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지금 입고 있는 이 오조 괴색가사를 착복하게 되었지요. 한마디로 불교계에 일대 혁신을 주도한 것이지요. 그것이 근간이 되어 지금 대중화가 되었다고 봐야 해요.
◉ 자운스님께서 보살계를 처음 설하실 때도 계셨습니까?
있었지요. 자운스님도 큰스님께 많이 배우셨습니다. 두 분 사이가 참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봉암사에서 처음으로 보살계를 설하시고 그 후에 바깥으로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 큰스님께서는 생전에 순오스님(청담스님의 옛 법명) 얘기를 많이 하시면서 수행를 참 열심히 했는데, 정화 이후 나하고는 다른 길로 가버렸다고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봉암사 시절에 얽힌 일화가 있으시면 들려주시지요.
청담스님하고 노장님은 참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봉암사에 가면 개울이 있지요?. 노장님께서는 청담스님이 공부 안한다고 하시며 멱살을 잡고는 개울로 끌고 가려는데 힘이 부쳐 안 댕겨 오니까 나보고 뒤에서 밀라고 하셨지요. 그렇게 해서는 개울에 처박아버리고 하셨어요. 노장님은 앞에서 잡고 내가 뒤에서 밀고 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런 일이 청담스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한테도 종종 일어났지요. 그런 일만 있으면 노장님은 나를 부르셨어요. 청담스님은 그래도 화 한 번 내지 않으셨어요. 보통 점잖은 분이 아니십니다. 용맹정진하라고 하는 일이라면서, 절대 말을 안 하셨지요.
◉ 그럼 스님은 봉암사에 어느 정도 계시다 나오셨습니까. 거기서 6.25를 맞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때는 주위에 공비들이 출몰하여 물건을 탈취하러 절에 나타나기도 하고 주위가 삼엄할 때였습니다. 한 번은 공비들이 들이닥쳐 우리들 모두 감금하고 곳집을 털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가서 한 1년 지나서 가을에 노장님이 월례 관음사로 옮기시고, 그 뒤 청담스님하고 같이 있다가 나도 나왔습니다. 6.25는 고성 문수암에서 청담스님, 노장님 모시고 있을 때, 일어났습니다.
◉ 큰스님께서 그때 얘기를 하시면서 법전스님이 혼자 갔다고 하시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군요. 봉암사에 계실 때, 김병용 거사에게서 받은 책을 모셔놨다고 하시던데.
봉암사 극락전에 책을 보관해 두고, 그 옆에 노장님이 계신 아주 작고 나즈막한 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항상 책을 보셨지요.
◉ 그 후에 월례 관음사로 책을 옮기셨다고 하는데, 그때 동행을 하셨습니까.
월례 관음사로 책을 옮길 때는 동행을 안 하고, 월례 관음사에서 통영 안정사로 옮겼고, 통영 안정사에서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길 때는 내가 동행을 했어요.
◉ 저희들도 큰스님께서 보시던 책을 정리해 봐서 압니다만, 당시 그 책 보따리를 옮기자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어요. 성전암은 차가 못 올라가니까 파계사에서부터 사람이 모두 져 올렸지요.
◉ 봉암사에서 나오셔서 관음사에 계시다 문수암으로 옮기시고 거기서 6.25를 맞고 통영 안정사로 옮기셨군요.
그렇습니다. 문수암에 같이 있다가 6.25 때 잠깐 떠나 있었어요. 젊은 사람들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나와 있다가 노장님이 안정사에 계시다고 해서 그리로 가서 도우스님하고 둘이서 안정사 토굴에서 스님을 모셨습니다.
◉ 안정사 토굴은 누가 지어드렸습니까?
신도가 돈을 내고 문일조 스님이라는 분이 인부들을 데리고 집을 지었어요. 그리고 일조스님, 지호스님, 법웅스님, 나하고 살다가 다른 분들은 오래 있지 않고 갔지요.
◉ 지금 안정사에 가보니 집터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물을 파시다가 혼이 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평소에 노장님이 물을 많이 선택하셨지요. 개울물이 있었는데도 뒤에다 우물을 파려고 했는데, 내가 다칠 뻔 하기도 하고 해서 파다가 그만두었어요. 그러고는 은봉암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을 홈통을 대어 먹었지요.
◉ 큰스님께서는 저희가 약 시봉을 할 때마다 스님께서 그때 약 시봉하던 얘기를 하루에 한 번씩은 하셨는데, 그 얘기를 들려주시지요.
법웅스님도 있다가 가버리고 결국 나 혼자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 일과가 새벽에 일어나 예불 모시고, 공양해 올리고, 약 다려 드리고, 과일즙 내 드리고, 산에 가 나무하고, 밭 메고 , 어디 심부름 갔다 오고, 노장님 빨래도 해 드리고…. 빨래는 신도들이 오면 더러 거드는 때도 있었지만 전체를 다 나 혼자 했지요. 요새 젊은 스님 다섯이 해도 나 하나 역할 못할 거예요. 약을 달일 때는 저울을 만들어서 약탕관에다 달고 숯불을 화로에 담아 재로 잘 덮고 불이 너무 싸지 않게 조화롭게 하면 약이 잘 다려지거든. 저울을 달아 놓고 하니까 저울 눈금이 어느 정도 가면 약이 잘 다려졌구나 하는 것을 알았지요..
◉ 안정사 시절이 짧긴 했지만 혜춘스님도 그 시절에 와서 스님 법문 듣고 출가하셨다고 하는데, 그때 다녀가신 스님 중에 기억나시는 분이 계십니까?
청담스님이 가끔 오시고 자운스님도 오셨습니다. 운허스님은 청담스님하고 같이 오셨는데 아마 도 운허스님은 안정에서 처음으로 노장님을 뵈었을 겁니다. 그리고 서옹스님, 향곡스님 등이 다녀가셨습니다. 서옹스님은 오셔서 법문 듣고, 남해 망월이라는 토굴에서 공부하면서 왔다 갔다 하셨지요. 한 번은 내가 어디 볼일 보러 간 사이에 오셨다가 시자가 없고 두 분이 밥을 해 드셨다고 하더군요.
◉ 안정에서 성전으로 옮기실 때는 스님께서 새로 집을 다 보수하셨다고 들었는데, 당시엔 집도 절도 없었습니까?
성전으로 옮길 때는 내가 다 했지요. 집이 있기는 있었는데, 터에 비해서 큰데다 다 헐어서 썩고 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이사해 놓고 가을에 은적사로 가서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와서 집을 고치려고 노장님을 딴 데로 모시고 내가 다 중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다 지은 후에 들어오셨지요.
◉ 그동안 성전은 별 변화가 없었던 걸로 아는데 지금 모습은 스님께서 중수하신 그때의 모양 그대로이겠군요. 그렇게 중수해 놓은 성전에 큰스님께서 얼마나 계셨습니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상당히 오래 계셨죠. 한 10년 계신 것 같습니다. 집을 다 지어 놓고 나는 들락날락하면서 스님을 모셨는데, 봉암사에 가서 노장님이 거처하시던 방에서도 살았고, 그 위에 백운암이라는 곳에 토굴을 하나 지어서 살다가, 사불산 큰절에도 있다가, 윤필암에도 혼자 있다가, 묘적암, 갑장사, 김용사 금선대에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문경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다가 가끔 들르곤 했지요.
◉ 성전에서의 큰스님 하루 일과는 어떠하셨는지요?
성전에서의 생활은 대중 여럿을 상대하지 않으시려고 하던 때여서, 그저 시자 몇 데리고 당신 정진하시고, 책을 주로 보시고 지내셨습니다.
◉ 저희들이 조사한 바로는, 봉암사에 계실 때는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실천적인 면이 강했다면 6.25 나고 안정에 계시다가 성전에 들어오셔서는 참선도 물론 하셨지만 경전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책을 참 많이 보셨지요. 경전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책도 많이 보신 것 같습니다.
◉ 성전에 계실 때, 석남사 비구니 스님들께서 더러 왔다 갔다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안정사나 성전에 계실 때, 처음에는 비구니 스님들이 더러 왔다 갔다 했지만 나중에는 일절 비구니 스님들은 재워주지를 않았어요.
◉ 성전에 계실 때는 스님을 만나러 오면 못 들어오게 기왓장이든 돌멩이든 되는 대로 집어 던지시고 아주 엄하게 하셨다는데, 왜 그리 엄하게 하셨을까요?
공부라는 것이 그저 가르침을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철저히 정진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얼마 전에 입적하신 송광사 일각스님께 여쭈니까 당시 파계사에도 금당이라는 선원이 있었는데, 보성, 도승 등 너 댓 분이 계시면서 오후에 성전으로 올라가면 한두 시간씩 법문을 해주시곤 하셨다고 하던데요?
산에 등산 다니실 때 만나면 더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시곤 하셨지요.
◉ 저희들이 큰스님 서고의 책을 조사해 보니 출가하시기 전에 읽었던 책의 도서목록이 나왔습니다. 그걸 보면 유학이다 도학이다 장자다 서구의 사상도 많이 공부하셨는데, 성전에 계시면서 그런 학식 자랑하는 것은 보지 못하셨습니까?
사회인들하고 대화를 나눌 때나 서양철학을 인용해서 얘기를 하셨을까 그 외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일상 샐활에서 주로 참선으로 일과를 하시고, 우리는 식별도 못할 책을 참 많이 보셨습니다.
◉ 스님께서는 그동안 여러 큰스님들도 많이 보시고 또 이미 우리 곁을 떠난 큰스님들도 많이 계십니다만 특히 성철 큰스님께서 우리 조계종에 하신 역할이 있다면 어떤 점을 가장 높이 평가하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딴 큰스님들도 많이 모시고 있어 봤고, 오래는 살지 않았지만 종정스님도 일곱 분이나 모셔 봤지요. 그런데 성철 큰스님의 특징이라면, 무엇보다 혼자 계셔도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고, 자기 분야에 그렇게 철저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너무나 철저하고 분명했습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았어요. 바로 그 점이 성철 큰스님의 특징이고, 조계종의 큰 사표(師表)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른쪽에서부터 성철스님, 법전스님, 일타스님
◉ 성전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나서는 김용사로 옮기시고, 거기서 첫 백일법문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스님, 그때는 계셨습니까?
김용사로 옮겨서는 서옹스님은 이름만 주지라 하고 나보고 총무소임을 맡으라고 합디다. 걸망만 지고 다닌 사람이 그런 행정을 알 수가 있나 그래서 굳이 안한다고 하는데, 청담스님하고 서옹스님이 노장님 옆에 앉아서 꼭 나 보고 총무를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어쩔 수 없어 맡기는 했는데, 소질도 없고 행정사무도 모르겠고 해서 한 서너 달 하다가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랬다가 백일법문 끝에 들어갔을 겁니다. 백일법문 다 마치고 대중이 앉아서 소감 한마디씩 할 때 들어갔지요. 백일기념 사진 촬영에는 참여했지요. 그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참여를 했는데, 대학생들도 있었고, 박성배, 김선근 씨, 원공스님, 원기스님 등도 있었어요. 그 후 스님이 먼저 해인사로 가시고, 나는 그 이듬해인가 바로 백련암으로 갔습니다.
◉ 첫 해인총림 때 얘기를 해 주십시오.
그때는 이렇게 대중이 많지 않았어요. 한 삼십오륙 명이 살았는데, 해인총림 초기에 제가 유나를 봤습니다.
◉ 큰스님에 대해서 다른 한편으로 더러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밖에서는 3천 배 절 많이 시킨다고 비판을 하고, 안으로는 능엄주 시킨다고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비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십니까?
대중이 하는 대로 평범하게 하면 별 무리가 없었을 텐데, 그렇게 안하고 별도로 하니까. 당신이 주창을 하고 또 거기 있는 사람은 꼭 그런 생활을 시키고 하니까요. 무엇이 원인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런 이상한 얘기가 나오고 했을 겁니다.
◉ 큰스님께서는 절을 많이 시키신 반면에 다른 어떤 스님은 보살들이 절 많이 하면 병 생긴다고 하며 말리셨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행자원에서부터 매일 하루에 5백배를 하고 회향 날은 밤새도록 3천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큰스님께서 주창하신 절법도 많이 퍼졌다고 보아집니다. 스님께서는 지금까지도 평생 매일 절을 해오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장님 생활하고 우리 하고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노장님은 정말로 위법망구(爲法忘驅) 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려는 발심 있는 사람을 바랐는데, 그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까 절이라도 시켜서 신심을 북돋아 주시려고 하신 취지에서 그렇게 시키신 것입니다. 내가 요새 젊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 보면, 옛날 스님네 산 것 하고는 너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옛날에는 큰스님 밑에서 생활하든 말든 편하게 살지를 않았어요. 내가 가서 부탁을 안 해도 고행 비슷한 생활을 했습니다. 일도 하고, 부지런히 정진도 하고, 밤잠 안자고. 내가 봉암사 있을 때만 해도 하루에 잠 세 시간을 자 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요새는 어떻게 하면 더 편하고, 잘 먹는가 하고 궁리만 하나 봐요. 그러면 도하고도 거리가 멀어지고, 부처님하고도 멀어집니다. 부처님 말씀에 어떻게든 의식주를 간소하게 해서 검박하게 살라고 간곡히 말씀하셨고, 조사스님들도 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옛날 큰스님네들은 도(道)를 할려면 가난을 먼저 배우고 나서 도에 들어간다고까지 말씀하셨는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한낮에 조금만 꾸물대면 피곤하다고 하면서 들어 눕고, 절에 오는 신도들도 걷기가 싫어서 택시를 타고 올라오는데, 그러니까 절이라도 시켜서 신심을 북돋아주려고 하신 겁니다.
그래 내가 한 번은 노장님께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 가만히 보니 장래성이 안 보입니다. 편하게 잘 먹으려는 정신 가지고 있는 애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이렇게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노장님께서는 이렇게라도 해야지 안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 큰스님께서 떠나셨지만 백련암에서는 아비라기도나 삼천배는 계속할 것이며, 큰스님 계실 때처럼 백련암 스님들이 신도들을 위해 목탁을 치지 않아도 신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 기도 자기가 한다며 끓임 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큰스님 가르침이 신도들에게는 퍽 유효했다 싶습니다.
그동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마 갈수록 더 유효하리라 생각합니다. 금년이 얼마나 더웠습니까. 굉장히 더운 해인데, 나 있는 데서는 공양주까지 꼭 백팔참회를 시켯습니다. 나도 같이 하고. 그리고 아픈 사람도 백팔참회를 못하면 가라고 합니다. 더운 여름에 백팔참회 한 번 하고 나면 장삼까지 다 젖어요. 그래 옷을 매일 빨아야 해요.
◉ 큰스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스님께서는 전 종정스님의 뜻을 어떻게 이어서 후학들에게 무엇을 전해주셔야겠다고 마음을 정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나 자신은 물론 우리들이 큰스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 만한 역량이나 모든 것이 부족해요. 그렇지마는 내 개인 생각으로는 뼈를 깎는 일이 있더라도 노장님 정신에 가깝도록 부처님 정신에 가깝도록 살다가 죽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결심을 합니다. 그러고 옆에 후학들도 그렇게 이끌어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 소원입니다.
◉ 큰스님께서 특별히 후학들을 지도할 때는 어떻게 하라고 당부하신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평소에 늘 하신 말씀처럼, 어떻게든 정진 부지런히 하라고만 하셨지 다른 얘기는 일체 하신 일이 없습니다.
◉ 이런저런 일로 바쁘신 가운데 긴 시간을 내어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큰스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나가기 위해 정진 또 정진하도록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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