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 산책]
그대의 체험을 그대의 말로 표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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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 1997 년 3 월 [통권 제5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10,224회 / 댓글0건본문
1.
중국에서 선종의 특징이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마조스님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직계 백장 - 황벽 - 임제 등에 의해서 마조의 선풍은 더욱 드날리게 되었다. 그들은 스승을 단순하게 계승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고, 스승을 뛰어넘는 기량을 보였다. 이런 그들의 가풍은 마조가 그의 스승 남악 회양선사를 만났을 때부터 이미 확립되었다. 마조는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다가 남악선사에게 그렇게 수행했다가는 앉아 있는 부처가 된다는 꾸지람을 듣고, 마조는 일상생활 속에서 뚜렷하게 움직이는 불성의 활용성을 그의 유명한 “마음이 부처이다”는 말로 세상에 전했다. 구체적인 우리의 일상성 속에서 불성의 작용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때의 마음은 보편 심성을 자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마조 밑에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백장선사이다. 백장선사는 마조에게 코를 비틀린 일로 선문에 유명하다. 하루는 마조스님을 따라 백장선사가 산책을 나갔다. 스승이 앞서고 제자가 뒤를 따르며 길을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앞에서 들오리 한 마리가 “꾁꾁” 울면서 날아가는 게 아닌가! 두 사람은 말없이 길을 걸었다. 한참 지나서 선생님 마조가 뒤를 돌아보며 제자 백장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났던 소리는 어디로 갔느냐?” 백장은 별 의심없이 대답했다. “이미 날아가 버렸는데요.” 그러자 마조는 뒤에 따라오는 백장의 코를 쥐어 비튼다. 백장은 갑작스런 일이라 피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한다. 코가 아파서 소리를 내지른다. “아야, 아야!” 그러자 스승이 제자에게 말한다. “그래도 날아갔다고 하겠느냐?” 이 말을 듣고 제자 백장은 크게 깨닫는다.
자, 여기에서 마조와 백장 사이에 무엇을 주고받았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마조의 선풍을 상기해야 한다. 마조의 선풍은 말할 것도 없이 “마음이 부처이다”라는 일상성 속에서 불성의 작용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불성을 어떤 특정한 곳에 개별성을 떠나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정리하고 다시 위의 들오리 이야기를 보자. 들오리의 울음소리가 나서 그 소리에 의해서 사람이면 모두 가지고 있는 듣는 성품이 작용을 한다. 들오리 소리가 사라지더라도 이 듣는 성품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이 성품은 불생불멸하는 무위법이다. 들오리 우는 소리는 이 성품을 격발시키는 외적 자극일 뿐이다. 스승 마조가 백장의 코를 비틀자 그 듣는 성품은 다시 작동한다. 이 듣는 성품에서 스승 마조는 불성의 작용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선풍이 이어졌다.
2.
흐르는 세월 속에서 백장도 어느덧 남의 스승이 되었다. 백장선사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하루는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불법을 닦는 일이란 작은 일이 아니다. 나는 일찍이 마조대사께서 큰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삼일 동안이나 귀가 멀었다.” 이 말을 듣던 대중 속에는 저 유명한 황벽이 있었다. 황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혀를 쏙 내밀고 말았다. 아마도 감격하여 입을 벌린 것일 것이다. 제자 황벽이 이러는 것을 보고 백장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그러면 앞으로 마조대사의 법통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거냐?” 이 말에 황벽은 대답한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노스님을 배반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선생님께서 마조 노스님의 인연을 말씀해 주셔서 노스님의 대기대용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조 노스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그저 마조의 뒤를 잇기만 한다면 앞으로 나의 자손들을 죽이는 꼴이 될 겁니다.” 이 말에 백장선사도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럼 그렇지. 깨달음이 스승과 똑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으로 줄이는 것이고, 깨달은 경지가 스승보다 더 훌륭해야 스승의 도를 전수받을 만하다. 그대는 참으로 스승을 뛰어넘는 깨달음이 있구나!”
이 집안 가풍을 여실히 보여 주는 말이다. 스승이 하는 대로 똑같이 한다면 이는 스승을 욕되게 한다는 이 정신이 그대로 임제의 선풍에 전달된다. 내 말 외워서 그대로 토해 뱉지 말고, 너의 체험을 너의 언어로 토해 보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체험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언어로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당나라의 선승 경청 도부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그래도 쉽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기란 더 어렵다.”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 곧 깨닫는 일이 어렵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말하기는 쉽다는 것이다. 대학의 강단에 있으면서 나도 어설프게 이 말을 흉내 낸다. 학생들에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문제를 여러분의 언어로 재구성해 보라고 말이다.
스승 마조스님께서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마음의 움직임에서 불성의 활용을 드러냈고, 제자 백장선사는 스승의 깨달음을 그대로 흉내 내기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더 첨예화하여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하려 했다.
3
역대의 조사스님네들이 모두 깨달은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말들은 저마다 다르게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가 선어록에서 배워야 하는 점 중의 하나로 이 점을 들 수 있다. 문학작품에서 예나 제나 나오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랑, 죽음, 이별 등이다. 그 중에서 이별을 보더라도 작가마다 제 목소리와 색깔을 내고 있다. 나는 이별을 경험하거나 생각할 때면 백낙천의 ????장한가????가 떠오른다. 안록산의 난리로 당 현종과 양귀비의 꿈같은 사랑도 막을 내리고 피난길을 나선다. 나라를 기울게 한 죄로 신하들의 손에 죽는 애인을 지켜봐야 하는 제왕의 슬픔을 어찌도 그리 잘 묘사했는지. 죽은 애인이 보고 싶어 도사를 시켜 저승길로 나서는 간절함과, 저승에서 재상봉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백낙천이 아니고서는 드러내지 못할 그만의 표현이다. 이 표현의 깊이 만큼 백낙천의 이별에 대한 통찰이 깊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도 넓게는 이별이다. 이 죽음을 노래한 싯귀들도 많지만, 나는 도연명이 자신의 제문을 생전에 지은 것만큼 죽음을 관조하는 문장도 드믈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는 정묘년 9월, 하늘은 차가웁고 밤은 깊은데 바람은 쓸쓸. 기러기떼 날아가고 초목들도 낙엽되어 떨어진다. 나 연명은 이제 임시로 거처하던 여인숙을 떠나 내 집으로 영원히 돌아가건만, 정든 이들이 슬피 울어 오늘밤 송별회를 여는구나.……”
낙엽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듯이 자신도 죽어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았지만 이것은 마치 타향 땅 여관에서 하룻밤 묵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제 영원히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본래의 내 집으로 돌아가면서 남아 있는 친구들을 보니, 나를 보내는 게 슬퍼서 송별의 잔치〔祖〕를 연다.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관조하는 것은 연명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못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자신만의 언어로, 그 체험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우리들은 숲에서 수행하든 마을에서 수행하든, 장소를 막론하고 자신의 체험을 엮어간다. 그러면 이제는 그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작업을 할 때가 아닌가? 이 길만이 부처나 조사의 말에 휘말리지 않고 자기를 찾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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