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面石]
도우스님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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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1997 년 6 월 [통권 제6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10,094회 / 댓글0건본문
오랫만에 도선사 비탈진 산길을 오른다. 시시각각 짙음을 더해가는 초록의 나뭇잎들은 5월의 눈부신 아침 햇살과 미풍에 살짝 속살을 드러내고, 도심을 벗어난 계곡의 맑은 물소리가 소음에 찌든 귀를 맑게 씻어준다. 송글송글 맺히는 이마의 땀을 씻어내며 고개를 드니 하늘의 별처럼 빼곡히 들어선 연등의 물결에 숨이 멎는 듯하다.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 저 많은 등불이 저마다의 염원을 담고 저 마다의 무명(無明)을 밝혔으리니, 아마도 북한산 전체가 한 송이 연꽃으로 환하게 피어올랐으리라. 불면석을 통해 큰스님과 인연이 깊으신 산중 어른스님들을 찾아뵙고 인연기를 채록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거듭 확인되고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지만 도선사 선원장으로 주석하고 계시는 도우스님께서는 큰스님의 행장을 마치 연표처럼 기억하고 계셔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스님 방을 나올 무렵, 하루같이 도우스님의 꽃 공양을 받고 계시는 액자 속의 큰스님이 빙긋이 웃고 계셨다.
손님과의 접견도 뒤로 미루고 많은 시간을 내어주신 스님께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처음 성철스님을 뵈신 것이 언제였는지, 그 시절부터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큰스님 처음 뵌 이야기를 할려면 내 출가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요. 나는 13살에 상주 남장사로 입산을 하였지요. 김용사 강원에서 <원각경>을 보다가 “중생이 본래 청정하다”는 대목에 마음이 걸려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화엄경>을 보던 중 “중생과 부처가 차별이 없다”고 하는 데서 더욱 의심이 쌓이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깨닫는 길은 오직 마음을 깨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임오년(1942년) 여름을 직지사 천불선원(千佛禪院)에 방부를 들이고 ‘이뭣고’ 화두를 오나가나 참구하였습니다. 해제를 하고 여기저기 들러 겨울살림을 날려고 정암사를 갔는데 겨울을 지낼 형편이 안 되어 서울 선학원엘 오게 되었지요. 거기서 처음 청담스님을 뵙고 동안거 얘기를 하자 속리산 복천암으로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래 청담스님을 모시고 복천암으로 가서 방부를 들이고 생식을 하면서 지냈지요. 겨울을 나고 계미년 봄이 되니까 큰스님이 간월도에서 겨울을 지내고 오셨습니다. 큰스님과 청담스님은 이미 그 전 가을에 서울에서 만나서 함께 정진하자고 약속을 하고는 청담스님은 복천암으로 큰스님은 간월도로 가셨던 것입니다. 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눈동자에서 밝은 빛이 나고 아는 것도 많으시고 참 명랑하셨습니다.
계미년이면 1943년이지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전시동원령을 내리고 산간벽지의 살림살이까지 마구잡이로 쓸어갔지 않습니까. 당시의 절 살림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야 말로 다할 수 없지요. 당시 복천암에도 양식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밥이라고 주는데 어찌나 보잘것없던지 그걸 먹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원주를 맡은 스님이 곡차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몰래 술을 해 먹더군요. 우리는 보잘것없는 밥을 먹느니 차라리 생식을 하는 게 낫다고 하고, 생식을 하였습니다. 청담스님, 성철스님, 돌아가신 영천스님, 나와 또 한 스님 이렇게 다섯이서 쌀 두 홉을 타다가 갈아서 들깨를 넣고 하루에 물 세 그릇씩 먹으면서 정진을 했습니다. 따로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까. 하루는 청담스님이 큰절에서 재무를 보고 있는 벽산스님에게 가서 “선방을 할려고 하면 이래서는 정말 안 되니 뭐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상의를 했지요. 재무스님은 청담스님 의견을 받아들여 그 노장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청담스님이 복천암 선방을 완전히 인수하셨지요. 하루는 하안거 준비를 하면서 방을 짜는데, 살림 맡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아 누가 원주 살림하려고 출가했겠습니까. 살림 맡을 사람이 없으니까 청담스님이 수도암에 있는 한 스님을 청해오기로 하고는 청담스님이 갔다 오시기로 했지요.
당시 청담스님께서 일본인들로부터 감시를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혹독한 고초를 치르셨습니다. 청담스님께서 원주 맡을 사람을 찾아서 수도암을 다녀와서 사월 초파일을 보냈는데 갑자기 형사대가 들이닥쳐 스님 걸망뿐 아니라 모든 물건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스님을 연행해 가버렸어요. 처음에는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가 나중에서야 상주 경찰서인 줄 알았어요. 예전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을 숨겨준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붙들려서 숨어 있던 장소를 대라고 닦아세우니까 청담스님이 있는 곳에서 몸을 숨겼다고 자백을 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요시찰 인물로 주시를 하고 있다가 연행해 간 게지요. 그렇게 되니 절은 주인도 없고 원주도 없고 살림이 엉망이 되었지요. 그러자 큰스님께서 “내가 중 돼 가지고 공양주를 한 번도 안 해 봤으니 내가 한번 해보지요” 하며 공양주를 자청하셨어요. 큰스님께서 생식을 하면서 공양주 열흘 하기는 복천암이 처음일 겁니다. 그런데 참말로 큰스님께서 공양주를 하시는 동안, 공양간에 살 한 톨도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용성스님의 법제자인 조금포 스님도 “나도 해야지” 하며 또 한 열흘하고 이래저래 여름을 났지요. 청담스님이 붙잡혀 간 지 한참이 지나서 상주 피병사에서 엽서가 날아왔어요. 청담스님도 생식을 하다 갔으니 먹을 것도 마땅치 않았을 테고, 변소 청소 등등을 하다가 이질이 걸렸든가 봅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질이라면 질겁을 하거든요. 그런데다가 다 죽게 되니까 피병사에 갔다 버린 거죠. 거기서 청담스님이 엽서를 띄운 겁니다. 나는 즉시 옷가지와 약, 들깨, 약간의 돈을 준비해서 상주 포교당으로 갔어요. 산에 가서 솔잎을 따다가 즙을 짜고 신도 집에 가서 설탕을 구해다 드렸죠. 한 사나흘 드시니까 건강을 회복하셨고, 복천암으로 가라 하시기에 장사 시달림과 염불로 받은 20원 가운데 10원은 스님께 드리고 나머지로는 수박과 참외를 사서 짐꾼에게 지우고 10일 만에 복천암으로 돌아와 큰스님게 경과보고를 하였습니다.
복천암에서 여름 해제를 하시고는 거처를 옮기셨습니까?
여름해제를 하고는 복천암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상주 포교당으로 갔습니다. 마침 청담스님의 주거가 상주 포교당으로 정해져 버렸거든요. 거기서 두 분이 반갑게 해후를 하고, 우리는 짐을 그곳에 놔두고 사불산 대승사로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거기도 양식이 모자라 선방을 못한다고 합디다. 그래 다시 상주 포교당으로 와서 하루 밤을 자고 걸망 짊어지고 버스 타고 해평 와서 도리사로 갔습니다. 마침 서종수스님과 청암사에 있던 장수스님 두 분이 계셔서 거기에 방부를 들이고 겨울을 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선원 생활로 보면 이해가 선뜻 가지 않습니다만 당시는 한 철을 제대로 나기가 꽤나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지요. 경제적인 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일제의 징집 통지서는 선불장(選佛場)에도 어김없이 날아왔습니다. 큰스님을 기준으로 청담스님이 10살 위고 내가 10살 아래로 23살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징집을 피해 선방생활을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도리사에서 동안거를 보내고 갑신년(1944년) 설을 쇠는데, 선방을 폐쇄해 버려 큰스님은 당분간 계시기로 하고 나는 묘향산으로 갔습니다. 묘향산에 가서 부전을 보면서 희종스님하고 축성전에서 여름을 났지요. 부전을 보니까 돈이 조금 생기길래 어디를 가시든 여비가 필요할 것 같아 편지 안에 돈 10원을 넣어서 큰스님께 부쳤습니다. 쌀 한 말이 3, 4원이었으니까 적은 돈은 아니었어요. 당시 큰스님에게는 신도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돈이 나올 데라고는 전혀 없었어요. 나중에 안 일지만, 청담스님이 거주제한이 풀리자 상주 포교당에서 사불산 대승사로 옮기고는 큰스님에게 편지를 내어 대승사로 오라고 하셨던가 봅니다. 나도 여름 해제를 하고는 금강산을 두루 다녀 두 분이 계시는 대승사로 갔지요. 대승사 암자인 묘적암에서 공양주를 하면서 동안거를 났지요.
대승사에서 공양주를 하시면서 더 기억에 남는 일은 없으신지요?
참 세월이 오래되었습니다. 큰스님은 항시 서늘한 것을 좋아하셨어요. 그러다보니 한 겨울에 감기가 들면 잘 낫지도 않으시고 게다가 드러눕는 일이 없으니 한기를 막을려고 이불을 있는 대로 쌓아두곤 했지요. 그런데 하루는 원주가 면에서 나온 징집통지서를 가지고 올라오더군요. 그래서 또 두 분 스님과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 큰스님은 대승사 사적비 있는 데까지 전송을 나오셨어요. 잘 모면하여 해방이 되거든 같이 살자고 하시는데, 앞일을 모르니 눈물이 핑 돌 더군요. 지금도 스님과 작별하면서 눈물 흘리며 걸망지고 나오던 일이 생생합니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가슴 아픈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특히 불교는 일제 36년의 치욕과 더불어 더 심한 질곡의 세월을 건너와야 했다고 봅니다. 스님께서도 일제의 징집을 피해 개인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으셨군요?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시절 젊은 사람들에게는 예외가 없는 일이었지요. 그렇게 작별을 하고는 상주 남장사에 와서 영산전을 맡아서 한두 달 살았는데 또 면에서 통지서가 날아와 갑장사 금봉(錦峰)스님 처소로 피신을 했는데, 거기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날 상주 시내로 내려와 남장사 스님과 함께 임시로 태극기를 만들어 상주 읍내가 떠나가라고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동안의 울분을 확 풀었지요.
해방 이후 불교계 안팎에는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전국불교도대회를 비롯하여 왜색불교를 청산하기 위한 불교 혁신운동이 곳곳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르지 않았습니까?
해방을 전후로 한 정국을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고 큰스님과 관련된 일만 짚고 가는 것이 좋을 듯 하군요. 그러니까 중앙에 새롭게 조계종 총무원이 구성되면서 일본의 31본말사 제도를 폐지하는 등 갖가지 혁신의 물결이 몰아칠 때, 전국적으로 총림을 여는데 해인사도 효봉스님을 방장으로 가야총림을 연다고 하더군요. 당시 청담스님은 홍경, 종수스님 등과 봉암사에 계셨고, 큰스님은 석암스님과 성전에 계셨습니다. 봉암사 대중들은 사다 놓은 큰 목간통을 걸어 보지도 못하고 짐을 싸 짊어지고는 해인사로 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대구수창국민학교 앞에서 큰스님과 만나서는 트럭을 한 대 빌려 타고 해인사로 갔습니다. 총림에 관한 일을 논의하기 위해 우리 쪽 대표로는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나가고 해인사측에서는 종단을 대표해서 최범술 씨와 해인사 주지인 임환경스님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총림을 하려면 재정이 제일 문제인데 타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큰스님은 여기에 휩쓸려 봐야 공부도 잘 안되니 모든 걸 청담스님에게 맡기기로 하고 큰스님과 나는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 하안거 방부를 들였지요. 아마도 큰스님이 생각하시는 총림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던 것 같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살림 중에도 좋은 토굴이 있는지 둘러보고 오라고 해서 보길도로 해서 해남 달마산 미황사까지 가서 거기다 육환장을 맡겨놓고 왔는데…. 그 사이 김범룡 처사로부터 불서기증을 약속받고 해제를 하면 봉암사로 가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장경각 서고에 보관중인 불서를 기증한 김범룡 거사의 일을 말씀하시는군요. 어떤 인연으로 그 책이 스님께 오게 되었습니까?
큰스님과 청담스님이 대승사에 계실 때 김낙순이라는 이가 주지였는데, 김범룡 씨와는 인척간이 되는가 봅니다. 원래 김 거사는 고향인 충주에서도 8백석지기 부자였어요. 이 분은 물론 윗대부터 불경을 좋아해서 아주 많은 불서를 모아 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있어 보니 별 효용이 없어 ‘좋은 스님 계시면 이 책을 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김낙순 씨에게 조언을 구했던가 봅니다. 김낙순 씨는 두 분 스님을 떠올리고 “훌륭한 스님이 계신다”고 하니 “그럼, 그 스님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여 김낙순 씨가 조계종 총무부장으로 있는 최범술 씨에게 연락을 하고, 최범술 씨는 해인사 청담스님에게 연락을 하고, 청담스님은 양산 내원사에 계신 큰스님에게 편지를 낸 거죠. 큰스님은 “앞으로 총림을 하려면 책이 꼭 필요하다” 하시고는 청담스님과 대구에서 만나 서울 김 거사 집으로 갔지요. 김 거사는 세검정 밖에 있는 자신의 밭에 창고를 만들어 책을 소개시켜 두었는데, 목록을 살펴보니 신수장경을 비롯하여 종경논문, 선종사서 등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책들이었습니다. 또 대나무로 된 경판들도 많았는데, 그건 청담스님이 해인사로 가져가기로 했지요. 불서는 해제를 하면 가져가기로 했는데, 그렇다면 어디로 가져가느냐가 문제였답니다. 청담스님께서 봉암사에 살아보니 수좌들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라 하여 해제를 하면 봉암사로 가기로 했다고 하시더군요. 외호는 당시 내원사 주지이던 우봉스님이 맡기로 했다고 하길래 원주는 제가 맡았습니다.
저희들은 봉암사에 계실 때 책을 기증받으신 줄 알았습니다. 해제 후 어떻게 책을 옮기셨습니까?
해제하고 책을 가지러 서울에 올라왔지요. 그때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었으니 자운스님에게 책을 옮겨갈 수 있도록 화주를 부탁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두말 않고 화주를 해주셨어요. 돈을 들고 세검정을 찾아가 열쇠를 받아서 책 창고를 열고 목록과 맞춰보니 어찌된 일인지 신수장경 세 권이 비지 않습니까. 이 세 권을 찾지 않으면 이 책은 병신이라고 생각하고 인사동 헌 책방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한 집에서 마포에 사는 사람이 신수장경 세 권을 사갔다는 기록이 있어 큰스님과 전차를 타고 그 집을 찾아갔어요. 가서 보니 제법 살 만한 집이더군요.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 분도 두말 않고 책을 돌려주더군요. 돈도 받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직접 리어카를 끌고 가서 포장을 해서 봉암사로 보냈지요. 책은 봉암사로 보내고 경판은 해인사로 보내고.
봉암사 결사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집중적인 조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봉암사를 이끌었던 사상과 신념은 무엇이었는지, 우리 불교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적․학문적 평가야 학자들 몫이고, 실제 그 속에서 실참실구했던 우리로서는 다른 말은 필요 없고 바로 “부처님 법대로 살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봅니다. 우선 큰스님께서는 총림을 이루고 살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하며 중국총림 법도 좋지만 우리 실정에 맞는 규칙, 즉 공주규약을 만드셨습니다. 우선 아침은 항상 죽으로 시작하고, 점심은 대중공양을 하고, 저녁은 약석(藥石)이라 하여 바루떼 펴지 않고 뒷방에서 간단하게 하였습니다. 바루도 부처님 당시처럼 목바루를 깨버리고 철발우나 와바루를 사용하였지요. 사실 해방 후라고는 해도 아직 비구와 대처의 복장이 구별이 없는데다가 붉은 비단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비단가사 대신 면가사로 하되 율장의 규정대로 3종 괴색으로 염색을 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작업 행각할 때는 가사장삼 대신 당나라 때 측천무후가 선종스님들에게만 입도록 했다는 오조괘락을 입었습니다. 또 범망경에 현토를 달아 자운스님께서 전계사가 되어 보살계를 설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포살을 하고, 아침에는 능엄주와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하였지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 노소를 막론하고 하루 나무 두 짐은 꼭 해야 했고, 절 안에서 생활할 때도 반드시 가사와 장삼을 입어야 하고, 외출할 때는 두 사람이 함께 다니되 가사장삼을 수하고 육환장을 집고 삿갓을 쓰고 출입을 했습니다. 이렇게 총림의 기틀이 잡혀갈 즈음, 해인사에서 고군분투하시던 청담스님이 봄에 오셔서 합류하시게 되니, 두 분이 마음을 합해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봉암사의 생활은 왜곡된 한국불교가 제 모습을 되찾는 시기였으며, 현재 조계종의 기틀이 여기서 다 정립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큰스님의 하루 일과와 수좌 지도방법은 어떠하셨습니까?
큰스님은 봉암사에서도 계속 생식을 하셨습니다. 쌀 두 홉을 물에 담가 두었다가 일체 간도 안하고 찬도 없이 드셨어요. 그리고 청담스님과 같이 큰방살림을 하셨는데, 이불을 펴거나 목침을 베고 주무시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세속인들은 큰스님이 언제 어디서 장좌불와를 하셨는가 하며 서로 손가락을 헤아리며 8년이 맞다 10년이 맞다 하는데 누가 나 장좌불와한다 공표하고 합니까. 그게 다 장좌불와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큰스님은 수좌들을 지도하시는 데는 엄격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마음 속 저 밑바닥에 있는 티끌만한 자존심까지 확 뒤집어버리셨죠. 사실 엄격함과 매서움은 자비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녁에 앉아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큰스님이 오셔서 물음에 답을 못하면 멱살을 쥐고 방망이로 막 두드렸습니다. 나도 몇 번 맞았지요. 그게 다 분심을 일으켜서 더욱 정진하라는 다그침이지요.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수행을 하고 계실 때, 사회에서는 이념의 갈등으로 서로를 할퀴고 죽이는 형국이었는데, 희양산 골짜기도 예외는 아니었겠지요?
호사다마라고 할까요, 청담스님도 합세하여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는데, 왠지 심상치 않은 일들이 그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가끔 일어났어요. 큰스님께서는 우선 책을 월내리 묘관음사로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동리 이장이 염불암 골짜기에 있는 공비들이 마을로 내려와서 식량을 약탈해 가서 경찰서에 신고하고 올라오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큰스님을 모시고 함창으로 나왔는데, 그 사이 공비가 들이닥쳐 식량하려고 깎아 놓은 곶감을 몽땅 가져가고 원주를 보던 보경스님을 인민재판에 부쳐 처형해야 한다며 잡아갈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때 청담스님께서 간곡하고 자비로운 법문으로 두목을 설득하여 보경스님은 총살형을 면할 수 있었지요.
이야기를 건너뛰어 통영 안정사에 지으셨다는 토굴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얼마 전에 가 보니 찔레꽃만 무성하고 아무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담으로 쌓았음직한 돌담만이 자취를 느끼게 하더군요?
고성 문수암에서 6,25를 지내고 큰스님은 은봉암으로 가셨는데, 그때도 신도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은 하나 없고 게다가 대처승 절이니 뒷바라지 해 줄 사람이 없지요. 그때 문일조라는 분이 고봉스님의 추천을 받아 은봉암으로 큰스님을 찾아왔어요. “공부를 하려고 왔습니다” 하니 “그러면 저 계단 끄트머리에 똑바로 서 봐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답니다. 마치 혜가스님이 눈 속에서 법을 구했듯, 꼬박 24시간을 서 있고 나서야 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죠. 이래저래 하다 보니 대처승 식구보다 스님 식구들이 많아지니 토굴 이야기가 나와 문일조가 큰절에 내려가 토굴을 하나 짖겠다고 주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천제암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때 인홍스님의 인도로 몇 명의 신도들이 출입을 하게 되었죠. 나는 우연히 문일조 스님과 마주쳐서 천제굴로 가게 되었고, 미장이 불러다 흙 이겨 가며 초가를 이은 세 칸짜리 토굴을 함께 짓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평소에 스님 모시면서 보면, 누가 오면 어떻게든 이 사람을 설득해서 불교를 믿게 하려고 하시고 또 출가할 듯싶으면 밤낮없이 설득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성철스님의 어떤 점이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또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성철스님께서 처음 대중 법문을 하신 것은, 파계사 성전에서 10년 토굴생활을 마치고 나오셔서 김용사 계실 때였습니다. 봉암사 계실 때도 일체의 상당법문이 없이 함께 정진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인 대중법문은 김용사라고 봐야 합니다. 그때 나는 도리사 주지로 있었는데, 주지를 하면서 육조단경 강의를 1주일 듣고 1주일은 용맹정진을 했지요. 육조단경 강의를 처음 들었는데, 교가 쪽 사람이 하는 법문하고 도를 깨친 선지식이 하는 법문하고는 천양지차라, 설명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치는데, 마치 폭포수가 내리꽂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은 선지식의 말씀이기 때문에 가타부타할 필요가 없는 게죠.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기틀이 마련된 봉암사 결사.
그 결의와 역사적 자취가 이 봉암사 삼층석탑에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하다.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스님께서 지내오신 세월이 바로 우리 현대 불교사의 장면들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합니다. 끝으로 성철스님과의 인연을 한마다로 부탁드립니다.
큰스님은 법에 있어서는 고불고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태고스님이나 나옹스님 이후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문 하나를 봐도 완전히 불조에 계합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하든 근래의 명안종사로서는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믿습니다. 제 자신 개인적으로는 은혜를 입은 큰스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마음 가운데 일성종자를 심어준 성철스님께 매일 꽃 공양을 올리고 있습니다.
스님, 오랜 시간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과문>
불기 2540년 가을호 불면석 대담 내용 가운데 세 분 큰스님들 사이의 격의 없는 우의를 표현한다는 것이 청담 큰스님 문도들과 자운 큰스님 문도들에게 본의 아니게 누를 끼친 점에 대해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관스님과 동광스님을 찾아뵙고 참회를 올렸습니다. 문도스님들에게 너그러이 용서를 빕니다. 앞으로 세 분 큰스님들을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불면석 대담 내용의 정리 책임은 고경 편집자에게 있음을 밝히고, 대담스님들에게 큰 누를 끼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겠습니다. - 원택 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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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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