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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속의 불교 ]
한용운의 ‘침묵’과 불교의 ‘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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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  2025 년 10 월 [통권 제150호]  /     /  작성일25-10-03 19:10  /   조회17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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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국에 천도다 불도다 할 시기도 아니고

 

“오는 봄에는 임제종의 이차 총회가 열릴 모양인데.”

“작년에는 송광사서 열리지 않았었소?”

“그랬지요. 금년에는 광주 포교당에서 하지 않을까……. 아무튼 이번에는 한층 더 뚜렷하게 명분을 내걸어야 할 게고 임시관장이고 보면 새로 관장을 뽑아야 하는데 어째 시끄럽지 않을란가.”

혜관은 입맛을 다신다.

“임시지만 용운이 그냥 눌러앉는 게 아닐까?”

“글쎄올시다.”

 

(중략)

“우리 동학에서 본달 것 같으면 좀 꿋꿋한 사람이지요. 동학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이 머릴 깎았으니까요. 허헛헛 … 그러나 전혀 인연 없는 사람이 앞장서서 일하느니보다, 용운이 편이 낫덜 않겠소? 하긴 이 시국에 천도다 불도다 할 시기도 아니고…(중략) 용운이 그 사람을 말하잘 것 같으면 학식이 도저하고 문장은 능히 종장의 영역이오. 젊음과 패기 또한 늠름하지 않소이까?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그 부친이나 형을 보더라도 뼈대 있는 집안.” - 박경리, 『토지』 중에서(주1)

 

인용한 내용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나오는 한용운에 관련된 대화 부분이다. 한용운은 1910년 10월 6일 원종의 대종정인 이회광이 한국 불교를 일본의 조동종과 통합하는 맹약을 체결한 사실을 알고 박한영 등과 함께 1911년 1월 15일 ‘조동종 맹약 규탄대회’를 열어 임제종 종무원을 송광사에 설치한다. 그리고 이듬해 5월 26일에는 인사동에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연다.

 

사진 1. 소설가 박경리(1926~2008). 

 

소설 속 장면에서 이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이 나름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시국에 천도다 불도다 할 시기도 아니고”라는 말처럼, ‘한일합방’이 선포된 직후 동학이나 불교의 근대화, 유신운동은 ‘민족적 위기’, ‘시대 현실’을 떠나서 그 자체의 존립을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불교유신의 숙원이 경성에 사찰을 건립하는 것으로 표면화되는 이유는 ‘산중불교’가 근대라는 시대적 격변 속에서 ‘도심불교’로 전환해야만 한다는 당면 과제, 그리고 불교 자체의 ‘근대종교화’라는 방향성이 이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임제종 운동은 이 점에서 불교 내부의 정통성과 정화, 유신의 확립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민족종교로서의 ‘불교’라는 위상 설정과도 관련된 문제였다. 이런 시대의 격변은 지난 연재에서 거론한 ‘사회진화론과 제국주의적 우승열패’ 사상이 득세하는 현실에 대해 ‘화엄과 자비, 공생’을 기반으로 하는 불교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직결된다. 

 

사진 2. 1910년경 원종과 임제종에서 송광사로 보낸 공문.

 

이전 연재에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침묵’의 의미를 전통적인 선시에서 확인해 보았던 것처럼, ‘침묵’은 단순히 님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님의 실체’, ‘여여’에 가까운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침묵’이라는 ‘분별지’를 넘어 있는 경지에 대한 지향과 앞에서 말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서로 ‘상충되는 현실과 지향’의 관계를 한용운은 어떻게 풀어나가려고 했을까. 아마도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이런 시대고와 불교의 접점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이미 한용운의 시편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었고, 불교적인 의미로 해석한 연구도 적지 않지만 의외로 불교적 인식론에 기반해서 「님의 침묵」의 표상성을 다룬 연구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듯하다. 시적 인식론과 불교적 인식론의 유사성을 거론하자면, 우선 불교의 ‘오온’에 대한 설명과 ‘12처’나 ‘18계’에 대한 사유를 대표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감각하고, 인식하고 마음을 일으켜 행하며, 언어와 이미지 같은 표상을 어떻게 산출해 내는지에 대한 설명은 현대의 현상학이나 해석학보다도 오온과 12처 혹은 18계의 설명이 훨씬 깊이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사진 3. 1911년 10월경 임제종 임시종무소가 있던 범어사.

 

오온을 통해 만든 ‘자아’와 ‘님’의 관계

 

인간 존재를 다섯 갈래의 작용으로 설명하는 불교의 오온五蘊은 ‘나’라는 견고한 실체를 색[形態]·수[感覺]·상[表象]·행[意志的 形成]·식[分別]의 상호작용으로 해체하는 불교적 사유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오온은 실재를 부정하려는 논리가 아니라, 고정불변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늦추어 고통을 다르게 건너게 하는 일종의 ‘보는-관觀의 기술’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도 이러한 관의 기술을 통해 파악된 지혜를 시적 언어로 치환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의 시에서 ‘님’은 오온의 층위를 통과하면서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고, 상호 작용하고, 마침내는 그 모든 분별을 넘어선 자리인 ‘침묵’으로 환원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님의 형상 혹은 표상은 시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런 표상은 물질적인 대상 자체도 아니고, 감각적 체험의 결과도 아니고, 그 결과인 이미지나 표상도 아닌, 마음과 욕망과 감정,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의 총체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만들어 낸 일종의 고정되지 않은 ‘진행형 표상’으로서 시적인 언어의 혼종과 다양성을 그대로 구현하기에 적합한 것이 된다. 이점이 한용운의 시적 체험과 불교적 수행이 하나의 길로 포개지는 지점이다.

 

사진 4. 충남 홍성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생가에 세워진 동상. 사진: 서재영.

 

『님의 침묵』(1926)의 첫머리는 이미 그 길의 방향을 가리킨다. 

「님의 침묵」은 부재의 통보로 시작되는데,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는 첫 행에서 독자는 곧장 상실의 감정에 부딪힌다. 이런 상실의 감정은 행行에 해당하는 것으로 마음이 생겨서 감정과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단계이다. 즉, ‘상실감’은 마음(감정)이 생겨난 결과로써 그 이전에 ‘색-수-상-행-식’의 일차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때 ‘님’은 아직 상想으로서의 완전한 표상을 갖추기 이전으로서, 색色의 즉물적 상태와 수受의 감각적인 수용과 동요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 곧이어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와 같은 ‘이별’의 장면이 내포한 감각적 요소가 다시 ‘님의 떠남’이라는 사실에 대한 1차적 인식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상실의 위상을 더욱 정확히 각인[識]시킨다. 이 상태에서 ‘님의 떠남’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부재나 상실의 감정으로 다시 ‘생[生]’겨나고, 즉물적이거나 감각적인 풍경은 마음(감정, 의지)과 다시 결합하면서 즉물적이거나 감각적인 표상의 단계에서 점차 2차적으로 ‘마음(감정, 의지)이나 생각’을 담은 표상으로 깊어지게 된다.

 

사진 5. 시집 『님의 침묵』 초판본 표지.

 

시적 언어는 일반적으로 ‘내면’을 담고 있다고 하는 것처럼, 즉물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감정이나 인식의 표상을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내부로 스며드는 순간, 시적 자아는 ‘떠난 님’을 마음속에서 다시 그려 보며 분별[識]의 문턱에 서게 된다. 시적 자아의 현실적 한계는 ‘나’와 ‘님’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격, 즉 이별이라는 ‘분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 ‘분별’의 상태에 놓인 시적 자아는 결코 님을 붙잡거나 ‘만남’을 현실화할 수 없다. 붙잡히지 않는 것을 붙잡으려는 식識의 집착은 결국 감각적 욕망의 파문을 만드는데, 『님의 침묵』에는 이러한 ‘마음’의 집착이 그려 놓은 파문과 그 파문의 표상으로 그려진 ‘님’이 곳곳에 등장하지만, 그러한 님은 여전히 ‘부재와 침묵(절대적 침묵과는 다른 상태인)’의 상태에 있을 뿐이다. 

 

결국, 말 대신 ‘침묵’으로 현현하는 ‘님’은 『님의 침묵』 전편에서 표상되거나 현현하기보다는 ‘만남’이라는 상태로 상징화된다. 이 점에서 「님의 침묵」의 ‘침묵’은 무無의 공백이 아니라, 분별이 그치며 충만이 설 자리로 상징되는 것으로 ‘만남’이라는 구도의 최종점에서만 가능한 ‘나와 님’의 분별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오온의 진행에서 ‘행行’은 자아가 스스로를 움직여 형성하는 의지의 층위다. 만해 한용운의 시 「복종」은 행의 역학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라는 첫 문장은 자유와 복종의 이분법을 뒤집되, 복종을 타율의 굴종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주체적 결단으로 바꿔 앉힌다. 이어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가 덧붙여질 때, ‘복종’은 단지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 초월적 ‘법法’을 향한 ‘한정 없는 의지’로 드러난다. 

 

타자 일반이 아닌 ‘당신(님)’에게로만 향하는 의지는, 불교적 맥락에서는 자아의 집착을 불태워 하나[一相]로 귀속하려는 행의 전환으로 읽힌다. 의지의 절대화가 곧 집착의 절연에 닿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행(마음, 의지)이 구도와 알아차림이라는 지혜를 얻게 되면, 결국 일반적인 식의 분별지를 녹이고 침묵의 자리로 미끄러지게 하는 것이다. 시 「복종」은 이 점에서 자유라는 ‘행’과 ‘복종’이라는 행을 서로 대비하면서 무상한 ‘색-수-상-행-식’의 연쇄작용 속에 머무는 상태를 자유라고 착각하는 ‘무명無明’의 상태를 ‘복종’이라는 ‘구도의 마음’과 대비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식識은 오온 중에서 인식의 마지막 틀이다. 그런데 만해는 종종 식의 최종선을 밟는 동시에 그 선을 지워버리는 시적 전략을 취한다. 「알 수 없어요」의 도입부는 그 대표적 장면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로 시작하는 일련의 물음들은(“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감각과 표상의 층위를 일으켜 세운 뒤, 끝내 ‘누구’라는 물음으로 생각[識]의 호흡을 가쁘게 만든다.

 

이런 분별에 대한 의심이 극한까지 치달을수록, 대상[色]은 명명命名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분별지’를 전제로 하는 식으로 최종 연결된 ‘오온’의 작용 속에서는 ‘대상’의 진정한 ‘상[表象]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무명無明의 상태에 있음을 적극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만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언어를 멈추고, 멈춤의 언저리-침묵- 위에 독자를 세운다. 식識을 밀어붙여 의심하는 경지에서 도달한 무분별無分別의 길, 즉, 앎의 끝에서 ‘알 수 없음’이라는 열반의 초입 즉, ‘침묵의 언어’에 닿게 되는 것이다.

 

‘침묵’, 보내며 머무는 고요

 

만해의 시에서 ‘침묵’은 사적인 상실의 정서에 머무르지 않는다. 만해가 겪은 시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실의 시대였을 것이다. 제국주의의 폭력과 민족적 좌절 속에서 ‘님’은 애타게 부르고 싶은 연인의 호칭이면서 조국·자유·법法의 이름이 된다. 그러므로 『님의 침묵』의 ‘침묵’은 단지 이별의 고요가 아니라, 역사와 존재를 함께 끌어안는 사유가 힘겹게 도달한 ‘공空의 진동’이 아니었을까.

 

상실의 풍경을 환하게 비추는 침묵-그곳은 개인의 슬픔이 민족의 기억으로 공명하고, 역사적 분노가 수행의 정진으로 변환되는 현장이다. 『님의 침묵』 전체가 이별·슬픔·전환·만남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구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침묵’이 단순한 어둠과 부재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만남’을 암시하는 최종적 지점이며, 이 시집이 ‘여여’한 상태에서 ‘대상(님)’과 ‘자아’가 서로 분리되지 않은 ‘깨우침을 향해 진행하는 과정’을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진 6. 충남 홍성의 만해 생가. 전대법륜轉大法輪이라는 만해의 친필 글씨가 걸려 있다. 사진: 서재영.

 

요컨대 만해의 시 세계에서 오온은 단순한 불교 교리의 ‘주제’가 아니라, 정념과 사유가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시적 공방工房’의 설계도이다. 색이 수를 흔들어 일으키고, 수가 상을 밀어 올리며, 상이 행으로 자라 의지를 세우고, 행이 식으로 수렴되어 분별의 칼날을 번쩍일 때, 시는 맨 마지막에 그 칼을 내려놓는 법을 보여준다. 내려놓음의 이름이 ‘침묵’이다. 그 침묵은 허무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앎과 모름의 경계가 투명해지고, 대상과 자아의 경계가 옅어지는 충만의 순간이다.

 

문학적 층위에서 보면, 만해의 침묵은 한국 근대시가 스스로의 윤리적 심지心志를 드러낸 자리이기도 하다. 감정의 파고를 끝까지 밀어 올리되, 그것을 언어의 과시로 풀지 않고 ‘멈춤’으로 마무리하는 절제-이 절제는 고통을 감추는 미학이라기보다는 고통을 견디는 ‘법(방법)’이다. 그 ‘법’의 핵심은, 자아의 중심을 빈자리로 바꾸는 것-무아無我의 훈련이다. 그래서 만해의 침묵은 묵언黙言이라기보다 묵조黙照에 가깝다. 말은 멎지만, 보는 일은 더 깊어진다.

 

침묵은 ‘님’의 부재를 영원히 고정하는 표지가 아니다. 오온의 사다리를 한 칸씩 올라 분별의 극점에 닿은 뒤, 그 사다리를 발로 밀어 떨어뜨릴 때 남는 것이 침묵이다. 그러니 그곳은 님이 없는 자리라기보다, 이름 붙이지 못해 부르지 않는 자리다. 님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름의 껍질이 벗겨질 뿐이다. 이때 시는 달라진다. ‘그리워하는 나’에서 ‘놓아보는 나’로, ‘존재를 붙드는 말’에서 ‘보내며 머무는 고요’로. 

 

<각주>

(주1) 박경리, 『토지』 6, 마로니에북스, 2012,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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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계간 <시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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