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지눌의 생애와 세 번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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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5 년 2 월 [통권 제142호] / / 작성일25-02-04 09:02 / 조회198회 / 댓글0건본문
한국선 이야기 14_ 한국선의 정립, 보조지눌의 선사상 ❶
‘K-명상’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필자에겐 그 말이 잘 다가오지 않는다. ‘유명무실有名無實’하다거나 더 나아가 ‘유명무실唯名無實’하다는 생각마저 떠올리곤 한다. 그 이유는 ‘K-명상’이란 말과 ‘한국선’이란 말 사이에 존재하는 적지 않은 거리감 아니 이질감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선 수행법을 가지고 ‘K-명상’이라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선학先學들은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의 선사상과 선 수행법에 주목해 왔다.
한국선의 정립
광종 대 법안종의 유입과 대각국사 의천(1055~1101)에 의한 천태종의 개창으로 인해 나말여초에 형성된 구산선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화엄종과 법상종 및 천태종 세력에 위축되었던 선종은 보조국사 지눌의 출현으로 인해 다시금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눌이 쓴 『수심결修心訣』의 벽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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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三界의 뜨거운 번뇌가 불타는 집과 같다. 이 속에서 차마 어찌 그대로 머물러 오랜 고통을 달게 받겠는가?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거든 부처를 찾는 길밖에 없고,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부처란 바로 이 마음이다.(주1)
수많은 선 수행자의 지남指南이 되었을 위의 두 문장 속에 한국선의 정수가 간직되어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마음 닦는 비결(수심결)’이란 제목을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위 인용문의 의미는 더욱 분명히 다가온다. ‘불즉시심佛卽是心·심즉불心卽佛’에 대한 지눌의 확고한 신념을 읽을 수 있다. 마음의 체와 용이 ‘정혜定慧’이기에 ‘정혜’를 닦는 결사를 이끌었고, ‘수선사修禪社’라 이름이 바뀌게 된 것도 ‘수심修心’이 다름 아닌 ‘수선修禪’이기 때문이다.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였던 사굴산문 종휘宗暉선사의 제자로 출가한 지눌은 일정한 스승이 없이 선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수행하였고, 경전과 조사의 어록도 폭넓게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선과 교가 둘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일치한다.”라는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지눌은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화엄종 승려들을 향해 이를 설득시키기 위해 3년간이나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그가 남긴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에는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지눌이 한국선韓國禪의 중흥조, 한국선의 정립자로 추앙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사상가요, 조사이기 때문이다. 선교일치에 대한 경전적 근거를 토대로 화엄종의 승려를 설복시켰음에도, 지눌은 다시금 대혜종고가 주창한 간화선을 수용하였다. 지눌은 본분종사本分宗師의 언구言句를 지견知見의 병을 씻는 출신활로出身活路라고 본 것이다. 곧 관행觀行하는 화엄종 승려들이 생각을 잊고 마음을 비워 밝게 하지 못하고, 개념적인 이해나 이치들[義理]에 머무를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간화선을 수용한 것이다. 그러한 내용들이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 잘 나타나 있다.
김군수와 보조국사의 비문
원효가 화쟁·회통사상을 통해 한국불교의 초석을 다졌고, 의천과 지눌에 이르러 선과 교가 회통하는 한국불교가 정착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의천의 교선일치敎禪一致와 지눌의 선교일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의천이 기획했던 교주선종敎主禪從의 한국불교의 성격을 지눌은 선주교종禪主敎從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교와 선의 ‘주종主從’ 관계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지눌 이후 한국불교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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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은 김부식金富軾이 지었고, 「불일보조국사비문」은 김군수金君綏가 지었다. 『삼국사기』의 저자이자 묘청의 난을 진압하였던 김부식의 아들이 김돈중金敦中이며, 김돈중의 아들이 김군수이다.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웠던 김돈중은 결국 1170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무신들에 의하여 잡혀 죽었다. 지눌의 비문은 희종의 명에 의해 김군수가 짓게 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지눌의 사상체계를 돈오점수頓悟漸修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간화경절문의 삼문三門으로 볼 것인가? 이 두 관점은 보조사상을 이해하는 주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중 삼문 체계를 통하여 보조사상을 밝힌 최초의 인물은 보조국사의 비문을 지은 김군수이다. 물론 이 같은 관점에는 혜심 등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에 법을 계승한 승려 혜심慧諶 등이 국사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올리고 후세에 보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자 임금께서는 ‘그러라’ 하시고, 신臣에게 명하여 그 비문을 짓게 하였다.”(주2)라는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문에 나타난 지눌의 삶은 세 번의 깨달음에 바탕하여 삼문을 시설하였고, 이를 통해 정혜결사(수선사)를 이끌었던 구도와 실천의 과정으로 압축할 수 있다. 김군수는 첫 번째 깨달음과 성적등지문, 두 번째 깨달음과 원돈신해문, 세 번째 깨달음과 간화경절문을 배대하여 지눌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첫 번째 깨달음
지눌은 8세에 동진 출가하여 17세에 수계 득도했다. 그리고 25세에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선僧選에 합격하게 된다. 승선에 합격한 지눌은 개경의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였지만, 동료 승려들에게 당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기 위한 결사를 제안한다. 이에 10여 인이 동참하기로 약속하였지만 본격적인 결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곧장 전라도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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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청원사가 어디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전남 담양에 있던 절로 추정된다. 청원사 시절부터 지눌은 선수행과 더불어 불교 경전에 대한 진지한 탐색에 몰두한다. 여기에서 지눌은 『육조단경』의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면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달아 알더라도 대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주3)라는 대목을 통하여 첫 번째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는 혜능이 자성정혜自性定慧를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로써 이를 통해 지눌은 ‘성적등지惺寂等持’에 대한 확신을 지니게 된다.
두 번째 깨달음
청원사에서 3년을 지낸 지눌은 28세(1185)가 되던 해에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 도착한다. 하가산은 지금은 학가산鶴駕山으로 불리며 보문사는 경북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에 있다. 그곳에서 지눌은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다. 선종의 승려로서 이렇게 경전을 열심히 보게 된 이유는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화엄종의 승려들은 그들의 교판론에 입각하여 돈교인 선종은 원교인 화엄종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지눌의 입장에서는 선종이 화엄종과 같은 진리를 표방하고 있음을 경전을 통하여 입증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통현의 『신화엄론』을 통하여 지눌은 선과 화엄의 교리가 서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확신에 이르게 된다. 이를 계기로 지눌은 이통현의 화엄론을 절요하였고, 또한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여 화엄의 관행을 통한 성불론과 선 수행을 통한 성불론이 다르지 않음을 밝힌다.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의 가르침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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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1188)가 되던 해에는 팔공산 거조사居祖寺로 자리를 옮기었는데, 이는 예전에 보제사에서 추후 함께 결사結社를 서원하였던 득재得材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거조사는 현재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은해사의 산내암자이다. 지눌은 이곳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짓고 정혜결사의 기치를 올리게 된다. 결사문은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서 일어난다.”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데, ‘마음이 부처’라는 전제 아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수행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근본 취지였다.
세 번째 깨달음
송광사로 결사의 도량을 옮기기에 앞서 41세(1198년)가 되던 해에 지눌은 몇몇 선승들과 함께 지리산의 상무주암에 머물며 정진한다. 이곳에서 지눌은 선 수행과 더불어 간화선을 완성한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의 어록을 열람하게 된다. 10년 전 보문사에서 화엄과 선의 사상적 일치점에 대한 확신을 얻었지만, 그때까지도 알음알이[知解]의 찌꺼기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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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대혜어록』의 “선禪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에 있지도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 소란한 곳,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선參禪해야 홀연히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집안의 일임을 알게 되리라.”(주4)라는 구절을 보는 순간 세 번째 깨달음이자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분명 경전을 매개로 한 깨달음이자 스승의 지도 없이 이루어진 깨달음이라 할 수 있지만 10년 동안 가슴속에 품었던 ‘의단’이 타파되는 순간이었다. 지눌이 『간화결의론』의 저술을 통하여 대혜의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다양한 의문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자신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대혜의 간화선은 지눌에 의하여 수용되고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격적인 결사와 열반
세 번의 깨달음 이후 지눌은 43세(1200년)가 되던 해에 순천 송광사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1205년에 희종熙宗이 명을 내려 산의 이름을 송광산에서 조계산으로, 결사의 이름을 정혜결사에서 수선사修禪社로 바꾸게 하였다. 이후 수선사는 15국사를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 도량으로 우뚝 서게 된다.
지눌은 1210년 음력 3월 27일에 열반에 들었는데, 세수 53세요, 법랍法臘 36세였다. 화장하여 유골을 수습하였는데, 뼈는 모두 오색이었으며, 큰 사리 30과와 수많은 작은 사리들이 나와 수선사 북쪽 기슭에 부도를 건립하였다. 희종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 시호하고 그 탑을 ‘감로甘露’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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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 知訥, 『牧牛子修心訣』(韓佛全 4, p.708b), “三界熱惱 猶如火宅 其忍淹留 甘受長苦. 欲免輪廻 莫若求佛 若欲求佛 佛卽是心.”
(주2) 金君綏撰, 「佛日普照國師碑銘」, “師 沒之明年 嗣法沙門慧諶等 具師之行 狀以聞 願賜所以示後世者. 上曰 兪. 乃命小臣 文其碑.”
(주3) 金君綏撰, 「佛日普照國師碑銘」, “偶一日 於學寮 閱六祖壇經 至曰 「眞如自性起念 六根雖見聞覺知 不染萬像 而眞性常自在.」 乃驚喜 得未曾有 起繞佛殿 頌而思之 意自得也.”
(주4) 金君綏撰, 「佛日普照國師碑銘」, “至居智異 得大慧普覺禪師語錄云 「禪不在靜處 亦不在鬧處 不在日用應緣處不在思量分別處. 然 第一不得 捨却靜處鬧處 日用應緣處 思量分別處叅」 忽然眼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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