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및 특별기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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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스님 / 1998 년 3 월 [통권 제9호] / / 작성일20-05-06 08:36 / 조회11,274회 / 댓글0건본문
생명의 진실은 너와 내가 꼭 같으니
여러 불자님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신심이라 하고, 이 신심이 단단하고 확실한 것을 발심이라 합니다. 또한 발심이란 발보리심, 즉 구도심을 일으켜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코 후퇴하지 않는 신심을 갖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또 참회하는 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핵심은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달음 혹은 깨침이라 하는 것은 깨어지는 것 또는 깨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지는 것 즉 깨짐이라 하는 것은, 예를 들면 호두껍질을 깨뜨린다 할 때의 깨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네 보통사람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망상의 껍질을 깨뜨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깨어난다는 것은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인데, 분별망상을 짓는 것을 꿈꾸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꿈속에서는 엄연한 사실로서 일어나지만 꿈 깨고 보면 헛것이듯이, 분별망상을 짓지 않아야 진실을 아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시구에 “마당에 있는 오동나무 잎은 벌써 낙엽이 드는데 방 안에 있는 주인은 아직 봄 꿈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봄 꿈을 못 깨었으니 그 나무의 가을 낙엽이 바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꿈을 깨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고, 그래야만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꿈을 깨는 과정을 선사스님들이나 큰스님께서는 동정일여니 몽정일여니 혹은 오매일여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의 본래 마음, 생명의 진실은 너와 내가 꼭 같다고 합니다. 선인과 악인이 꼭 같고, 흑인과 백인이 꼭 같고, 나아가서 부처님과 중생이 꼭 같다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는 것은, 이런 엄연한 사실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꼭 같은 줄을 많이 몰라서 끝없이 분별하고 있는 사람은 박복한 범부 중생이고, 수행하는 현인이나 성인은 조금 모르고, 부처님은 모르는 것이 조금도 없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아는가 모르는가에 관계없이 우리들 생명의 본 모습은 본래 청정하고 청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성 청정심입니다. 청정하다고 자꾸 말하는 것이 오히려 때가 되고 오해를 불러올 만큼 청정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진실한 사람을 두고 좋은 사람이라고 자꾸 말하는 것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범부에게서도 가끔 성인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를 모르고 부처님을 몰라도 양심에 거슬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고, 아무리 불교를 잘 알아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지옥에 갈 채비하는 것입니다.
원효스님의 글인 『발심수행장』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장엄하시는 것은 오랜 겁 동안 욕심을 끊고 고행하신 까닭이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끝없이 윤회하는 것은 한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막는 이 없는 저 천당에 가는 사람 적은 것은 탐진치 삼독으로 재물을 삼기 때문이요, 부르는 이 없는 저 악도에 가는 사람 많은 것은 5욕으로 마음의 보배로 삼는 까닭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에서 발심이란 청정한 본래 마음을 깨닫고자 결심하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라 하고서, 출가하여 아주아주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진정한 발심이고 수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아끼고 젊은 시절에 부지런히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 신심을 꾸준히 갖기는 참 어렵습니다. 근본 번뇌가 곧 분별망상이라 하였듯이 이 분별심 많은 보통 사람에게 보이고 들리는 것이 어찌 부처님 가르침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은 불교 이외에도 유교, 이슬람교, 예수교, 무속 등 세계 종교의 전시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연따라 반연따라 이리저리 살다 보면 신심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예로서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입시기도입니다. 대입 수능시험 때가 되면 절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가 시험이 지나가고 얼마 후에는 다시 절에 나오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사람의 신심은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험 공부하는 자식을 위해 부처님께 가서 향 하나 사르고 절 한 번 하면 좋을 것 같아서 평소에 안 가던 절에 간다는 것은 참 귀한 인연 아닙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위해서도 지극한 마음으로 축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인연이 귀한 줄 알고 지속적으로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퇴보하지 않는 신심을 위하여
오늘 이 법문의 주제를 발심이라 한 것도 바로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신심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은 신심이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어떻게 하면 퇴보하지 않는 신심을 가질 수 있는가? 즉 발심을 하기 위해서는 이 신심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일찍 일어납시다.
수년 전부터 불교인의 생활방식으로서 새벽에 일찍 일어날 것을 주장해 오고 있습니다. 절에서 사는 스님들이 새벽에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해인사의 경우 새벽 3시면 도량석 목탁이 울리고 3시 반에는 예불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1년을 두고 변함이 없으며, 10년을 두고 변함이 없으며, 100년을 두고 변함이 없습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과 발심한 사람은 이것을 배우고 실천하십시오. 큰스님들의 어떤 법문이나 어떤 이론보다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 이것을 배우고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하고, 그러려면 일찍 귀가해야 합니다. 일찍 귀가해서 충분히 쉬고 새날을 시작하는 것, 모든 사람의 바람 아니겠습니까. 특히 보살님들이 처사나 자녀들에게 바라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처사들이나 또는 학생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은 다른 가게가 문을 안 닫는데 혼자만 닫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 학생의 경우는 저녁 10시가 넘어야 시작되는 과외공부를 안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공부한다고 독서실에서 12시에 돌아오는 아이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밤늦게 자게 되고 또 아침에는 늦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주변의 형편에 따르지 말고 오직 부처님 법에 따르고 스님네 법에 따르자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 이것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스님네들이 모두 오랫동안 생활해 온 방식이니 분명 옳은 생활방식이라고 확신하고 이 법을 따라 살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일이나 처사들이 사업하는 일이나 생활 자체를 이렇게 바꾸어 나가자고 작정하면 안 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다 될 수 있습니다.
가끔 신문이나 텔레비전의 보도에서 밤 12시가 지나서 택시를 잡으려고 큰 길까지 나와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저런 것이 생존경쟁인가 하는 생각에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부디 저 사람들이 내일 저녁에는 일찍 귀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기원하기도 합니다. 일전 신문에 보니까 그 유명한 간 큰 남자 대열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밤 10시 넘어 집에 들어와 저녁밥을 달라는 남편은 간이 큰 남편 시리즈의 앞 순위로 꼽히고, 더구나 밥 9시 반 이전에 들어오고 또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오면 인기 있는 남편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들어오든, 사서 싸 가지고 들어오든, 집에 와서 해 먹든, 아니면 아예 굶든지, 밥 먹는 것은 의논해서 해결할 일이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저녁이 되면 일찍 집으로 퇴근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밤중에 독서실에서 집에 돌아와서 또 아침 일찍 나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안쓰럽겠습니까. 그러니 아예 가족회의를 하여 결정을 보십시오. 저녁 11시에는 자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는 대로 공부하고 또 학교에 가도록 말입니다. 공부라는 것이 일상생활을 잘하는 속에서 하는 것이어서 생활이 잘 안 되면 공부도 당연히 잘 안 됩니다. 이렇듯 생활의 기본 틀이 잘 익혀지면 공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이 찾아서 하게 됩니다.
요즘 보면 청소년 문제에 대한 많은 사회적 논의가 있고 또 개선책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학생들에게는 술과 담배를 팔지 말라고 합니다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와 아울러서 각 가정에서 적극적으로 학생들이 10시까지는 집에 들어오도록 지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수년 전 일본 교토에 가서 보니 밤 8시가 되니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밤 8시, 그 시간의 서울 거리 특히 종로 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그때는 초저녁 아닙니까. 방학이 되어 서울에 오는 교포 학생들 중에는 미국에 돌아가기 싫어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합니다. 서울의 젊은 분위기가 좋아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젊은이들이 점차 정신을 못 차려 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서 이제 가정에서부터 생각과 생활을 바꿉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시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절에서는 당연한 것이니 절에 다니는 신도님들은 이것을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일찍 일어나는 것은 수단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것 그것 자체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스님네가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법을 따라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자로 살아가는 본분입니다. 그 일을 누가 시작하느냐 하면 보살님 여러분입니다. 누가 후원하느냐 하면 부처님과 스님네들입니다.
그렇다고 초저녁부터 자면 안 됩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공부하는 사람은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많이 자면 게을러지고 정신이 흐려집니다. 부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시다. 좋은 생각은 아침 이슬과 함께 쉬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아직 이슬이 없어지기 이전 새벽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라야 인생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일찍 일어나는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고 좋은 생활입니다.
둘째, 예불을 합시다
일찍 일어났으니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망설이지 말고 매일 부처님께 예불을 합시다. 일주일이면 7일, 한 달이면 30일, 1년 365일, 하루도 빠지지 말고 반드시 예불을 합시다. 예불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주변의 스님이나 또는 도반과 상의하면 좋겠습니다. 흔히 하듯이 천수경이나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습니다. 혹은 참선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선방에서는 죽비 3번 치면서 절 3번 하는 것으로 예불을 올립니다. 큰스님께서는 매일 108배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참회와 관련하여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예불에서는 반드시 발원문을 낭독하십시오. 발원문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원하는 것, 혹은 실천하고 싶은 것 등을 말하면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과의 약속이고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므로 반드시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저의 절에서 법회 중에 발원하며 축원하는 글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금일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이 합장하고 발원하오니
부처님들 이끄시고 보살님들 살피시어
각자 마음속에 원하는 간절한 소망 원만히 이루고
나날이 크고 작은 재난 모두 소멸되며
부처 갖춘 이 몸은 언제나 건강하고
신통 갖춘 이 마음 어디서나 복전되며
나아가서 주변에는 향이 되고 먼 곳에는 빛이 되어
법계 중생 모두 함께 무상불도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일상 예불에서 더욱 간곡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가족이 함께 예불을 하라는 것입니다. 실제 이것이 참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우리 사회의 혼란상이 그대로 가정에서 드러나는 한 면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학생들도 공부한다고 예불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가족 간에 종교가 달라서 생기는 갈등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두고 보살님들이 원을 세우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이 함께 예불을 올려야 가정이 화목하고 이바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부터 꾸준히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지극한 마음으로 예불하면 언제인가는 온 가족이 부처님 앞에 발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셋째, 참회하는 생활을 합시다.
참회라 함은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앞으로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ksama)이라는 인도말과 그 번역인 회과(悔過)라는 한자말이 함께 합쳐진 것입니다. 참마라 하는 것에서 우리말의 ‘참아’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지송하는 천수경도 보면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참회하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먼저 관세음보살님을 청하고서 참회진언도 외우고, 참회게송도 외우고 하는 것이 모두 참회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참회의식으로 중요한 것이 포살의식입니다. 보살계를 설하는 『범망경보살계경』에 의하면 보살계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한 달에 한두 번 포살의식에 참석하여 지난 동안의 잘못을 참회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포살의식은 부처님이 계실 때도 행해졌습니다. 『아함경』에 보면 어느 땐가 부처님께서 직접 이 포살의식을 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자신이 만든 교단, 그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난 반달 동안의 잘못들에 대해 지적해 달라고 겸허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위대한 부처님이 거룩한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포살할 때에 합송하는 보살계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불자들은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들으라.
내가 이제 모든 부처님의 대계서를 설하고자 하노라.
대중은 고요히 듣고서
죄가 있거든 스스로 말하고 참회하라.
참회하면 편안하고
참회하지 아니하면 죄가 더욱 깊어지리라.
죄가 없는 자는 침묵하라.
침묵함으로 대중은 청정한 줄 아느리라.
모든 대중은 자세히 들어라.
이 계를 수지하는 자는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만남과 같으며
가난한 이가 보배를 얻음과 같으며
병든 이가 완쾌해짐과 같으며
멀리 갔던 이가 집에 돌아옴과 같느니라.
만약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더 계실지라도
이와 다름이 없으리라.
대중들은 각각 일심으로 이 계를 의지하여
여법하게 수행할지니라.
개개인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포살할 때에 드러내어 참회하는 것이고, 조용히 있으면 잘못한 것이 없는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중적인 참회 인식이고 불교의 독특한 참회의식입니다. 총무원에서는 이 포살의식을 중요시하여 조계사에서 총무원장님을 비롯한 전 직원과 많은 스님들이 함께 포살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해인사에서도 결제 기간에는 보름마다 보살계 포살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절에서는 매달 보름 법회에는 포살을 합니다. 그러나 보살계 수계식을 하는 절들은 많아도 정기적으로 포살을 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보더라도 이 보살계는 삼국시대부터 널리 행해져 왔고, 고려시대에는 매년 6월 보름에 임금이 보살계를 수계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언제부터인가 행해지지도 않고 또 잊어버렸겠지요. 그리하여 한동안 잊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성철 큰스님께서 다시 시행하신 것입니다.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 봉암사에서 많은 스님들이 결사를 하고 정진하는 중에 이 보살계 수계식이 있었고, 이 수계식장에서 신도인 보살들은 스승인 스님들께 삼배 절을 올리게 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신도들이 스님께 절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대 한국 불교는 바로 이 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전에 스리랑카에서 온 스님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니, 그곳에서는 매달 보름에는 전국적으로 포살이 있는데 이 날은 항상 공휴일이고 또 영화관 등도 문을 닫고 모두 포살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귀담아 들을 일 아니겠습니까.
3천배는 마지막 100배 때문에 한다.
마지막으로 참회와 관련하여 3천배 절 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3천배 절 할 때 3000배라는 그 숫자를 어떻게 세는가 의심이 갈 것입니다. 3천배를 할 때는 『예불대참회문』이라는 경전에 따라서 절을 합니다. 이 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먼저 89분 부처님의 이름만 있는 부분이 있고, 이어서 참회하는 글이 있는 부분, 그리고 『화엄경』의 일부분인 보현행원품 중 발원 부분의 셋입니다. 이 『예불대참회문』을 따라서 부처님 이름을 한 분 한 분 부르면서 끝까지 절하면 모두 108배가 됩니다. 3천배를 할 때는 앞의 부처님 이름 부분에서 100배가 되도록 맞추어 절하고 이것을 되풀이합니다. 그리고 500배 하고는 한 번씩 참회문과 발원문을 읽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성철 큰스님을 친견하려면 누구나 3천배 절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절하는 것이 무서워서 백련암 오기를 그만두기도 하였고, 혹은 절하다가 중도에서 그만두기도 하여 큰스님을 못 뵙고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3천배 하면 큰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행입니다. 지금은 3천배 아니라 3만배를 하여도 큰스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큰스님이 계시거나 안 계시거나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거나 관계없이 지금도 3천배 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또 아비라기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 큰스님께서 주신 3천배 가르침은 단순히 스님을 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님이 더욱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다시 한번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3천배 하라는 가르침의 뜻을 새겨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통 7~8시간이 걸려서 3천배를 마치고 큰스님을 친견하는 자리에서 스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이후로 집에서 매일 빠지지 말고 108배 절 하라고. 그러고서 일원상을 한장 그려 주셨습니다. 나중에는 복사를 해서 주었습니다. 그 당장에는 “예”하고 일원상을 받지만 돌아서서 마루를 내려올 때면 걸음도 잘 못 걷겠는데 무슨 절을 또 할까 보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다리 모임도 다 풀리고 나면 이상하게 다시 절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한 절을 꾸준히 10년, 20년 지속하는 신도님들이 있으며, 그러기에 오늘도 백련암에 절하고 기도하러 오는 분들이 꾸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3천배를 처음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고 저 자신 처음 절을 해 보니 대개 처음의 1천배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나 청년이나 노인의 구분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 동안에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들이 일어났다가 없어집니다. 지난날에 대한 생각들이 당시의 감정과 함께 불쑥불쑥 솟아나서 절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고, 어제와 오늘의 일이 함께 생각나기도 하고 혹은 이 절이 끝난 후에 해야 할 것 등도 생각납니다. 비유하자면 시장에 가서 쇼핑하는 것 같습니다. 이 가게 저 가게 드나들면서 이것저것 고르듯이 이 생각 저 생각들이 그렇게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므로 이 동안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함께 섞여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천 5백 배를 넘어서게 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은 점점 힘들어지고 피곤해지면서 이제는 절하기 싫은 생각만이 일어납니다. 이 절을 왜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절 안 하고도 잘 살아왔는데 큰스님께 속아서 이 무슨 고생이며 또 이렇게 절한다고 안될 것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자꾸 드는 것입니다. 절한다고 몸이 피곤해져서 예를 들어 무릎이 아프면 이것이 관절염 되는 것은 아닌지, 혹은 허리가 아프면 절 다 마치면 허리 병신이 되는 것은 아닌지, 혹은 발목이 아프면 10년 전에 발목 삐었을 때 의사가 조심하라고 하던데 등등 생각이 자꾸자꾸 일어납니다.
이처럼 한번 일어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자꾸 그런 생각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이 생각들을 놓아 버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끈질기게 일어나던 망상과 집착들이 없어지는 한순간이 있습니다. 참으로 한생각이 한평생이라는 말이 꼭 맞습니다. 이 한 생각 버리고 나면 마음이 참으로 가벼워집니다. 그때가 대략 2천 5백배 전후입니다.
망상이 쉬어 버린 이제 한 배 한 배 참으로 정성스럽습니다. 온몸은 피곤하고 힘들지만 마음은 자꾸자꾸 가벼워집니다. 차츰 3천배에 다가간다는 기쁨으로 새 힘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3천배는 마지막 100배 때문에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쁨을 어떤 사람은 운전면허 통과했을 때보다 더 기쁘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3천배가 끝나고 큰스님을 뵙고 백련암을 내려갈 때는 두 가지 흐뭇함을 느낍니다. 하나는 큰스님을 뵌 이 인연으로 심중에 계획한 것이 있거나 혹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모두 다 잘 이루어질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흔히 말하더군요. 큰스님을 친견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이 그 어려운 3천배를 다했다는 성취감과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삼천배 하는 동안에 일산의 생각들이 참 별것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또 절하기 싫다는 한 생각까지 털어버리고 보면 생각에 집착해 있던 자신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깨짐 또는 깨침이 일어난 것입니다.
죄와 마음이 없어져서 두 가지가 공적하니
마음이 깨끗하면 자연이 깨끗하다는 말이 있는데 3천배를 하고 보면 정말로 실감하는 것입니다. 이때 자연환경이 깨끗하다 함은 더럽던 것이 갑자기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서린 김을 닦아내고 거울면이 깨끗하여 물체가 선명하게 보일 때 “참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든 깨끗이 보입니다.
절을 마치고 법당을 나서면서 보면 산과 숲과 풀들이 반짝이고 빛이 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모든 소리 심지어 자동차 소리까지도 고요히 들려옵니다. 새로운 인식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리하여 일상의 집착에서 벗어나서 내면의 번뇌를 깨닫는 사람은 신심이 분명하고 발심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참된 신심이 일어나는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3천배하는 것은 신심이 퇴행하지 않는 자리의 시발점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제가 큰스님을 처음 친견하던 자리에서 물었습니다.
“절 해 보니 어때?”
“절 하니 온갖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그럼, 절 안 하면 아무 생각 안 일어나겠네?”
그렇지요. 절 안 하면 아무 생각 안 일어나지요. 그러나 사실은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절하면서 자신을 바로 보려고 할 때 비로소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스님께서 절하라고 하신 것은 절 자체에 그 뜻이 있음은 물론이지만 그보다도 이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후퇴하지 않는 신심을 가지라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절을 통하여 신심이 불퇴전이 된다고 하면 이보다 더 큰 가르침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에는 하루에 3천배 하는 사람들도 흔히 있고, 매일 3천배를 몇 달씩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수년씩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하루에 일만배 하는 사람들도 가끔 봅니다. 이처럼 절하며 참회하는 생활을 오래 하면 마침내 지정한 참회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참회인가. 천수경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온갖 죄는 지성없이 마음따라 일어나니
생멸심이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진다.
죄와 마음 없어져서 두가지가 공적하면
이것을 참다운 참회라고 한다.
진정한 참회라 함은 참회한다는 마음까지도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단계는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증발심에 해당합니다. ‘초발심시변성정각’이라 함도 이것을 가르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참회는 진정한 발심과 같은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 보면 발심에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심이 성취하는 발심으로서 시심이 후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알고 실행하는 발심, 셋째는 깨달아 아는 발심인데 이것이 진짜 발심이라고 합니다. 이 기준에서 본다면 3천배 절을 지극하게 하면 신심이 후퇴하지 않는 발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고서 꾸준하고 지극하게 참회하면 마침내 깨닫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때는 반드시 부처님을 만나고 큰스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본래 자리에 돌아가 보면 성인과 현인들이 모두 그곳에 있지 않겠습니까.
시절이 혼탁하면 할수록 불퇴전의 신심과 지극한 발심으로 다 함께 부처님께 다가가기 위해 지심으로 기도하고 지성으로 참회하여 지난날이나 지금이나 또 다가올 날이나 모두 불국토 건설에 매진하고 또 매진해야 합니다. 다 함께 부처님을 뵙고 큰스님을 친견할 때까지 열심히 나아가서 진정한 보살이 됩시다.
변함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오늘을 살아갈 때만이 이 시대의 진정한 불제자요 진실한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 불퇴전의 신심으로 다 함께 성불하십시오.
- 이 글은 1997년 큰스님 열반 4주기를 앞두고 불교방송 라디오 법회 때 사부대중을 위해 하신 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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