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및 특별기고]
본분종사로서의 삶과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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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융스님 / 1997 년 3 월 [통권 제5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8,507회 / 댓글0건본문
올해는 입춘이 설 앞에 든 탓인지 해제하는 날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지가 않고 오히려 봄날의 따사로움을 완연히 느끼게 한다. 해제(解制) 날 보면, 정진대중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걸망을 짊어지고 나가버리고 나면 선원은 적막감이 감돌 만큼 조용하고도 한가롭다. 다음 한 철의 공부처소를 정하기 위하여 다른 선원에 방부를 드리러 가는 인원이 대부분으로서, 전국 선원이 이제는 한집 살림처럼 되어서 해제 다음날인 음력 열여셋날 오후 두시부터 1주일 사이에 제방의 선원이 함께 방부의 대강을 확정 짓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살았던 도량에 방부를 결정짓고 난 대중이라도 은사스님이나 선지식 스님을 찾아뵙기도 하고, 더러는 유수한 도량에 기도를 하기 위하여 떠나는 것인데, 어쨌거나 해제를 하여 남들은 다 나가는데 혼자만이 남아 있는 일은 어색한 것이 되게 마련이어서 일단 걸망을 지고 동구 밖까지라도 한 바퀴 돌고 오는 것이 인사가 되는 것이다.
사진1. 해인사 선원에서 방장실 시자로 20여 년 성철스님을 모신 원융스님(왼쪽에서 두번째). 일타스님, 성철 큰스님, 법전스님을 모시고 걸어나오고 있다.
큰절 선원에서 방장실 시자로서 스님을 모시다 보니 20여 년을 해인사를 떠나지 않고 살다가 오랫만에 바깥 선원에서 안거를 마치고 백련암에 돌아와 스님의 영당(影堂)에 참배를 하고 형제스님들과 얼굴을 맞대고 한 철 살았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 가신 지 어느 새 삼년이 지난 지금에 스님께서는 항상 곁에 계시면서 언제라도 꾸중을 내리실 것 같은 든든한 마음이다가도 이제는 산중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허전한 마음과 함께 스님이 보고 싶어진다.
지난 가을 부산에서 스님의 모습을 김호석 화백의 수묵화에 담아가지고 다시 살펴보는 모임을 갖고 대중 앞에 스님의 수행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어려운 선이론이나 본격적인 공부 이야기보다는 육조대사와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의 개산조인 관산혜현(關山慧玄) 선사의 행리를 예로 들어서 스님의 본분종사로서의 삶과 수행의 단면상을 비추어 이야기한 바가 있다.
스님께서는 평소 출입을 자제하시고 사람 대하는 일을 몹시 제한해 오신 결과, 결국 열반을 기점으로 해서 그 봇물이 터지듯이 ‘성철스님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쇄도하였다. 이는 스님의 수행과 도덕의 결과라고 보아야 옳겠으나, 뒷날 사람들은 스님을 한마디로 어떤 스님이었다고 부를 것인가? 일반적으로 큰스님을 지칭하는 말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대선사(大禪師)라는 칭호는 선원에서 평생 동안 선수행을 하여 본분사(本分事)를 체달한 선지식 스님을 두고 일컫는 이름이고, 종단의 법계(法階)로서는 대종사(大宗師)로 부르기도 한다. 산중의 총림에서는 방장이셨고, 종단에서는 종정으로서 대중의 지도자의 위치에 계셨지만, 스님에게는 평생 살아오신 모습으로 보아 역시 본분종사(本分宗師)라는 칭호가 가장 알맞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본분종사라는 칭호는 일반적으로 불자들 사이에서도 쉽게 쓰이는 용어는 아니다. 선문(禪門)에서 대선사가 참선법(參禪法)의 도리로써 학자를 제접하고 후학을 다스리는 순수한 면모를 지칭할 때 비로소 본분종사라는 단어를 쓴다. 선문에는 본분이라는 말과 연관된 용어들이 많다. 본분도리, 본분납자, 본분종사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본분종사란, 우리 인간이 본래로 지닌 본래모습 그대로를 체달하여 중생이 본래 부처이고 범부 이대로가 성인이다라고 하는 본분도리로써 여러 대중에게 가르침을 펴서 그 도리를 바로 알도록 하는 분을 일컫는다. 또한 이 도리를 참구하고 평생 이 도리를 궁구해서 체달하고자 오로지 일의일발(一衣一鉢)로써 갖은 고통과 어려운 수행을 마다하지 않고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행납자를 본분납승, 본분납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분이란 말은, 결국 불교의 핵심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스님께서는 해인총림의 초대방장이 되시면서 중국 총림의 틀 그대로를 재현하셨다. 총림은 처음부터 하나의 뚜렷한 지도자를 정점으로 해서 그 아래에 공부를 하여 자신의 본분사를 체달하고자 하는 본분납승들과 함께 사부대중이 모여든 수행집단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총림의 주지를 일컬어 방장이라고 하였다. 종정이란, 종단의 상징적인 어른이면서도 모든 종도의 가장 표상이 되는 위치에 계신 분으로서, 옛날로 보면 국사․왕사에 해당하는 지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자칫 권승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스님께서는 종정이 되시기 전에도 그랬고 종정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종정이 되신 이후에는 특히 그 부분을 유념해서 보다 철저한 수행자 자세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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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는 선종의 대중흥조인 육조 혜능대사와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의 개산조인 관산혜현선사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자주 말씀을 하셨다. 육조스님의 이야기는 <단경>을 통해서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대사에게 장안으로 오셔서 국사에 임해 달라는 간청을 하였으나 병을 청탁하여 굳이 사양하고 올라가지 않았다. 육조스님은 일자무식 땔 나무꾼으로 출가하여 자성을 확철히 깨달아 오조(五祖 弘忍)의 법을 받고 나서는 소주 조계산(韶州 曹溪山)에 은거하면서 오로지 본분사를 천양하는 일로 일관하신 분이다. <단경>에서 항용 비견되는 것처럼, 신수대사는 육조스님과 같은 오조 홍인대사의 제자이며 이도삼제(二都三帝)의 국사로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과 낙양 두 군데로 옮겨다니면서 세 황제를 보필하며 영화를 누린 분이었다. 신수는 삼교를 통달하고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인품을 가진 분이었지만 그 분의 아손은 7,8대로 내려오다 끊어져버리고 육조스님의 아손은 오가칠종(五家七宗)을 이루면서 천하 총림을 덮었다. 조정에서 국사의 자리에 모시고자 하는데도 사양하고 오로지 본분종사로서 일관하신 가풍이 후손에까지 미치는 영향은 이처럼 큰 것이다. 지금 종국에서는 선문이 멸절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종풍이 해동(海東)까지 면면히 이어져 지금 우리들도 육조의 아손임을 자긍하는 것이다.
사진2.포행길에 나선 스님을 모시는 상좌스님들. 왼쪽부터 원융스님, 원영스님, 원택스님이시다.
일본에는 임제종이 22개파가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관산혜현 선사를 개산조로 한 묘심사파의 교세가 지금까지도 무성하다. 지난번 교토에 갔을 때, 일부러 묘심사에 들러 관산혜현 선사의 영당을 참배하고자 찾았더니 접수를 받던 보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혜현선사의 영당을 참배한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빤히 처다 보더니 종무소 안으로 쫓아 들어가서 종무소 스님에게 얘기를 전했다. 종무소 스님들은 저 멀리서 낯선 스님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한국에서 온 수좌스님들이로구나 하고 이미 알아차렸던지, 보살이 나오더니 곧 영당으로 안내를 했다. 관산선사의 영당은 묘심사 경내의 48원(院)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번갈아 관리하는데, 360년 전에 지었다는 건물이 아주 말쑥하였다. 관산선사의 영당 옆방은 화원조당(花園祖堂)이었는데, 거기에는 일본의 역대 천황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일본 불교의 가장 깊은 곳이었다. 안내를 받아 영당 안으로 들어가 우리 수좌스님 넷이서 분향을 하고 정중하게 삼배를 올리니 승려인 듯한 관리인도 무척 흐뭇해 했다.
관산혜현 선사는 당시 국사인 몽창(夢窓)스님의 사제였다. 몽창국사는 매일같이 궁중에 들어가 천황을 상대로 법문도 하고 국사를 논했는데, 천황이 몽창국사를 위해 묘심사라는 큰 절을 지어 바쳤다. 몽창국사는 비록 권승이긴 하지만 생각이 바른 사람이었던지 천황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이 절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제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제 사제 중에 관산수좌가 있는데, 그 수좌가 수행을 여법하니 관산에게 이 절 주지를 맡겼으면 합니다.”
천황이 재차 몽창국사에게 권해도 사양을 하고 사제를 천거하자 그러면 관산스님을 모셔오도록 하였다. 천황의 명을 받들어 관산스님을 수배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공부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관산스님이 어떻게 생겼으니 이런 모습을 가진 스님이 있으면 즉시 연락하라는 영을 전국에 내려 수배를 한 지 얼마를 지나서, 아주 깊숙한 어느 벽촌에 머슴을 살고 있는 분이 아무래도 관산스님 같다는 전갈이 왔다. 가서 살펴보니 과연 그 분이 관산스님이었다.
관산스님은 공부를 보다 철저히 하기 위하여 변색을 하고 남의 머슴살이로 들어가 살면서 자기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선원에 기 십년 있다 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간에 타의적으로 상판으로 밀려 올라가게 된다. 그렇게 올라가서 윗자리에 앉다 보면, 소임도 봐야 하고 책임도 져야 하고 대중의 시비가 있을 때는 그것을 바로잡아줘야 하는 등 번거로운 일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중처소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공부하기가 힘들게 된다. 이런 번거로움이 대중처소 생활의 결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관산스님도 그런 자리를 피해서 자기 뜻대로 공부하고 싶은 의도에서 변색을 하고 벽촌으로 숨었던 것이다.
관산스님의 천황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묘심사의 주지 즉 방장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관산스님이 묘심사의 주지를 맡고, 몽창국사는 어제와 다름없니 연(輦, 가마)을 타고 궁중을 드나들었다. 그런데 관산스님은 묘심사 같은 큰 절 주지를 살면서도 항상 누더기 한 벌로 일관하면서 낮에는 풀을 뽑고 허드렛일을 하는 등 그 모습이 하루도 변함이 없었다. 하루는 몽창국사가 연을 타고 가다가 누더기를 입고 풀을 뽑고 있는 관산스님을 바라보고 하는 말이 “장차 내 자손은 저 관산의 자손에게 잡아먹힐 것이다”라고 탄식을 하였다. 그 말처럼 몽창국사의 법손은 얼마 안 가서 끊어지고, 관산스님은 아손은 번창하여 지금도 일본 임제종 가운데 가장 왕성한 문파인 것이다.
사진3.선방 수좌가 정진중에 잠깐이라도 졸음에 빼질라치면 이내 "이 도둑놈아 밥 값 내놔라!"하는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와 함께 등줄기에 장군죽비가 날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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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는 누차 우리에게 육조스님의 가풍과 관산혜현 선사의 가풍을 교훈처럼 말씀하셨고, 스님 스스로도 평생을 그와 같이 살아오신 것이다. 55세 때 해인사 방장에 취임하기까지 하루에 나무 한 짐씩을 일과로 실행하셨고, 고인(古人)들처럼 본분사를 위해서는 두타행(頭陀行)을 아끼지 않는 삶을 사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각고정진하여 부다가야에서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나서 맨 처음 인천(人天) 대중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본분도리였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을 살펴보시고 말씀을 하셨다.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일체중생이 모두 다 불성이 있구나. 오로지 망상의 구름이 자성을 가리어 볼 수 가 없을 뿐이로다.”
본분도리란, 단지 참선문중에서만 살림살이로 표방하는 도리가 아니다. 결국 이것은 불교의 핵심이며,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인 것이다. 항간에는 스님께서 내세우신 독특한 이론을 들어 일반적으로 ‘성철사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스님이 내세우신 사상은 결코 성철스님만의 사상이 아니다. 성철스님께서는 결국 우리 선종의 근본사상이자 가장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사상을 표방하셨을 따름이지 자기 학설을 만들어 따로이 독특한 이론을 펴신 것은 아니다. 성철스님은 한마디로 본분종사로서 일관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성철스님의 사상이야말로 우리 선종의 사상이고, 선종의 사상은 불교의 핵심을 차지한 바른 이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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