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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面石]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 묘엄스님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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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1998 년 6 월 [통권 제10호]  /     /  작성일20-05-27 01:01  /   조회11,04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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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등등한 땡볕을 뒤로 하고 산사(山寺)로 들어서면 언제나 눈보다 마음이 먼저 열린다. 한결 가뿐해진 발걸음을 멈추고 계곡을 타고 내리는 맑은 물소리를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세속의 번뇌도 씻겨 내려간다. 바람 소리와 어우러지는 목탁 소리, 향 내음과 어우러지는 풍경소리, 이 모두 부처님의 그윽한 법문이 아니겠는가. 그 법음과 늘 함께하며 눈 밝고 튼실한 비구니 스님들을 길러내기 위해 오늘도 강의에 열중이신 봉녕사 승가대학의 학장 묘엄스님, 성철스님으로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신 스님, 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언제나 그때의 그 맘으로 살고 계신 스님을 찾아뵙고 세월 속에 묻어둔 귀한 이야기들을 들어봅니다.

 


 

 

풍경 소리가 듣기 좋습니다. 스님께서는 저희 은사스님께 사미니계를 받으신 유일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은사스님을 언제 처음 뵈셨습니까?

 

열 서너 살 때였지요. 어머니께서 편지 한 장을 주시며 중학교 진학 시험 준비를 위해 한 1년간 산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진주에 사는 어떤 처사님과 함께 대승사로 갔습니다. 당시 대승사에는 성철스님과 청담스님 두 분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때는 그저 아버지나 뵙고 좀 쉬었다가 내려갈 요량으로 집을 나섰는데, 문제는 어머니께서 준 편지에 있었습니다. 저야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전혀 모르고 그 편지를 청담스님께 드렸지요. 그런데 그 편지에는 "어떻게든 이 아이를 중을 만들어 달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의 말씀이 적혀 있었던 겁니다. 청담스님은 그 편지를 읽고 저를 성철스님에게 맡기셨나 봅니다.

 

그럼 어머니께서는 소원을 성취하신 거군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군요. 성철스님께서는 저를 앞에 앉히시고는 "너의 아버지와 나와의 사이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하셨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믿으라고 하니 피식 웃음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살아 보면서, 겪어 봐 가면서 믿겠습니다" 했지요. 그러자 성철스님이 "그래, 왜 그러느냐?"고 되물으시더군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요? 아버지도 못 믿는데…"라고 대답을 하자 모두들 웃으시더군요. 그러자 성철스님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지금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주로 인생무상(人生無常)에 대해서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얘기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부처님도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서 한때는 호사스런 생활을 했지만 그런 화려함을 전부 다 버리고 영원한 즐거움〔樂〕을 위해 출가했고, 우리들도 세속에 있으면 국회의원도 하고 사장도 하고 그러겠지만 그런 것을 다 버리고 출가하는 이유는 부처님이 출가하신 이유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생각과 뜻이 같으셨던 청담스님과 성철스님. 1964년 도선사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기초 과정을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셨군요.

 

처음에는 참 이상했지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중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 같고 국회의원이나 사장이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세속에서 벼슬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별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니 얼른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불교라는 게 참 이상한 건가 보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루는 스님께서 저에게 내기를 걸어오셨습니다. "너하고 나하고 말로 주고 받기 시합을 해서 내가 이기면 중이 되고, 네가 이기면 중이 안 되는 걸로 하자." 그런데 제가 지식이나 뭐나 따를 수 있겠습니까? 어린 마음에도 승산이 없는 내기라는 생각이 들었던지 안 한다고 했죠. 그런데 그동안 스님께서 하신 얘기를 곰곰 되새겨보니, 학교 선생님들보다도 아는 게 더 많은 것 같고, 제 귀에도 쏙 들어오는 게 참 마음에 들더라구요. 그래서 "스님이 아는 것을 다 나에게 가르쳐 주면 중이 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다 가르쳐 주기로 약속을 하셨고, 보름 정도 대승사에 머물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각자의 특별활동에 열심인 학인들

 

 

그러면 은사스님은 어떻게 정하셨는지요?

 

보름쯤 지나자 스님께서는 저를 윤필암으로 보내셨습니다. 은사스님 정하는 일은 대중이 하는 일이니 대중이 시키는 대로 은사스님을 정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스님들 중에는 자기 앞으로 논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었는데, 월혜스님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큰절에서도 부처님이 출가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들었으니 월혜스님 앞으로 상좌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두 분 스님께서도 내심 월혜스님 상좌가 되었으면 하셨던가 봅니다. 그런데 제 스스로 월혜스님 상좌가 되겠다고 나서니까 인연이 제대로 됐다고 하시면서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윤필암에서 45년 5월 단오날 삭발을 하고 계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행자 생활이 없었거든요.

 

중학교 진학도 해야 하고 잠시 쉬러 갈 마음으로 가셨는데,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출가할 마음을 내시지 않았습니까. 출가를 결심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스님께서 발원문을 외워오라고 하셨습니다. 한문 실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음을 그대로 따라 외워 봤지만 잘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한번 설명을 들어야 할 줄 알지, 설명을 안 들으니까 도저히 모르겠다"고 했죠. 스님께서는 한번 죽 설명을 해주시고는 남까지 제도하겠다는 중노릇하는 원력이 담긴 발원문의 내용이 어떠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참 좋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주먹으로 알밤을 먹이면서 "기분이 좋은 것 같고는 중노릇 못 한다"고 그러십디다. 저는 "이산혜연 선사가 저보다 먼저 나서 이런 말을 했지만 제가 먼저 났으면 제가 할 소리입니다. 이산혜연 선사가 다 해 버려서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또 꿀밤을 한 방 먹이시고, 그 자리에 계셨던 스님들도 크게 웃으시더라구요. 그러고 나니까 출가를 해야겠구나 하는 결심이 섰습니다.

 

계를 받으실 때를 말씀해 주십시오.

 

윤필암에서 법상을 차려놓고 스님이 오셔서 계를 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내가 절대로 계를 설하고 법상에 올라오는 그런 일을 안 하기로 원력을 세웠는데, 순호스님(청담스님의 다른 이름) 딸이고 하니까 특별히 요번만 계를 설하고 앞으로는 설하지 않겠다. 처음이고 마지막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님께 계를 받았고, 스님께 계를 받은 비구니는 지금까지 저 하나뿐입니다. 스님께서는 큰 종이에 손수 이름을 적어 주셨습니다. 그걸 평생 지니려고 했는데 책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너무 많이 옮겨 다니는 바람에 어느 책에 있는지를 잊어버렸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두 분 큰스님이 수행만 하시다가 처음으로 중을 하나 만들어 보니까 이걸 쓸 만한 물건을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붓글씨는 홍경(弘鏡)스님에게 배우고, 율은 나중에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에게 배웠습니다.

 

 

강원 교재들

 

 

스님, 그때 성철스님께서 무엇무엇을 주로 가르쳐 주셨습니까?

 

다 배웠지요. 지금도 그때 그려주신 역사 도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계를 받고 나서 몇 달 지나지 않아 해방이 되었지요. 사미니계 받고 1년 동안 중 노릇 하면서 스님들께 배웠지요. 그때는 강원이 없었습니다. 비구 강원도 없었지만 비구니 강원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저는 많이 배워서 많이 아는 것이 제 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해방도 됐고 배움에도 소질이 있으니 이대로 두기보다는 진주로 내려가 중고등학교도 다니고 형편만 되면 대학까지 마치고 도로 들어오면 좋지 않겠는가라고들 의논을 하셨던가 봅니다. 그런데 해방된 지 벌써 1년이 지나서 다른 학생들은 그동안 한국 역사를 배웠을 텐데 저는 일본 역사만 배워서 한국 역사를 하나도 몰랐거든요. 그래서 학교 가서 공부하기 위해서 스님께 한국 역사를 배웠습니다. 한번은 평양 이야기가 나와서 정몽주와 개성의 선죽교 이야기를 하시는데 자꾸만 "피양"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도대체 "피양"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스님, 피양이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한문으로 "평양"이라고 쓰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헤이죠요?"라고 했죠. 한문으로 쓴 평양을 일본말로 읽으면 헤이죠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왜놈들이 아들 다 병신 만들어 놨다" 하시더군요. 그런데 스님께서 우리 역사를 죽 말씀하시는데, 그때 제 생각에 "아! 이 스님은 서울대 총장을 하셔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대한 것까지 마치 당신이 보신 것처럼 물 흐르듯이 설명을 하셨어요. 그래서 "스님, 언제 그렇게 책을 많이 보셨어요?"라고 물으니까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니다. 네가 크면 다 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 도표는 칠판처럼 해서 가르쳐 주신 건데, 도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만들어 주셨어요.

 

저희들한테는 책 보지 마라, 잠 자지 마라, 돌아다니지 마라,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스님께는 알고 계신 것을 다 쏟아놓으신 것만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옛날 조사스님들은 뭐든지 다 잘했다, 그리고 전부 경․율․론 삼장에 능했다,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옷은 다 떨어진 것을 입더라도 마음은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등 실질적인 말씀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겨울이 되었는데, 대중이 쓸 식량이 모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 사제인 묘희스님과 점촌으로 탁발을 나갔습니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탁발을 해서 돌아오는데, 다리 밑에서 거지들이 깡통을 걸어 놓고 밥을 하고 있더군요. 그 추운 겨울에 아이들이 맨발인 채로 있는 게 보였어요. 둘이 의논을 했어요. 우리가 수고해서 얻은 거니까 전부 저 거지들 주고 가자구요. 도인행을 실천해 보자구요. 그래서 탁발한 쌀을 전부 깡통에 부어 주고, 양말이며 내복이며 지닌 것 모두 벗어주고 홑적삼에 빈 걸망만 매고 돌아왔지요. 추운 줄도 모르겠고, 그렇게 기분이 상쾌하더군요. 그랬더니 어른 스님들께서 "자기가 구하지 않는다면 남 주어도 좋지만 또 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냥 다 주어서는 안된다"라고 일러주시더군요. 그때는 무얼 하든 부처님 말씀대로, 스님! 말씀대로 했지요.

 

 

약력: 31년 경남 진주 생. 45년 문경 대승사 윤필암에서 득도(은사 월해). 사미니계 수지(계사 성철). 49-56년 동학사에서 전강(강사 경봉). 57년 통도사에서 강원 전강(강사 운허). 58년 통도사에서 구족계 수지(계사 자운). 65-69년 청도 운문사 강원 강주. 79년 - 현재 봉녕사 주석

 

 

저희 은사스님 이야기를 여쭐려면 청담스님 이야기도 여쭈어야 합니다. 그만큼 두 분은 평생의 도반이셨습니다. 두 분이 처음 만나시게 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성철스님이 수덕사에서 계실 때 처음 만나셨다고 합니다. 만공 노스님, 용운스님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오는 기척이 나더랍니다. 그러니까 용운스님이 문구멍으로 내다보시더니 "아, 저 괴각쟁이, 괴각쟁이 온다"고 이러시더랍니다. 스님 마음에 "괴각쟁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인간이 되려는 사람인가 보다" 싶었는데, 보니까 키가 큰 사람이 들어오더랍니다. 만공 노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같이 내려오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괴각쟁이와 괴각쟁이끼리 뜻이 맞더랍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뜻이 맞더라, 라고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사실 두 분은 세속의 나이로 보면 10살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분이 그렇게 평생을 도반으로 지내실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는 처음 만나도 10년 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그렇게 되지요. 두 분은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같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밤을 새면서 이야기해도 다함이 없었겠지요. 대승사에서는 두 분이 해인사에 가서 총림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영산도를 그리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 이 말법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재현을 해보자고 하셨지요. 부처님 당시처럼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속에서 풍기는 것을 남한테 보여줄 수 있는, 말 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이런 중노릇을 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쌍련선원에 앉아서 하셨어요. 저는 윤필암으로 올라가야 하는데도 옆에서 들으니까 하도 재미가 있어서 계속 듣고 있다가 "스님, 근데 왜 비구니 소리는 하나도 안하세요? 비구니원도 하나 넣어 주세요"하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비구총림 안에는 비구니원이 없는 거란다"라고 하시는데, 그때는 어려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죠. 나도 스님들 따라서 공부하고 싶은데 비구니라서 안되는구나 싶으니까 남자 못 된 게 참 후회스러웠지요.

 

 

육화당 대강당의 모습

 

 

말씀 중에 영산도란 무엇인지요.

 

예, 두 분이 얘기를 하는데 무슨 도표 같은 것을 의논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중국 총림의 도표이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율원을 하고, 율원을 하는 데는 누구누구다, 사람도 배치하고 하시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두 분의 뜻이 같았기 때문에 시종에 변화가 없었지 않았느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두 분 스님께서는 대승사에 계실 때부터 우리 불교가 잘 되려면 총림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씀을 벌써 하시고 구체적인 방법도 논의를 하셨군요.

 

그러셨지요. 스님께서는 우리가 총림을 하려면 가사부터 고쳐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런 광목 40통을 사서 양잿물에 적셨다가 뙤약볕이 내리쬐는 법당 앞에 널어서 말려 가지고 물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께서 비구니가 비구 옷을 해주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율장을 딱 펴놓고 "봐라, 여기 부처님이 비구니가 비구를 시봉하는 거는 육친 관계가 있는 사람 아니며는 해 주지 마라 했지 않느냐. 그러니까 비구 옷에 손 대지 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구 스님들이 직접 했는데, 원주스님하고 몇몇 스님이 밤새도록 물을 들였습니다. 처음에 노란 물 들이고, 다음에 빨간 물 들이고, 파란 물 들이고, 삼색괴색으로 들였어요. 가사 색깔이 나도록 몇 번씩 물을 들이고 손으로 주물러서 가마솥에 식초랑 소금 넣고 삶았습니다. 밤새도록 만지는데 비구스님들이 하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하다 하다 안 되니까 한 스님이 새벽 두 시쯤 일꾼을 시켜 지게에 지고 윤필암으로 오셨어요. 그리고는 "철스님 알면 난리 나니까 몰래 살짝 해서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질을 해서 그 이튿날 밤에 살짝 몰래 갖다 드렸지요. 그랬는데! 그게 들통이 나고 말았지요. 스님께서는, 사람이 한집에 살면서 이렇게 하자 했으면 그 뜻을 받들어서 해야 하지 않느냐, 같이 영산회상을 하자고 하고서 이게 무슨 허물이냐 좀 꾸깃꾸깃하고 깔끔하지 않으면 어떠냐, 비구들끼리 한번 해 보자 했으면 끝까지 해야 하지 않느냐, 하시고는 짐을 싸버리셨어요.

 

 

매주에 한번 실시하는 학장스님의 <율> 특강시간

 

 

대승사에 계실 때 이미 삼색괴색 가사를 준비하셨군요. 그럼 장삼은 언제 만들었습니까?

 

장삼은 봉암사에서 만들었습니다. 자운스님께서 직접 송광사까지 가셔서 보조장삼의 치수를 재어 가지고 오셨지요. 그 치수 그대로 해서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장삼이 만들어졌는데, 보조 장삼이라고도 하고 고승이 입었다고 해서 고승 장삼이라고도 했습니다. 백련암에서 수행하던 우리 비구니들이 그 보조 장삼을 제일 먼저 입었습니다.

 

저희 은사스님 보다 한 해 먼저 입적하신 자운스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율사이셨습니다. 봉암사에서도 보살계 법문을 하셨지요.

 

대승사에서 가사불사 회향을 할 때였어요. 그 날 자운스님께서 처음으로 가사불사 공덕 법문을 하셨어요. 성철스님과 청담스님도 자리에 계셨는데, 두 분은 묵언기도 중이셨습니다. 그때 저는 차를 따라 드리는 시중을 들었는데, 청암 노스님께서 율을 연구하시는 스님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잖습니까. 각자의 특기가 있고 전문분야가 있듯이 총림을 만들어서 부처님 당시처럼 재현을 해 보자 하고는 자운스님은 율장을 연구하셨습니다. 봉암사에 가셔서는 대각사에 있던 책들을 전부 가져 와서 연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미니율이나 비구니 계율, 사분율 등의 원고를 써 놓고만 계셨는데, 6․25 무렵 인연을 만나 출판이 됐죠.

 

봉암사에서 결사를 할 때, 비구니 스님들은 백련암에 계시면서 참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화두는 어떻게 타셨습니까?

 

봉암사 백련암에서는 방부를 여섯 명 이상 안 받아 주었습니다. 비좁기도 하고 식량 문제도 있고 해서 여섯 명만 살았습니다. 화두는 성철스님이 직접 주셨는데,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였습니다. 지금 조실스님이 계시는 방에서 열여덟 살 4월 보름에 화두를 탔죠. 스님께서는 일귀하처할 때, "어느 곳으로 돌아간 것이 분명 있어!" 이러시면서 멱살을 쥐고 등줄기를 때리면서 화두를 주셨습니다.

 

봉암사 결사는 오늘날의 한국불교를 존재하게 한 중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사와 장삼을 만들어 입으시고 바루도 만드셨다고 들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만드셨는지요?

 

현실적으로 보면 가사와 장삼은 성공한 겁니다. 부처님 당시처럼 통일이 됐으니까요. 육환장, 삿갓도 다 만들었지요. 여름에 육환장 짚고, 삿갓 쓰고, 삼베 장삼 입고, 걸망 지고 비를 줄줄 맞고 가면 모두 큰스님 오신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 입잖습니까. 어느 날은 스님께서 "우리는 이제 파란 가사 해 볼까? 파란 가사 해 입으면 또 다 따라올거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신 일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철바루는 한 3분의 1쯤 성공했지요. 그때는 양은으로 만든 대접을 네 개씩 해서 바루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사용한 것이 아니고 봉암사 뒷산에서 대나무를 해다가 마당에 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 양은 대접 바루를 전부 엎어 놓습니다. 불을 확 안 붙이고 시커먼 연기가 나도록 은근히 모닥불을 해서 몇 번씩 쏘이면 반들반들해집니다. 연기는 쏘였지만 냄새도 안 나고 잘 벗겨지지도 않고 참 좋아요. 처음에는 도자기로 했는데 무거워서 바루를 들고 먹으면 한숨을 쉬도록 팔이 아팠어요. 그래서 철바루만 먼저 보급하기로 했는데, 많이 퍼지지 않았어요.

 

스님, 봉암사에 계시면서 돈오돈수에 대해서 말씀하신 걸 들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리고 돈오돈수 사상을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들었지요. 스님께서 "돈오돈수뿐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경을 공부하기 이전이고 그저 들은 대로 옮길 정도여서 그런 논리법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법화경』에도 보면, "부처님은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나오셨고, 유유일승(唯有一乘), 오직 일승법만 있고, 그 다음에 무이무삼(無二無三)이라,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중생의 근기가,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8만4천 법문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스님의 주장이 아니라 경전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스님께서도 "내 말이 아니라 경전에 있는 말을 할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스님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돈오돈수는 깨침 그 자체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깨침 자체가 이론법이 아니잖아요. 이론으로써 표현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우리 학인들에게 항상 다음 예를 들어서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일대사인연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나오셨고, 오직 일승법, 자기 부처를 계발하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나오셨다. 그런데 중생들이 그것을 못 알아들으니까 삼승법을 설해서 차차 들어오게끔 했다. 중생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어서 점점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한 마디에 싹 알아듣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8만 4천법이 벌어진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점수 방법을 쓴 것이지 법에점수가 있는 게 아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돈오돈수는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 합니다. 그러면 학인들이 잘 알아 듣습니다.

 

스님께서는 일찍부터 성철스님과 청담스님 가까이 계시면서 오랫동안 지도를 받으셨는데, 두 분이 우리 종단에 끼친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성철스님은 종단 일에 직접 참석을 하거나 활동은 안하셨지만 "참 중은 그래야 마땅하다"는 정신적인 것을 심어 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청담스님은 직접 활동을 하시면서 몸소 실천을 해서 "나는 이렇게 한다"는 원력과 행동까지도 다 보여 주셨습니다. 두 분 스님이 처음에 저보고 "둘의 사이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다" 하신 것처럼 두 분의 생각이 같으셨다고 봅니다. 두 분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어떤 때는 사흘씩 자지도 않고 이야기를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분은 정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우리 종단이나 전국 승려에게 "중노릇이 무엇이다"라는 것을 심어주고 보여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봉녕사 입구에 있는 돌

 

 

저희 은사스님이 떠나신 지도 벌써 다섯 해가 됩니다. 스님께서 마음에 담고 계신 스님의 가르침의 진수랄까 그런 것이 있으실 텐데, 한 말씀 해 주시죠.

 

스님께서는 인생무상을 철저하게 느끼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이 무상하고 육신이 내가 아니라는 이 생각이 마음속에 없으면 중간에 변하기 쉽다면서 만날 때마다 철저하게 느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야 죽을 때까지 변동이 없이 중노릇을 할 수가 있다는 그런 말씀 많이 하셨습니다. 검소하게 지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또 부처님이 되려고 모두 출가를 했으니 부처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걸 확실히 알면 처음 생각을 끝까지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발심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죠. 부처님 말씀은 무조건 믿어야 된다는 것, 자기 지식을 가지고 틀렸다 옳다 하지 말라는 그런 말씀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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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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