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한가로이 석벽에 시 한 수를 적으니
페이지 정보
고경 필자 / 1998 년 6 월 [통권 제10호] / / 작성일20-07-14 17:34 / 조회14,848회 / 댓글0건본문
박상준(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가야산 해인사로 가는 산길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한참을 올라가면 백련암이 나온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주문을 지나 정념당(正念堂) 지하 계단을 오르면 백련암의 전각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누구 보다도 먼저 마당 가장자리에 언제나 그렇게 우뚝 서 있는 불면석이 수인사를 하고, 단아한 듯하면서도 지혜의 보검을 옆으로 비껴 뽑아든 것 같은 기상을 뿜어내는 원통전의 관세음보살님의 미소가 문 사이로 환하게 퍼져 나온다.

이 원통전에는 한 시절을 이곳에 주석했던 인파(仁坡: ?~1846)스님의 임종게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橫抽寶劍按靈臺 (횡추보검안영대)
殺活奇權手端開 (살활기권수단개)
龍將雲雨飛神變 (용장운우비신변)
風得虛空任往來 (풍득허공임왕래)
보검을 비껴 뽑아 영대를 어루만지니
살활자재 선방편(善方便)이 손 끝에서 전개된다.
용은 구름과 비로 신통변화 일으키고
바람은 허공 얻어 마음대로 오고가네.
백낙천(白樂天)의 후신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시재(詩才)를 지녔던 인파 스님의 게송은 자유자재하면서도 활기에 넘친다. 영대(靈臺)는 우리의 마음을 가리킨다. 보검은 지혜의 상징이다. 근본 마음자리[實相般若]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관조하니[觀照般若], 바로 이 자리, 마음과 지혜가 둘이 아닌 자리에서 자유자재한 방편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方便般若]. 마음과 지혜는 둘이 아니고 마음과 지혜와 방편은 또한 셋이 아니다. 이 자유자재한 경지를 용과 바람을 빌려 비유하고 있다.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雲從龍風從虎].”는 말이 있는데, 참배를 마치고 원통전 앞에 서 있노라면 저 앞산 머리에서 불어오는 바람 따라 구름과 비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용의 힘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발걸음을 옮겨 고심원(古心院)을 참배하고, 큰스님이 머무셨던 염화실 앞에서 삼배를 올리고 적광전(寂光殿) 앞에 선다. 측면 주련에 살활자재하는 기상을 호방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해 낸 시구가 걸려있다.
一拳拳倒黃鶴樓
一踏踏翻鸚鵡洲
有意氣時添意氣
不風流處也風流
한 주먹질에 황학루를 주먹으로 쳐서 쓰러뜨리고
한 발길질에 앵무주를 밟아서 뒤엎으며
의기(意氣)가 솟구칠 땐 의기를 더해주고
풍류가 없는 곳에는 풍류를 넘치게 한다네.
이것은 소동파와도 깊은 교유를 가졌던 북송 때의 소산 광인(疏山光仁)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법신의 향상사는 어떤것입니까[如何是法身向上事]” 하고 물었을 때 대답한 선구이다.
황학루를 주먹으로 쳐서 쓰러뜨리고 앵무주를 발로 밟아서 뒤집어 엎는 것은 살활자재하는 방편 중에서 살(殺 : 雙遮)에 해당하고, 의기를 솟게 하고 풍류가 넘치게 하는 것은 활(活 : 雙照)에 해당한다. 이 살활의 방편은 살 따로 활 따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살과 활이 동시에 행해지는 것이다[殺活同時]. 전체를 부정하고 부정하는 그 찰나에 다시 전체를 긍정하는 대자재가 한 순간에 동시에 펼쳐지는 것이다[雙遮雙照 遮照同時].
이태백은 그의 시(時)에서 “나는 그대를 위해서 황학루를 망치로 쳐서 부수어 줄테니(我且爲君槌碎黃鶴樓), 그대도 나를 위해서 앵무주를 밟아서 뒤엎어 주제나(君亦爲吾倒却鸚鵡洲)”하고 노래하였다. 호방표일 하면서 선미(禪味)가 넘쳐흐르는 시이다. 스즈끼 다이세쯔(鈴木大拙)선사도 적광전에 걸려 있는 바로 이 선시를 애송하였는데, 당호(堂號)를 이 시 구절에 있는 내용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중국 선사가 지은 시구가 한국의 절 주련으로 걸려 있고, 이 시를 일본의 선사도 애송하였으니 시대와 국적은 다르지만 불심(佛心)은 다를 바 없음을 여기에서도 보게 된다.
서로 화답이나 하는 듯이 원통전과 적광전에 걸려 있는 주련은 말 없이 고요하지만[寂光] 의미는 서로 원만하게 통하고 있는 것이다[圓通]. 적광전과 원통전이 서 있는 뜨락을 오락가락 마음대로 거닐다가 불면석 앞에 이르렀을 때쯤 노스님께서 나직하게 읊조렸을 법한 한산시 한 수를 읽어 본다.
一住寒山萬事休
更無雜念掛心頭
閒於石壁題詩句
任運還同不繫舟
한산에 한 번 머물러 모든 일을 쉬어서
다시는 잡념을 마음 속에 걸어두지 않았네.
한가로이 석벽에 시 한 구를 적으니
마음대로 오고감이 불계주와 같도다.
불계주(不繫舟),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은 배이다. 본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우리 마음을 가리키는 말일 터이다.
이 일 아니면 저 일에 묶여서 온갖 잡사에 얽매이고, 얽매이지 말라는 말귀에까지 잔뜩 얽매여 사는 중생의 입장에서 ‘얽매이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또 무슨 잠꼬대인가.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화마가 할퀴고 간 산청에서 방생법회를 봉행하며
2001년에 성철 종정예하의 출생지에 생가를 복원하고 그 앞쪽에는 대웅전을 지었습니다. 경내로 들어오는 입구쪽에는 2층 목조기와집을 지었습니다. 2층 목조건물 1층 기둥은 직경 40cm가 넘는 돌기…
원택스님 /
-
홍성 상륜암 선준스님의 사찰음식
충남 홍성의 거북이 마을에는 보개산이 마을을 수호합니다. 보개산 숲속에는 12개의 바위가 있고 하나하나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산자락의 끝에는 작은 암자 상륜암이 자리하고 있습니…
박성희 /
-
티베트 난민들의 귀의처 포카라의 빼마찰 싸캬 사원
포카라 근교 햄쟈(Hemja) 마을에 자리 잡은 따시빨켈(Tashi Palkhel) 티베트 난민촌 캠프 위에 자리 잡은 빼마찰 사원은 포카라-안나푸르나 간의 국도에서도 눈에 잘 띈다. 사진…
김규현 /
-
하늘과 땅을 품고 덮다[函蓋乾坤]
중국선 이야기 50_ 운문종 ❺ 문언文偃이 창립한 운문종의 사상적 특질은 ‘운문삼구雲門三句’에 있다고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서는 “소양韶陽(…
김진무 /
-
산불 피해 성금 전달 및 연등국제선원 반야당 개축
연합방생대법회 및 산불피해 성금 전달영남과 산청 지역을 휩쓴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해 성철스님문도회가 자비의 마음을 보탰습니다. 성철스님문도회는 지난 4월 3일 겁외사 인근 성철공원에서 전국방생대법회…
편집부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