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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面石]
혜암스님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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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1996 년 6 월 [통권 제2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9,60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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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원택스님

 

성철스님과 처음 만나신 것은 언제이십니까?

 

해인총림이 가야총림이었던 시절이니까, 내가 계를 받고 난 지 얼마 안 지나서였습니다. 효봉스님이 조실을 하시면서 방장으로 계시던 때였는데, 큰스님께서는 그때 육환장을 짚고 큰 삿갓을 쓰고 다른 스님들과는 좀 별다른 모양을 하고 오셨어요. 그래서 저 스님이 어떤 스님이냐고 물으니, 철스님인데 장좌불와를 8년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 그런 스님 같으면 내가 따라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며칠 동안 엿을 봤지요. 그 스님이 여기서 언제 떠나느냐고 자꾸 물으니까 장경각에 모셨던 장경을 모셔 갈려고 오셨다고 하는군요. 그 장경은 서울의 김처사라는 분이 온 힘을 쏟아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을 돌며 귀하다고 여겨지는 불서를 모은 것이었어요. 김처사는 그 장경을 어떤 분한테 맡기면 좋을까 하고 노심초사하던 중에, 스님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스님한테 장경을 맡기기로 했다는군요.

 

 


 

그 책들을 장경각에 모셔두었는데, 바로 그 장경을 가져가려고 오셨다는군요. 그때는 장경각에 아무도 못 들어갔습니다. 관리들도 못 들어갔어요. 쇳대를 지니고 있는 주지스님만이 들어갈 수 있었어요. 지금이야 관광지가 되어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귀중한 장경을 봉암사로 모시고 가려고 오신 것이었어요. 그때는 참 화물차를 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화물차를 하나 가지고 오셨어요. 큰 궤짝에 장경을 넣고 화물차에 옮겨 실은 뒤, 깜깜해서야 해인사를 출발했습니다.

 

우봉스님하고 보안스님이 큰스님을 시봉하고 가는데, 기사하고 두 분 스님이 앞에 타니까 보안스님이 뒤에 타더군요. 그래 ’아이고 잘 됐다’고 나도 화물차 뒤에 말없이 올라탔습니다. 둘이서 화물차 앞뒤를 붙잡고 고령까지 나가는데 차가 어찌나 덜커덩거리는지…, 그때는 참 길도 나빴어요. 대구역에 도착해서는 차에서 내리셨습니다. 아마도 장경을 화물로 해서 점촌역으로 붙일 생각이셨나 봅니다. 거기서 나도 따라 내렸지요. 큰스님이 저를 보더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으시길래, “갈 곳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혹시라도 못 따라오게 할까봐 그렇게 대답을 했지요. 이튿날 가만히 보니까 점촌 가는 완행차를 타더군요. 그 차를 타기는 해야겠는데 돈은 한 푼도 없고 해서 우봉스님에게 점촌 갈 일이 있으니 차 좀 태워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봉스님이 차표를 끊어주셨어요. 점심때가 되니까 떡을 사서 주시길래 그것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봉암사까지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큰스님께서는 봉암사로 거처를 옮기시고 한국 불교사의 큰 획을 긋는 봉암사 결사를 결의하셨습니다. 당시의 봉암사의 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과 우봉스님은 수행 납자의 정진도량이 될 만한 장소를 하나 골라서는 특별선언을 해야겠다고 타협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돌아가신 우봉스님도 참 거룩하신 큰스님이었어요. 큰스님하고는 무엇이든지 뜻이 잘 맞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큰스님께서는 다른 스님 말은 안 들어도 그 스님 말은 잘 들으셨어요. 봉암사의 가풍은 전혀 새로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능엄주를 안하는 사람은 거기서 지낼 수 없었습니다. 모든 대중은 자급자족해서 살림을 하는 동시에 탁발해서 공부를 했는데, 탁발한 것이 공부에만 도움을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너나없이 살림이 어려운 때여서, 탁발하러 나갔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 다 보시를 하고 왔지요. 탁발한 것을 절로 가져오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그 집 솥뚜껑을 열고는 다 부어 놓고 왔거든요. 그런 일이 없을 때는 절로 가지고 와서 공부하는 데 썼습니다. 또한 모든 대중이 운력을 했지요. 나무도 일꾼 쓰지 않고 직접 산에 가서 나무를 했습니다. 날마다 시간 정해 놓고 나무를 하니까 나중에는 나무가 남더군요.

 

그렇게 공부하랴, 탁발하랴, 운력하랴 하면 무척 힘이 들었을 텐데요? 불평은 없었습니까. 그러고 어떤 분들이 결사에 동참을 하셨는지요.

 

힘은 무슨 힘,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부를 못 들여서 야단이었지요. 아무나 방부를 들이지 않았거든요. 처음 해인사에서 장경을 싣고 가서 얼마 동안은 한 7, 8명밖에 안 살았어요. 점점 그 수가 늘어나 20명이 30명 되고, 나중에는 많이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청안스님, 보문스님, 우봉스님, 일도스님, 자운스님 등이 계셨지요. 보문스님도 돌아가셨고 일도스님도 돌아가셨는데, 모두 훌륭한 스님들이셨습니다. 그러고 중간에 향곡스님, 청담스님 등이 들어오셨습니다. 뒤에 월산스님, 성수스님, 법전스님 등이 오셨지요. 향곡스님과는 아주 절친한 도반이었는데, 봉암사에 와서 같이 지내자고 청해서는 오시게 되었지요. 향곡스님은 비문에도 적혀 있듯이 봉암사에서 확철대오를 해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었습니다. 향곡스님께서는 평소에도 봉암사를 무척 좋아하셨고, “봉암사를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안정 천제굴에 계실 때 자운스님과 함께 오시곤 했는데, 그러면 두 분이 방안에서 법담을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먹질도 하시고 했지요. 그러고는 서로 허허 웃고 하셨습니다. 

 

봉암사 결사를 말할 때면 으레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에 주목을 하게 됩니다. 결사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말이 필요 없어요. 말 그대로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 에서 뜻에서 모였기 때문에 그냥 부처님 법대로 살면 됐지요.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바로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보조국사 장삼을 60벌 맞췄습니다. 그때만 해도 두루마기에 소매만 넓은 마치 도포자락 같은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을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 바꾸었지요. 가사도 빨간색이었는데, 먹물 가사 즉 괴색 가사로 바꾸었습니다. 목발우도 다 없애버리고 철발우를 썼지요. 철발우를 공장에 가서 맞췄습니다. 무겁기는 했어도 대중적으로는 모두 철발우를 썼고 개인적으로 토기 발우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부처님 법 그대로 살자고 해서 모였으므로 목발우는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봉암사의 가풍은 어떠했는지요?

 

봉암사의 가풍은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큰스님 생각대로 청정가풍을 정해 놓고, 이 규칙을 지킬 사람은 여기서 살고 지키지 않을 사람은 살고 있는 사람도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적게 살아도 좋으니까 부처님 법대로 살겠다는 것이 규칙이었어요.

 

지금까지 말씀하신 대로 큰스님께서 봉암사 결사를 하시면서 장삼, 가사, 발우를 부처님 법대로 정하시고, 능엄주도 하게 하시고, 자운스님께서 처음으로 보살계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자운스님에게 범망경을 가르치셨지요. 그러고 나서 자운스님께서 서울 도서관에 가서 율문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봉암사의 생활은 이전의 불교 모습과는 다른 점이 참 많습니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했는지요.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 발우와 옷을 바꾸고, 능엄주를 하고, 절에서 산신각․칠성각을 없애고, 보살계를 시설해서 신도들이 스님에게 삼배를 하게 하니까 봉암사 산중에 외도들이 모여 산다고 하는 분도 있었지요. 사실 신도들한테 스님들이 삼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삼배를 시킨 것인데, 어떤 스님은 있지도 않은 법을 자기 식대로 만들어서 귀찮게 한다고 비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이 삼배라는 것이 참 성황했어요. 알고 보면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정법인데, 모르고 하는 말이니까 그냥 웃을 수밖에요.

 

그동안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으로 다니시면서 깊은 수행을 해오셨는데, 다른 스님들과는 구별되는 성철스님의 가풍이나 지도방침 있다면 어떤 점입니까?

 

있지요. 그것이 내 생명입니다. 일본에서 어록을 조금 보기는 했지만 한국에 나와서 찾아가지 않은 스님이 없이 다 찾아다녔어요. 어떤 스님네들은 ‘뭐 그런 데를 다 찾아가느냐’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는 길도 물어가자는 생각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지는 못할지언정 내 갈 길은 내가 분명히 알아서 가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찾아다녔습니다. 내 구경각에 대해서 그 노정기를 분명히 공부는 못하더라도 이 길만은 분명히 알고 난 뒤에 숨더라도 숨어서 공부를 해야지 하는 것이 걱정이 되어서 또 가고 또 가고, 뭐 다른 말이나 색다른 말을 듣지는 않을까 해서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니다 보니 완전히 갈림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즈음 많이 알려진, 돈오돈수와 점수돈오라고 하는 길입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조실스님들은 점수돈오를 주장하는데, 큰스님만이 돈오돈수가 정법이지 점수돈오는 외도법이라고 주장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지금의 한국불교는 탈선된 불교다. 누구든지 확철대오한 사람이 나오면 나를 알아주고 내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나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전혀 의심이 없진 않았어요.

 

그러나 해마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다 보니 걱정이 되어서 돈오돈수법에 대한 어록을 들여다보고 또 다른 스님들과 같이 지내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나가 틀리니까 역시 다른 것도 다 틀리게 말씀을 하고 가르치더군요. 예를 들어 견성이나 보림에 대해 말한다면, 공부를 하면서 보림을 한다고 하거든요. 저녁에 잠도 안자고 공부를 하면서 내가 보림한다고 하는 스님도 있고 견성했다고 하면서 또 내가 정진한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라도 들어보면 이해가 충분히 되고 남을 것입니다. 견성했다고 하면서 잠 안 자고 공부한다는 말과 또 공부하면서 보림을 한다는 두 말만 예로 들어도 충분할 것입니다.

 

만약 큰스님의 어록이 안 나왔으면 스님한테 배운 멋진 말로 큰소리 하고 다닐라고 했는데, 스님 어록에 이 말씀이 다 나오니 내 할 말이 없어졌어요. 허허, 내 살림살이가 다 무너져 버렸어요. 솔직히 말해서 다른 스님네들 가르치는 것하고 스님하고 달랐던 것입니다. 큰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견성한 사람은 무사도인이다. 무사도인이 돈오돈수이고 돈오돈수가 반야삼매고 증오고 성불이고 구경각이고 말만 다를 뿐이지 이것이 똑같은 자리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견성을 하면 무사도인인데 거기다 공부를 한다고 하면 일없는 사람이 아니라 병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스님들은 우리를 가르칠 때 자신 있게 견성했다고 하면서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한다고 하니 앞말과 뒷말이 달랐던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보림에 대해서도 병이 다 나아서 병이 없는 그 깨끗한 자리를 보호하는 것이 보림이지 병 있는 몸을 다시 고친다는 것은 보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법을 다 초월한 분이므로 무엇을 한다 하여도 행하는 바가 없습니다. 육조스님도 부처님의 행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보림입니다. 큰스님은 이처럼 일을 다 마쳐서 일 없는 자리를 보하는 것이 보림이라고 항상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데 반해 다른 스님은 일하면서 보림한다고 했습니다. 돈오돈수법을 제대로 모르니까 말이 이렇게 달랐던 것입니다. 돈오돈수법은 그야말로 수양법과 달라서 어떤 과정을 밟아서 깨닫는 법이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시간을 많이 갖고 여러 해를 지나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일초직엽여래지 즉 단박에 깨닫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이것이 선종의 정통종지이자 정법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조사어록에 보면, 점수돈오법은 장언문이고, 교가에서 하는 말이고, 소승법이고 방편론으로 정법이 아닌 외도법이라고 못이 박혀 있습니다.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두 맥이 흘러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중년에 다 알아버렸어요. 정말 어느 쪽이 옳은가 걱정하고 다니면서 연구도 하고  많이 배우기고 했습니다. 결국 스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큰스님이 나를 가르치신 법사스님이자 나의 스님이지 다른 스님은 내 스님이 아닙니다. 나는 스님법을 받들고 믿고 공부를 해오고 다른 스님한테도 그것만 가르쳤지 다른 말은 해 본적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조사 스님들과 같이 지낼 때, 그 말은 항상 양보를 안하고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만약 철스님이 참선법을 외도법이라고 하면 해인총림의 선방을 없애 버릴 것 아니냐, 그런데 말로만 참선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장군죽비를 들고 선방에 와서 견책을 해주는 분인데, 참선이 외도법이라고 하시는 분이냐. 참선도 인연이 도래하면 일초직입여래지라고 단박에 깨치는 법이니 돈오돈수법이지 다른 법이냐고 합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부처님도 무량겁을 닦아서 성불하지 않았느냐고 대꾸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대승보살계를 닦아서 성불할려는 사람은 송장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놈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량겁을 닦아서 깨닫는 것은 외도법이다라고만 알면 됩니다. 한 번은 큰스님이 나한테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혜암이는 누구를 신(信)하냐.” “누구를 신하겠습니까. 내가 깨쳐야지요. 깨치지 못한 눈으로 누구를 신하겠습니까.” 그렇게 대답을 하니 스님께서 좋다고 박수를 치시더군요.

 

큰스님께서는 한국 불교의 선맥이 이어지지 못해서 확철대오한 도인이 안 나온다고 평소에도 한이 서린 듯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한국 불교를 위해서 당신이 몸을 바쳐서라도 돈오돈수사상이 선종 정맥이란 것을 꼭 밝혀야 되겠다 하고 평생의 원념처럼 애쓰시다가 가셨습니다. 한 계단 두 계단 밟아 올라가는 수양은 그 자체가 외도법입니다. 바로 깨닫는 것, 그것이 불법입니다. 불법을 해설할려면,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없어요. 자신을 깨닫는 법, 이것이 불법입니다.

 

스님께서 가끔 백련암에 올라오셔서 큰스님과 자리를 함께하시곤 하는 모습을 뵈었습니다. 주로 어떤 말씀을 나누셨는지요.

 

주로 공부를 당부하시면서 게송 등을 친필로 써주신 게 여러 장 있었는데, 지금 찾으려고 하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대개는 분발심을 일으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다 소용없는 일이니 깨닫는 것을 기본으로 삼아라”는 말과 동시에 “시인(施人)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을 늘 잊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공부하는 사람이 시인을 중하게 여기면 공부하기가 어렵게 된다. 공부를 하려면 시인을 불덩어리같이 생각하고 가벼이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또한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부모를 죽이고라도 눈 하나 껌뻑하지 말라”고 항상 부탁을 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도 마음을 흔들리지 말라. 옛날 도인스님들은 병신을 구하려고 하지 똘똘한 사람 구하려고 한 적 없다. 공부하려면 병신노릇 하라는 거지요. 그러고 숨어사는 데는, 두 가지 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 없는데 가서 숨는 것은 작게 숨는 법이고 사람 많은 데서 병신노릇 하는 것은 크게 숨는 것이라고요.

 

스님께서는 오랫동안 큰스님을 가까이서 뵙고 모셨는데, 저희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일화가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스님께서는 책을 굉장히 귀하게 다루셨어요. 방에 가득한 책을 1년에 두 번 봄가을에 바람을 쏘이는데 상좌는 물론 여태 같이 산 사람이 있어도 옆에도 못 오게 합니다. 참 무섭대요. 책을 얼마나 귀중하게 다루시는지는 책 한 권 드는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손이 달달달달 떨려요. 참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책을 보실 때도 아주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지 되는대로 넘기는 것은 꿈에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책은 안 빌려줘요. 안 빌려주는데 혜적이라는 내 사제가 있었는데, 머리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어요. 한 번은 내가 증도가 한 권을 빌려줬더니 그 이튿날 가져오더군요. 그래서 “더 보지 왜 가져왔냐”고 하니 “다 외웠습니다” 하더군요. 그래 외워보라고 하니까 줄줄 외워요. 법화경 한 권도 다 외워요. 머리만 좋을 뿐 아니라 인물도 잘 나서 천동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인간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늘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내가 안정사 토굴에서 살 때, 일본말로 된 한산시를 빌리러 왔더군요.

 

스님께서 어떻게 그 사람을 귀엽게 보고 빌려주시더군요. 그런데 혜적이가 책을 구부려서 손에 들고 다니니까  큰스님께서 마치 잠자리 잡듯 뒤로 가서 탁 뺏더니 “너 이 자식, 책 볼 자격이 없다”고 어찌나 혼을 내셨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책을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라서 바다와 같이 많은 것을 아는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스님은 보통 인간이나 스님노릇 하기를 초월한 스님이었습니다. 그런 법도를 다 초월해 사는 분이었어요. 또 평생 돈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돈을 못 만지니까 어디를 갈 때도 꼭 누구를 데리고 가서 차표를 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누더기 한 벌로 평생을 나셨습니다. 모든 생활은 가난한 것부터 하라고 하신 게 생각이 납니다. 청백가풍을 지키는 부처님이나 조사가풍을 그대로 남기고 가셨어요. 조사가풍대로 우리를 가르치고 가신 분입니다. 스님은 무슨 다른 일을 전혀 안하셨습니다. 오직 하루 살다 죽더라도 공부만 하다 죽는 게 우리 스님이지 다른 일을 없다. 눈 깜짝할 새라도 나의 참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고 가는 일이 나의 할 일이지 다른 일은 다 죄 짓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시간 여 동안 귀한 말씀을 들려주셔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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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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