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큰스님 추모 기사]
신화 - 그 날의 화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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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 / 1998 년 9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5-29 14:08 / 조회14,040회 / 댓글0건본문
성철 큰스님 열반 20주기 추모 특별기고
올해 12월호까지는 성철 큰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아 각계 인사들께서 써 주셨던 추모의 글을 모아 독자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추모의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각 필자들께서 담아 내 주셨던 추모의 마음을 같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신화 - 그 날의 화엄
박찬(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지난 10월 14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동산방화랑’에서 한 전시회가 열렸다. 젊은 한국화가 김호석의 작품전이었다. 전시회의 제목은 ‘그 날의 화엄’. 바로 성철 스님의 법체 운구행렬과 다비식 장면을 시간대별로, 마치 솔개가 공중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한 화면에 그린 것이었다.
전시작품은 단 한 점. 나머지는 밑그림에 불과했다. 작품의 크기는 높이 3m 65cm, 폭 1m 60cm로 보기 드문 대작이었다. 다비식 직후부터 그리기 시작, 4년여에 걸쳐 그렸다고 한다.
그림은 5년 전 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그 날’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림의 윗부분은 해인사 전경과 백련암을 그렸고, 중간부분은 영결식 뒤 스님의 법체를 다비장으로 옮기는 행렬, 아랫부분은 한창 불길이 타오르는 다비 모습이 그려져 있다. 행렬 주변에는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으로 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1만 명이 넘는 인파가 그려져 있다.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다른 사람의 어깨너머로 행렬을 구경하는 구경꾼이 있고, 언론사의 취재진, 떡이나 컵라면을 파는 장사꾼도 있다. 오소리, 담비, 개, 닭 등 동물도 있고 어른들을 따라와 행렬의 앞뒤로 뛰어다니며 노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성철 스님 입적 5주기를 앞둔 시점에 열린 전시회로 전시장 위치도 조계사와 가까워 스님은 물론 수많은 불자, 일반 관람객들로 전시장은 전시 기간 내내 붐볐다.
93년 11월 8일. 그 무렵 신문, 방송 등 전국의 모든 언론 매체는 성철 스님의 입적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때 스포츠 레저 전문지인 <스포츠서울> 문화부에서 종교 담당 기자로 일하던 나도 스포츠지에 어울리지 않게 1면에 보도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문화관련 기사가 스포츠지의 1면에 나가는 경우는 그 이전이나 후로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휴가원을 냈다. 해인사에 가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런 휴가원에 데스크는 까닭을 묻더니 출장 갈 것을 권했다. 멍텅구리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해인사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해인사에는 이미 프레스센터가 설치돼 있었고, 각 종합지에서는 특별취재팀을 파견해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해인사로 오르는 길은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영결식과 다비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로 꽉 차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올라야 했다. 전국에서 몰려온 비구, 비구니 스님은 물론 불자, 구경꾼, 취재진들로 해인사의 경내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해인사는 더 이상 조용한 산사가 아니었다. 온 국민의 눈길이 쏠려 있는 거대한 문화축제의 현장이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신심 돈독한 불자도 많았지만 단순히 호기심으로 찾아온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오느냐는 둥,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일은 뒤에는 다시없을 것이라며 스님의 법력을 찬양했다.
영결식이 끝나고 다비를 위해 스님의 법체가 다비장으로 옮겨지는 장면 또한 장관이었다. 법체 뒤를 따라 줄지어 다비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밤새 다비장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밤늦게까지 다비장에 있다가 어디선가 새우잠을 자고 꼭두새벽같이 다시 다비장을 찾는 사람들. 다비장 부근 질척거리는 땅바닥에 비닐 따위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들….
스님은 세상에 처음 얼굴을 보이실 때부터 파격적이었다. 80년대 음울한 5공 군사 독재정권시절, 조계종 종정에 취임한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그 유명한 취임 법어를 내리셨다. 아직도 5·18 광주민주화 항쟁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그때의 어둡고 칙칙한 사회,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국민에게 스님의 법어는 청량한 바람이었고 동시에 희망이었다. 때때로 중생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법어로 어두운 세상에 광명을 밝혀 주셨다.
그러나 스님은 종정이면서도 한 번도 세간에 나오지 않으셨고, 친견하려는 사람들에게 먼저 삼천배를 할 것을 요구해 속세의 중생에게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뒤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사화돼 지면을 장식했고 사람들은 그러한 스님을 공경하고 한없이 흠모했다.
스님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따져 무엇하랴. 스님은 다만 ‘그곳’에 계심으로써 중생을 감화시켰다.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고 불자도 아닌 화가에게 다비식 장면을 그리게 하고, 작가에게 소설을 쓰게 하고, 영화를 만들게 하고…. 다만,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대숲을 지나면 댓잎 부딪쳐 소곤거린다
솔밭을 지나면 솔잎 향기로 소곤거린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
달빛 따라 흐르는데
잔잔히 젖은 목소리
냇가에 나가면 졸졸 물소리로 소곤거린다
들에 나가면 스치는 바람으로 소곤거린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말씀-성철 스님의 법어를 생각하며’ 전문
- <월간 해인> 1998년 11월호
性徹 스님을 다시 생각한다
이헌익(중앙일보 문화부장)
‘가야산 금빛 호랑이’ 성철(性徹) 선사 입적 5주기가 돌아온다.
선사는 지난 1993년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해인총림 방장 열반당인 퇴설당에서 법랍 58세, 세수 82세에 걸친, 치열한 수행을 마쳤다. 초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해 법구가 안치된 퇴설당의 빈소는 간소했다. 기억컨대 시자승 두어 명, 국화 꽃바구니 둘, 벽에 걸린 낡은 장삼, 그리고 스님이 쓰던 몽당연필, 편지지, 주장자 하나가 그 방에 있는 전부였다. 그것들이 스님이 남긴 법어와 일화와 ‘전설’을 제외한 유품의 모두였다. 그것은 ‘위로는 불법을 닦고 아래로 중생과 한 몸이 된다(上求菩提下化衆生)’는 수행자 최고의 경지에서 가능한 무소유였다.
다비식은 화려했다. 가야산 한편을 메운 수만의 추모인파가 시립한 가운데 그의 몸은 18시간동안 밤을 새워 타 올라 재가 됐다. 제자스님들의 ‘부질없는’사리수습을 뒤로하고 그는 지수화풍(地水…火風)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철 스님은 그의 ‘전설?’이 아닐 듯하다. 스님이 물리학에도 조예가 있다느니 하는 엉뚱한 과공(過恭)은 그 자체가 비례(非禮)였다. 큰스승이 궁핍한 시대에 그는 몇 안 되는 독보(獨步)였고, 불자이든 아니든 그를 떠나보내는 자리가 그토록 거창했던 이유도 정신적 지도자에 대한 시대적 갈망이었다. 그 궁핍의 상황이 여전한 지금 이제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은 그의 엄혹한 실천적 삶의 방식이다.
그는 스스로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그 자신을 가장 가파른 수행공간에 가두고 평생을 일관했다. 앉아서 잠을 잤다는 장좌불와(長坐不臥) 8년도 그에겐 다만 한때의 바늘자리에 불과했다. 그는 치열했던 삶의 목표와 깨침의 포효, 그리고 어쩌면 회한에 찬 전(全) 수행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출가송, 오도송(悟道頌), 열반송을 통해 이렇게 표현했다.
출가, 오도, 열반송은 한 큰스님의 정신세계의 전모를 엿보게 하는 열쇠다.
스님은 24세 때 기혼의 굴레마저 벗어 던지고 출가하면서 “하늘에 가득한 큰 일도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로다/바다를 뒤덮는 큰 틀도 밝은 햇살 아래 한 방울 이슬이로다/누가 꿈속 같은 세상에 잠깐 나와 꿈만 꾸다 떠나 가랴/만고의 진리를 찾아 나홀로 걸어 가리라”고 했다.
‘하늘에 가득한 큰 일도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彌天大業紅爐雪)’로 여기는 기개를 스님은 반세기가 넘는 수행 뒤 열반하면서 이렇게 바꿔 불렀다.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보다 높구나(彌天罪業過須彌).’ ‘미천 대업’이 ‘미천 죄업’이 된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선지식이 된 스님의 끝없는 자기질타와 구도정신의 이 역설이 바로 그의 가르침의 요체다.
29세 되던 해 스님은 또 대구 팔공산에서 한 소식 크게 듣고 확연대각한 오도송을 읊었다.
“황하의 물은 거슬러 흘러 곤륜산을 뒤덮었다/해와 달도 빛을 잃고 대지는 꺼져 내렸도다/문득 크게 한번 웃고 고개를 돌려 서니/푸른 산은 옛 그대로 흰 구름 가운데 치솟아 있네.”
우주적 혼란 앞에서도 한번 웃고 ‘진리와 해탈의 그곳’청산을 의연히 바라보는(靑山依舊白雲中) 호랑이의 포효였다. 이제 번뇌도 망상도 분별심도 다 사라지고 평상심만이 내 마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반의 자리에서 “평생에 걸쳐 남녀의 무리를 속였으니/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보다 높구나/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도 한이 만 갈래나 되네/(그러나) 한덩이 붉은 해는 푸른 산에 걸려 있다”라고 했다.
이 ‘한 덩이 붉은 해는 푸른 산에 걸려 있다(一輪吐紅掛碧山)’에서 ‘벽산’이 바로 오도송에 나오는 ‘청산’이다.
스님은 ‘나는 지은 죄를 안고 무간지옥에 떨어져 가지만(사실 그는 지옥을 제도하러 갔다) 내가 바라본 푸른 산은 언제나 그대로 거기 있으니 너희들은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또 다른 역설의 큰 가르침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깨침마저 없던 것으로 돌려 버리는 거대한 깨침에 걸맞게 성철 선사는 스스로 호를 퇴옹(退翁)이라 짓고 이를 즐겼다 한다. ‘뒤로 물러나는 늙은이’라는 이 호에 대해 그는 ‘세상 사람들이 앞뒤도 모르면서 앞으로만 가거든. 그러니 내가 물러서야지’라고 설명했다. ‘실로 높아지려면 내려서라’는 하심(下心)이었다. 엄혹한 수행과 하심의 조화, 이것이 오늘날 성철 선사가 우리에게 주는 화두다.
-<중앙일보> 1998년 10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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