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노래]
스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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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 1997 년 3 월 [통권 제5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11,230회 / 댓글0건본문
고백합니다. 스님 살아생전에 제가 백련암에 내려가지 않은 것은 법당에 들어가 삼천배 하기가 겁이 나서였습니다. 스님을 뵙고 싶었지만 바로 그런 두려움이 장애였던 것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겁쟁이인 제가 후회스럽고 그때나 지금이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불전 삼천배(佛前三千拜).

스님께서는 누구라도, 대통령이든 힘없는 무지렁이든 스님을 만나고 싶어 한 사람에게 ‘삼천배’를 먼저 시켰다지요. 그래서 스님이 가시고 난 지금의 불가(佛家)에서는 그 ‘불전 삼천배’가 친숙한 화두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화두 하면 중국 선종의 것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스님께서 한국식 자존의 화두 하나를 남기신 셈이지요.
스님, 그런데도 저는 참 지독한 게으름뱅이입니다. 가을이 깊어 백련암의 단풍이 절정이었던 스님의 열반 3주기 때였습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백련암에서 며칠을 보내기 위해 찾아갔지요. 암자로 가는 언덕을 오르면서 문득 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우리 속담을 떠올려보고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스님을 생전에 뵙지 못하고 이제야, 그것도 열반 3주기 때에야 암자로 가고 있는 제가 한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성철스님.
그러나 저는 때가 늦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변명이 아니라 당신께서 암자 어디엔가 계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고심원(古心院)의 당신 존상(尊像)이나 초상(肖像)보다도 더 따뜻하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계실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제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요. 동행하고 있는 제 아내에게도 비밀로 하였습니다.
관음전 앞에서 원주스님의 안내로 개량 승복을 받아 입고 난 뒤, 마침내 아내가 몹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당신도 삼천배 해요. 여기 오신 신도님들도 다 삼천배 하고 있잖아요. 더구나 당신은 성철스님을 소설로 쓰려는 작가 아니예요.”
“내 삼천배는 좀 달라. 법당에서 삼천배 하는 것만 삼천배인가.”
“당신 삼천배는 뭔데요?”
“글쟁이의 삼천배는 원고지를 한 장 한 장 피를 짜듯 써나가는거요.”
할 수 없이 아내는 나의 동참을 포기하고 고심원에서 혼자 삼천배를 시작하더군요. 나중에 아내가 밝힌 것이지만 그렇게라도 대신 삼천배를 해줘야 성철스님께서 남편인 저를 만나줄 것 같아서였다고 합니다.

스님, 그때부터 저는 스님을 뵙기 위해 암자 안을 두루 형사처럼 샅샅이 살피고 돌아다녔습니다. 맨 먼저 만난 사람은 김노인이었습니다. 저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스님은 3년 전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암자의 일꾼인 김노인의 마음속에서도 살아계셨던 것입니다. 웃을 때 수줍은 처녀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는 올해 73세의 김광지(金光之) 노인 말입니다.
성철스님.
김노인의 얘기를 들어 안 사실입니다만 김노인에게는 ‘삼천배’를 시키지 않았다면서요. 그냥 법당 앞에서 합장만 하라고 시키셨다는데, 저는 그 순간 바로 ‘삼천배’의 뜻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한배를 하든 삼천배를 하든 청정한 마음이면 그만이지 절의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김노인이 암자에 올라와 일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50세였을 때였다고 하지요. 당시 고심원 이층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나무를 때던 시절이어서 김노인도 나무를 하는 게 일과였다면서요.
스님께서는 김노인의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아두고서는 이렇게 제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김노인, 니 머리 깎아라.”
김노인이 아내와 자식이 있다고 반대를 하자, 이번에는 다른 일꾼에게는 품삵을 주면서도 김노인에게는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부문에서 김노인은 “아마도 큰시님께서 저를 붙들어 맬라코 그란 것 같심니더” 하고 말하더군요. 저도 그렇게 믿어졌습니다. 이 부문에서도 저는 세속에 잘못 전해지고 있는 소문 하나를 지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엘리트들만 상좌로 받아들인다는 스님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었습니다.
품삵을 주지 않으면서도 묶어두려 하셨던 것을 보면 스님께서는 김노인의 티 없는 심성을 보았고 믿었던 것이리라 여겨집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학벌도 소용없고 ‘삼천배’도 필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어느 날인가는 스님께서 김노인의 귀를 잡아당기며 비밀을 하나 털어놓을 정도였으니까요.
“니하고 내하고 한 얘기는 비밀인기라.”
“네.”
“쓰고 남은 장작은 저 숲속에 두그래이.”
“어디에 쓸려코 그럽니꺼?”
“내 죽으면 화장할 나무인기라, 알겠어.”
김노인은 바로 그날부터 숲속에 나무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려 10년이나 장작을 모았기 때문에 막상 스님의 다비식 때는 몇 트럭 분의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김노인이 스님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열반하기 얼마 전 금강굴에서였다고 합니다. 금강굴에서 무를 뽑아달라는 부름이 있었는데, 그때 스님께서 당부 아닌 당부를 하셨다고 합니다.
“김노인 니 밥 많이 묵고 오래 살그래이.”
그날 이후, 스님께서 다시 한 번 더 꿈속에 나타나셨다고 김노인이 말합니다. 평소 30년째 입던 누더기를 입고, 목에는 염주를 걸고 걸어오시더랍니다.
“아이고, 큰시님.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시지 그랍니꺼?”
“뭐라카노! 내 옷이 없어 안 입는 줄 아나.”
화를 내더니 다시 부드러운 말로 이렇게 말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김노인, 니가 암자에 오래 있어 주니 참 좋다. 앞으로 니한테 좋은 일이 있을기다.”
스님, 그렇습니다. 김노인처럼 스님이 가신 뒤에도 암자에 남아 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백련암 언덕을 오르내리는 마음이 바로 ‘불전 삼천배’를 시키셨던 스님의 뜻 중의 하나가 아닙니까.
열반 3주기를 맞이한 기도주간이었으므로 하루 종일 고심원에서는 창불(唱佛)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신도들은 힘이 없어 삼천배를 중도에 포기한 분들도 계셨지만 제 눈에는 흠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부도를 냈다”고 안타까워하는 바로 그 마음이 청정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할머니 한 분이 “그게 무슨 부돈가. 나중에 해서 갚으면 되제” 하는 위로의 말도 저의 귀에는 참으로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그 분들의 마음속에 살아계신 스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철스님.
아내가 고심원에서 삼천오백배를 끝내고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에 부축해 달라고 하자, 그때 제가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 같은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습니까.
‘삼천배에서 오백배를 더했으니 오백배는 나를 빌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를 쓰고 그냥 무임승차하려는 저를 스님께서 생전에 보셨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저는 방망이로 죽도록 맞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스님,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중생입니다. 죄송합니다.
정찬주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한국문학」 신인상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함. 창작집 <새들은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장편소설 <소설 유마경>(전 3권) 산문집 <마음의 바리때> 등을 발간. 현재 사단법인 샘터사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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