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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풍광」의 이해와 실천 ]
덕산이 바리때를 들고 [德山托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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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6 년 1 월 [통권 제153호]  /     /  작성일26-01-04 21:00  /   조회4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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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풍광』은 성철스님이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한 이래 매 결재철마다 한 달에 두 번씩(보름과 그믐) 대중들을 향해 행한 설법을 모은 설법 모음집이다. 그것은 ‘수시-본칙(착어)-평창-송(착어)-결어’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형식적으로는 『벽암록』과 『종용록』에 가장 가깝다. 다만 여타 공안집에 발견되지 않는 결어로 설법을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뚜렷한 형식적 차별성을 갖는다.

 

성철스님의 상당법문 법문 『본지풍광』

 

법문을 시작하는 수시 역시 분명한 내용적 차별성을 갖는다. 『벽암록』(垂示)이나 『종용록』(示衆)의 경우, 불가해한 본칙을 제시하기 전의 수시에서 이해 가능한 문장으로 이해 가능한 차원을 제시한다. 이에 비해 『본지풍광』의 수시는 그 자체가 본칙과 동일한 언어도단의 방식을 취한다. 그러니까 『본지풍광』의 수시는 본칙이나 송과 병렬적 관계로 배치되어 동일한 무게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수시의 이해가 곧 그 본칙이나 송, 나아가 결어를 통해 동어반복적으로 설해지는 주제를 파악하는 첩경이 되는 것이다. 수시를 중심으로 『본지풍광』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성철스님의 수시에 대한 의미부여를 보자. 

 

여기(수시)에서 정문頂門의 정안正眼을 갖추면 대장부의 할 일을 마쳤으니 문득 부처와 조사의 전기대용全機大用을 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시 둘째 번 바가지의 더러운 물을 그대들의 머리 위에 뿌리리라.

 

수시의 법문이 핵심이고 그것에 이은 본칙 등이 “둘째 번 바가지의 더러운 물”, 즉 분별의 혐의가 있는 법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 『본지풍광』은 『백일법문』, 『선문정로』와 함께 성철선을 구성하는 3대 저서의 하나이다. 선이 둘일 수는 없으므로 3대 저서는 동일한 법을 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이 저서들이 지향하는 지점은 판연히 다르다. 모두가 선적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 각각은 불법의 개관(『백일법문』), 수행 지침의 제시(『선문정로』), 도착지의 풍경 묘사(『본지풍광』)를 내용으로 한다. 『본지풍광』에는 여타의 공안집이 그런 것처럼, 이해를 가로막는 무수한 장애물들이 시설되어 있다. 그중 어떤 것은 언어적 문제로 인한 장벽이고, 어떤 것은 차원의 불가해성으로 인한 근본적 장벽이다. 이중 근본적 장벽은 완전한 무심의 경계를 투과하여 진여에 계합할 때 비로소 사라진다. 깨쳐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량분별로 알 수 없는 이 근본적 장벽을 마주하려면 먼저 언어적 장벽을 통과해야 한다. 요컨대 언어적 장벽의 해소는 공안의 공부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선결과제가 된다.

 

공안을 구성하는 언어적 장벽은 여타 선어록의 용례와 맥락을 짚어보는 학문적 노력을 통해 일정 부분 해소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여기에 성철스님의 3대 저서에서 유사한 용례와 맥락을 찾아 견주어 보는 방법을 더하고자 한다. 선문의 언어가 대부분 양가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 선사의 언어로 범위가 좁혀질 때, 그 의미의 파악이 상대적으로 용이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일법문』과 『선문정로』의 언어를 빌림으로써 『본지풍광』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수시의 맥락

 

『본지풍광』 제1칙인 「덕산탁발」화는 덕산선사가 공양이 늦자 발우를 들고 나오니 설봉선사가 그 일을 타박하고, 다시 방장으로 돌아가니 암두선사가 노스님이 말후구를 모른다고 비판한 사건을 본칙으로 한다. 성철스님의 수시는 이 본칙에 보이는 선사들의 수작이 중도를 드러내는 역동적 중도운동의 일환임을 개관한다. 「수시」의 전체 구성은 다음과 같다.

 

사진 1. 「덕산탁발」을 묘사한 그림(AI생성 이미지).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잡고 한참 묵묵한 후에 말씀하셨다.[上堂, 拈拄杖, 良久云])

이렇고 이러하니[也恁麽也恁麽]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해와 달이 캄캄하도다[天崩地壞日月黑]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不恁麽不恁麽] 

까마귀 날고 토끼 달리며 가을 국화 누렇도다[嗚飛兎走秋菊黃]

 

기왓장 부스러기마다 광명이 나고[瓦礫皆生光] 

진금眞金이 문득 빛을 잃으니[眞金便失色]

누른 머리 부처는 삼천리 밖으로 물러서고[黃頭退三千]

푸른 눈 달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碧眼暗點頭]

 

이 도리를 알면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지며[會得則七顚八倒]

이 도리를 알지 못하면 삼두육비三頭六臂이니 어떠한가?[不會則三頭六臂, 作麽作麽]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뚫고[紅霞穿碧海]

눈부신 해는 수미산을 도는도다[白日繞須彌]

※ 한문 병기 및 문단 나누기, 필자.

 

「덕산탁발」화의 수시 게송은 위에 보이는 것처럼 4구×4문단으로 나뉜다. 여기에 “정문頂門의 정안正眼을 갖추지 못하면, 둘째 번 바가지의 더러운 물을 그대들의 머리 위에 뿌리리라.”는 내용의 평설이 더해져 있다. 수시에 이런 식의 평설이 더해지는 경우는 「7. 동산공진洞山供眞」화 등 유사사례가 없지는 않으나 일반적이지는 않다.

 

이렇고 이러함과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아니함

 

기단起段은 “이렇고 이러하니[恁麽恁麽]”와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不恁麽不恁麽]”의 주제어와 그에 호응하는 경계의 제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고 이러하니[也恁麽也恁麽]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해와 달이 캄캄하도다[天崩地壞日月黑]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不恁麽不恁麽]

까마귀 날고 토끼 달리며 가을 국화 누렇도다[嗚飛兎走秋菊黃]

 

『본지풍광』의 수시에는 전체 법문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제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는 “이렇고 이러하니”와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가 그에 해당한다. 『선문정로』의 인용문에 그 용례와 설명이 보인다. 

 

초경招慶이 나산羅山에 문問하되, “암두岩頭가 말하기를, 임마임마 불임마불임마恁麽恁麽 不恁麽不恁麽라 하니 그 의지意旨가 여하如何오.” 산운山云, “쌍명雙明하며 또한 쌍암雙暗하니라.” 경운慶云, “여하시如何是 쌍명역쌍암雙明亦雙暗고.” 산운山云, “동생同生하며 역동사亦同死니라. - 『선문정로』

 

이에 의하면 “임마임마(이렇고 이러하니)”와 “불임마불임마(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는 쌍명쌍암雙明雙暗, 동생동사同生同死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쌍차쌍조를 대부정과 대긍정으로 규정한다.

 

‘모든 분별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쌍차입니다. 모든 생멸을 부정하고 나니 생멸을 바로 보는 대긍정 곧 쌍조가 됩니다. - 『백일법문』

 

성철스님의 중도법문은 이러한 ‘쌍차雙遮=쌍조雙照’의 논의로 채워져 있다. 이 쌍차쌍조(천태)는 쌍민쌍존(현수)과 같은 말인 동시에 사중득활死中得活, 중도 등과 동의어의 관계에 있다. 선어록에서는 쌍차를 파주把住, 쌍조를 방행放行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성철스님은 불교의 핵심이 쌍차쌍조의 실천에 있을 뿐만 아니라 수행의 완성 역시 쌍차쌍조의 성취에 있음을 강조한다. 

 

사진 2. 성철스님의 상당 법문을 묶은 『본지풍광』 표지(장경각, 2001년).

 

이 정도의 예비 고찰을 바탕으로 수시의 게송으로 돌아가 보자. “이렇고 이러함”이 다양한 현상을 긍정하는 일이라면,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음”은 다양한 현상을 부정하고 하나의 이치로 돌아가는 일이다. “이렇고 이러함”은 쌍조어이고,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음”은 쌍차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본지풍광』 수시의 호응 관계를 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이렇고 이러하니”의 쌍조어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해와 달이 캄캄하다”는 쌍차의 경계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각 존재의 모양과 특징이 무너지고 부정되었으므로 쌍차다. 다음으로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의 쌍차어에 “까마귀 날고 토끼 달리며 가을 국화 누렇다”는 경계가 호응하고 있다. 까마귀·토끼·국화의 모양과 특징이 완전하게 긍정되었므로 쌍조다. 결과적으로 “이렇고 이러하니(쌍조어)→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해와 달이 캄캄하다(쌍차경계)”,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쌍차어)→까마귀 날고, 토끼 달리고, 가을 국화 누렇다(쌍조경계)”와 같이 주제어와 서술어 사이의 어긋남이 발생하게 된다. 이 어긋남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음의 설명을 보자.

 

처음에 공부를 해서 생각을 좀 쉬면 ‘산불산山不山 수불수水不水’, 즉 산을 봐도 산이 아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양변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근본도리인가? 아닙니다. 이것은 낙공落空의 외도外道입니다. 여기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한 걸음 탁 돌아서서 보면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즉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입니다. 산과 물이 각각 완연完然해서 서로 그대로 서게 됩니다. 이것도 쌍차쌍조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 『백일법문』

 

부정이 부정 일변도가 되거나, 긍정이 긍정 일변도가 된다면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시 게송의 첫 번째 단락에서 쌍조의 주제어를 쌍차의 경계로 함께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어지는 문장을 보자.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는 쌍차어다. 이것을 “까마귀 날고 토끼 달리며 가을 국화 누렇도다”의 경계로 받았다. 까마귀의 날기, 토끼의 달리기, 국화의 누런 색은 각 사물의 고유한 차별성을 긍정하는 경계다. 쌍조다. 쌍차어를 쌍조의 경계로 받은 것이다. 주술관계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분별적 논리를 넘어선 중도를 표현하고자 하는 이러한 언어전략은 조사어록에 흔히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쌍차와 쌍조를 이렇게 나누어 보는 일이 논리적으로 성립하기는 하지만 이 게송이 가리키는 실제, 즉 성철스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으로는 ‘쌍차→쌍조’, 혹은 ‘쌍조→쌍차’의 순서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천적으로는 차조동시遮照同時로서 대부정과 대긍정의 동시적 구현이 일어나는 것이 본지풍광이다. “쌍차라 하면 으레 쌍조를 겸하고, 쌍조라 하면 쌍차를 겸한다”고 한 『백일법문』의 말이 가리키는 바이기도 하다. 나아가 여기에는 논리에만 충실할 수 없는 더 심각한 속사정이 자리하고 있다. 궁극의 한마디(말후구)는 오직 직접 체험한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문정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말후구는 쌍차쌍조, 동생동사, 전명전암, 전살전활 등으로 표현하나, 이는 고불古佛도 미증도未曾到인 최후 극심심처極深深處이니 오직 실참실오實參實悟에 있을 뿐이다. - 『선문정로』

 

완전한 긍정 속에 부정이 깔리고, 완전한 부정을 바탕으로 긍정이 드러나는 쌍차쌍조가 논리적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중도의 구현으로 직접 확인되는 실경계라는 것이다. 

 

기왓장의 광명과 황금의 실색失色

 

쌍차한 쌍조, 쌍조한 쌍차의 동시성에 대한 강조는 수시의 승단에서 더욱 강조된다.

 

기왓장 부스러기마다 광명이 나고[瓦礫皆生光]

진금眞金이 문득 빛을 잃으니[眞金便失色]

누른 머리 부처는 삼천리 밖으로 물러서고[黃頭退三千] 

푸른 눈 달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碧眼暗點頭]

 

성철스님은 이 문단에 대해 그것이 상식에 위배되는 비논리적 표현임을 스스로 지적한다. “햇볕이 빛나고 유리병이 빛난다고 하면 모르지만 기왓장 부스러기, 깨진 돌조각이 어떻게 빛을 발할 것이며, 그 빛이 휘황한 진금이 빛을 잃어 캄캄하다니 이 무슨 말”이냐는 것이다. 그 자체가 순도 높은 힌트다. 성철스님이 밝힌 바와 같이 이 두 구절은 상식과 논리에 위배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 두 경계는 일체의 분별이 사라진 대무심 경계, 즉 쌍차의 풍경이 된다.

 

이것을 내용적으로 다시 살펴보면 “기왓장의 광명”은 그 존재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쌍조이고, “진금이 빛을 잃음”은 쌍차이다. “기왓장의 광명”이라는 쌍조의 측면은 사람을 살리는 검[活人劍]에 비유되고, “진금이 빛을 잃는 일”이라는 쌍차의 측면은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에 비유된다. 당연히 진정한 활인검은 진정한 살인도와 둘이 아니다. 이 둘 아닌 차원에 진입하면 “부처는 물러서고”, “달마는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사진 3. 백련암 원통전 앞의 성철스님.

 

그래서 성철스님은 “누른 머리 부처는 삼천리 밖으로 물러서고, 푸른 눈 달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고 했다. 여기에서 성철스님은 묻는다. 불법의 화신인 석가모니가 왜 물러서야 하느냐는 것이다, 임제나 덕산 같은 대선지식이 왜 기어서 도망을 쳐야 하느냐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궁극의 차원에 대한 언어도단적 표현이지 둘 사이의 우열을 가르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부처의 물러남과 달마의 끄덕임은 같은 차원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이지 양자 간의 우열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없다. 왜 부처가 물러서는가? 쌍차·파정·살인도의 측면에서는 부처와 조사라는 견해조차 사라지고 하늘과 땅의 분별조차 무의미해진다. 그러므로 부처조차 물러서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달마는 왜 고개를 끄덕이는가? 쌍차라 해서 부처도 없고, 달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허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쌍차·파정·살인도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쌍조·방행·활인도의 측면에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그것은 모든 분별이 사라져 완전한 무심까지 내려놓고 다시 나아갈 때 만나게 되는 활발한 되살아남의 풍경이다. 성철스님은 이것을 내외명철한 대무심지라고 부른다.

 

만약에 진법眞法을 득문得聞하고 미망迷妄의 암운暗雲을 스스로 제거하면 내외가 명철明徹하여 진여자성眞如自性 중에 만법이 개현皆現하나니 견성한 사람도 이와 같다. - 『선문정로』

 

“진여자성眞如自性 중에 만법이 개현皆現”한다고 했다. 무심의 경계에서 하나의 자성에 귀납된 만 가지 현상이 왜곡없이 그 모양을 드러내는 일이 견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물러나는 일만 있고 달마가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없다면, 그러니까 “일념불생의 대사지大死地에서 활연대활豁然大活하지 않으면” 그것은 단멸공의 경계가 된다. 진공묘유, 쌍차쌍조가 아니면 견성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앎과 알지 못함의 전도

 

다음으로 수시의 전단轉段을 보자. 기승전결의 구조를 취하는 시의 전구轉句가 그렇듯이, 이 게송의 전단轉段 역시 언어와 경계의 표현에 있어서 눈에 띄는 전환이 일어난다.

 

이 도리를 알면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지며[會得則七顚八倒]

이 도리를 알지 못하면 삼두육비三頭六臂이니 어떠한가?[不會則三頭六臂, 作麽作麽]

 

“안다고 하면[會得則]”을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고꾸라짐”의 경계로 받았고, “모른다고 하면”을 “삼두육비”로 받았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고꾸라짐”은 칠전팔도七顚八倒니까 전도망상이다. “삼두육비”는 번뇌를 조복받는 명왕들이나 지혜를 실천하는 보살들의 신체적 특징이다. 보현보살이 삼두육비의 형상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여러 명왕들이 3두6비, 혹은 4두8비 등의 다면다비多面多臂 형상으로 묘사된다. 머리가 셋이므로 비춤이 전면적이고, 손이 여럿이므로 실천이 자재하다.

그러니까 ‘앎=망상전도’, ‘알지 못함=밝은 비춤과 자재한 실천’의 관계가 된다. 역시 논리적 어긋남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먼저 ‘앎[會]’을 보자.

 

성문聲聞은 불타의 성심聖心을 모르니 공정空定에 주착住著하여 있고, 모든 보살은 공空에 침잠沈潛하고 적寂에 체류滯留하여 불성을 보지 못한다. 만약에 상근중생上根衆生이면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를 받아서 언하言下에 요연了然히 영회領會하여 본성을 돈오하느니라. - 『선문정로』

 

여기에서 말하는 영회領會가 바로 ‘앎[會]’이다.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와 똑같이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계회契會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위 『선문정로』에 인용된 바, 마조스님의 법문에서는 “성문과 보살도 알지 못하는 불성을 상근중생이 선지식의 말을 듣고 단번에 안다[領會]”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앎=망상전도’, ‘알지 못함=밝은 비춤과 자재한 실천’과 같이 앎을 부정하고 알지 못함을 긍정했다. 만약 그것이 분별적 앎을 내려놓고 무분별적 모름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선수행의 기본을 밝힌 것이라고 하면 말이 된다. 그러나 하나를 긍정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분별적 차원의 일일 뿐이다. 『본지풍광』에서는 조사들의 법거량을 우열로 판단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앎=망상’, ‘모름=신통묘용’의 표현을 앎(분별)이 모름(무분별)보다 못하다는 식의 우열판정으로 볼 수는 없다. 어떻게 보아도 그것은 앎과 모름을 넘어선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쌍차한 쌍조의 경계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눈앞의 풍경과 눈 밖의 경계 

 

수시 결단結段의 두 구절에서는 결론을 제시한다.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뚫고[紅霞穿碧海]

눈부신 해는 수미산을 돈다[白日繞須彌]

 

스승 운문선사의 경계를 노래한 원명연밀圓明緣密 선사의 게송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게송은 무심을 뚫고 새롭게 되살아는 사중득활의 풍경을 제시한다. “붉은 노을이 바다에 투영되는” 풍경은 “붉은 노을이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紅霞穿碧落]” 풍경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풍경 묘사를 해놓고 그것을 단순한 풍경의 묘사로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이 이 법문의 전제다.

 

경계를 읊은 것으로 알면 두 분의 근본 뜻은 끝내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깨쳐 자성을 바로 알아야만 비로소 그 뜻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경계를 표현한 말로 알아 공연히 이리저리 궁리하고 추측한다면 고인의 뜻은 끝내 모르고 맙니다. 

- 『본지풍광』, 「1. 덕산탁발」

 

경계, 즉 풍경을 표현해 놓고 풍경을 표현한 말로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고 막는 여기에 이 공안의 핵심이 있다. 이것은 직접 실상을 가리켜 보인 운문선사, 그것에 노래로 호응한 연밀선사, 다시 이렇게 인용하여 청법대중을 상대하는 성철스님의 마음을 직접 알아야 풀리는 문제다. 요컨대 스스로 자성에 눈을 뜰 때라야 저절로 알게 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까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의 서문에서 “쉬어가고 또 쉬어가니, 절름발이 자라요 눈먼 거북이로다. 있느냐, 있느냐? 문수와 보현이로다.”로 시작하는 게송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뜻을 풀어준 일이 있다. 

 

쉬고 또 쉬어 전체를 다 쉬니 절름발이 자라요 눈먼 거북이며, ‘있느냐, 있느냐?’ 하니 문수와 보현입니다. - 『백일법문』

 

이에 의하면 “쉬고 쉰다”는 일체의 분별이 사라져 한 걸음도 나아갈 곳이 없는 쌍차의 자리다. “절름발이 자라, 눈먼 거북이”의 형상이 가리키는 바다. 이에 비해 “있느냐, 있느냐”는 “쉬고 쉰다”의 대구, 즉 그 상대어로 제시된 것이라고 했으니까 우주법계 만사만물이 걸림없이 진리를 드러내는 쌍조의 자리다. 우주법계 전체가 문수의 큰 지혜와 보현의 큰 실천이 장애 없이 구현되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수시의 마지막 구절을 대입해 보면 “붉은 노을 비치는 바다”의 풍경은 문수와 보현을 세우는 대긍정의 경계에 상응한다. 그와 짝으로 제시된 “흰 해는 수미산을 돈다”는 수시의 구절 또한 마찬가지다. 우주법계 전체가 다 그것이므로 따로 찾을 곳이 없다. 그러니까 “붉은 노을 비치는 바다”(눈앞의 경계)와 “수미산을 도는 해”(눈 밖의 경계)는 쌍차의 다른 측면인 쌍조의 풍경이다. 앞의 구절에서 “앎과 모름”에 대한 상식적 맥락을 뒤집어 쌍차의 경계를 표현하고, 뒤에서 전체로서 되살아나는 쌍조의 풍경을 제시한 것이다. 이렇게 두 번의 부정을 행한 뒤에 다시 두 번의 긍정으로 그것을 받는 것은 성철스님 게송의 한 패턴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쌍차가 곧 쌍조인 경계를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러한 쌍차쌍조의 이치가 구현된 사건이 「덕산탁발」의 공안이다. 그 본칙의 독해에 수시의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지면을 달리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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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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