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왕실 비빈과 사족 여성을 위한 비구니원의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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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5 년 1 월 [통권 제141호] / / 작성일25-01-04 22:00 / 조회158회 / 댓글0건본문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수축할 때 고려의 유풍을 이어 궁궐 내에 왕실 원당으로써 내원당內願堂을 세우고, 궁궐 밖에 왕실 비빈과 사족 여성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을 두었다. 정업원은 안일원安逸院이라고도 불렀다.
비구니 처소 정업원과 철폐
정업원은 고려 의종 대부터 그 명칭이 확인되며 왕실의 비빈이나 사족 여성들 가운데 출가자들이 머물렀던 비구니 사찰이다. 그 창건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164년(의종 18)에 의종이 정업원에 행차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볼 때, 고려 초부터 도성 내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강화도 천도 이후인 1251년(고종 38)에는 박훤朴暄의 집을 정업원으로 삼아 도성 안에 있던 비구니를 살게 하였다. 충숙왕 때에는 남편을 살해한 황주목사 이집李緝의 부인 반씨潘氏의 머리를 깎여서 정업원에 머물게 하였으며, 조선이 건국될 무렵에는 비구니 묘장妙藏이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다. 조선 건국 후 한양 도성에 건립된 정업원의 비구니들 역시 대부분 왕족이거나 사족士族들이었다.
혜화 궁주 이씨의 상에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다. 궁주는 고려 시중侍中 이제현의 딸이다. 공민왕이 아들이 없어 후궁으로 뽑아들여 혜비惠妃에 봉하였으나, 뒤에 비구니가 되어 정업원에 머물러 있었다. 쌀·콩 3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로 주고, 소도군昭悼君의 처 심씨를 대신 정업원의 주지로 삼았다.
- 『태종실록』 8년(1408) 2월 3일.
1408년(태종 8)에 정업원 주지로 있던 공민왕의 후비가 사망하자, 소도군의 처 심씨를 정업원의 주지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에는 상왕이었던 정종 왕비의 형[姉]이 정업원 주지로 있었다.[『태종실록』 11년(1411), 9월 27일] 그런데 국초부터 대신들의 정업원 혁파 요구가 잇따랐다.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국가에서 유학을 숭상하여 이단을 물리침에 이미 사원을 삭제하고 또 그 전민田民을 감하였으나, 내원당과 정업원만은 주저하며 아직도 혁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정업원 역시 고려조 때 불교에 혹하여 설치한 것으로, 저 비구니들은 모두 그 뜻을 얻지 못하고서 부처에게 투신한 자이니, … 내원당과 정업원의 1년의 비용을 계산한다면 모두 1백 석이나 됩니다. … 정업원을 혁파하여 그 토전과 장획을 모두 속공屬公하게 하소서. …” 하였다. 의정부에 내려 의논케 하니, 위의 조항 중에 내원당은 명분과 실제가 서로 달라 혁파함이 마땅하다는 결론을 얻었으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곧 말하기를, “정업원을 갑자기 혁파함이 불가하다.” 하였다.
- 『태종실록』 12년(1412) 7월 29일.
태종은 대신들로부터 내원당과 정업원의 혁파 요구를 받고, 내원당의 혁파 요구만을 들어주고 정업원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정업원과 관련한 음사淫事가 계속 보고되자, 세종은 1448년(세종 30)에 철폐하였다.
의정부에서 예조의 보고 내용을 아뢰기를, “정업원을 점차로 혁파할 것을 이미 명하였습니다. 양반의 부인이 남편이 죽은 뒤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는 것은 정절을 온전히 하려고 함이오니, 굳이 가족과 친족을 떠나서 용렬한 비구니들과 어울리면서 밖에서 무리 지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또 주지의 호칭이 비구승과 구별이 없사오니 더욱 더 편안하지 못합니다. …”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30년(1448) 11월 28일.
정업원을 복원한 세조와 문정대비
그러나 왕실 후궁과 사족 여성의 출가는 지속되었다. 세종이 사망하던 저녁에 후궁으로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 사람이 대략 10여 명이나 되었다.(문종 즉위년, 1450년 2월 27일) 당시 후궁의 출가가 이어지자 조정 대신들은 이를 금지하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집현전 부제학 신석조 등은 대행왕(문종)의 후궁들이 머리를 깎았다는 말을 듣고 의논하기를, “신 등이 일찍이 대행왕의 하교를 친히 들었는데 말씀하기를, ‘세종의 후궁이 비구니가 된 것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 뒤로는 반드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으니, 지금 후궁이 비구니가 되는 것은 실로 대행왕의 뜻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허후에게 말하여 황보인·김종서에게 고함으로써 그치게 하기를 청하였다.
- 1452년(단종 즉위년) 5월 18일.
세종 대에 정업원을 철폐하였지만, 세종과 문종의 후궁과 사족 여성들의 출가가 이어졌다. 이에 왕실 비빈들은 세조에게 정업원의 복원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세조는)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과부와 외로운 여자들이 대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는데, 비구니란 실로 궁박한 무리들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정업원을 세우고 이곳에 모여 살게 하여 이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 하였다.
- 『세조실록』 3년(1457) 9월 8일.
불교 신앙이 깊었던 세조가 왕실 비빈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정업원을 복원하였지만, 세조가 사망한 후 조정 대신들은 또다시 정업원을 철폐하고 왕실과 사족 여성의 출가 금지를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대사헌 김승경 등이 아뢰기를, “수춘군의 부인이 이제 정업원의 주지가 되었으니, 종실의 부녀자로서 비구니가 된 것만 해도 벌써 잘못인데, 더구나 주지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매우 마땅하지 못합니다.”
- 『성종실록』 13년(1482) 2월 2일.
대신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국왕들은 정업원을 유지하였다. 성종은 “정업원은 국초부터 있던 것이므로 없앨 수 없다.”고 하였다.[『성종실록』 18년(1487) 2월 3일] 그러나 연산군 대에 정업원은 다시 철폐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대궐 서편 정업원 같은 데의 인가를 아직 철거하지 아니한 것이 있으니 오늘 안으로 즉시 철거시키되, 그렇지 못하면 뒤로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 『연산군일기』 10년(1504) 8월 11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대비는 연산군 대에 철폐되었던 정업원을 다시 복원하고자 하였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 전날의 정업원을 인수궁에 소속시켰다가 사무에 여유가 있거든 아울러 수리하여 선왕의 후궁 중에 연고가 생기는 이를 거기에 이주시키도록 하라. 또 정업원 수리에 소요되는 목재와 기와는 호조와 내관이 동시에 자세히 조사하게 하라.”고 하였다.
- 『명종실록』 1년(1546) 7월 26일.
이때 문정대비의 명령은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쳐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정업원이 다시 복원된 것은 1550년(명종 5) 3월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요구가 선조 대까지 지속되었고, 마침내 1612년(선조 40)에 폐지되고 더 이상 복원되지 못하였다. 이후 정업원이라는 명칭은 복원되지 못하였지만 비구니들이 머물던 자수원과 인수원은 현종 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임금이 도성 내 두 비구니원의 혁파를 명하였다. 40세 이하의 비구니는 모두 환속시켜 결혼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늙어서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은 모두 도성 밖 비구니원으로 내보내되 40세가 넘었더라도 환속하려는 자는 허락하라고 하였다.
- 『현종실록』 2년(1661) 1월 5일.
백곡처능의 「간폐석교소」
현종이 혁파한 두 비구니원은 자수원과 인수원을 말한다. 선조 대에 혁파되었던 정업원을 대신하여 비구니원으로서 자수원과 인수원이 운영되고 있었으나, 현종 대에 이르러 두 비구니원을 철폐하고 40세 이하의 비구니는 환속시켜 결혼하도록 하고 그 이상의 비구니는 도성 밖 비구니원으로 내보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당시 현종의 비구니원 철폐 명령에 항의하며 백곡처능(1617~1680)이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렸다.
삼가 조정의 소식으로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보았는데, 비구와 비구니를 사태沙汰(가려냄) 시키도록 하여 비구니는 이미 환속시켰고, 비구 또한 폐지를 의논했다고 하니, 신은 참으로 어리석어 임금의 생각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 자수원과 인수원은 궁궐 밖에 있으니 즉 선대 왕후의 내원당입니다. 봉은사와 봉선사 두 사찰은 능침 안에 있으니, 즉 선왕先王의 외원당外願堂입니다. 내외를 구분 지은 것은 역시 남녀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루의 아침저녁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로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제도입니다. 사찰은 국가와 더불어 흥하였고 국가와 함께 망하였습니다. 사찰이 있으면 국가의 경사요, 사찰을 훼손하면 국가의 재앙입니다.
- 『대각등계집』, 한국불교전서 제8책.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의 직위에 있던 처능은 조정에서 도성 내에 있던 자수원과 인수원을 철폐하고 비구니들을 환속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에게 그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미 조정에서 결정된 사항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로써 도성 내의 비구니원은 더 이상 복원되지 못하였다. 다만 도성 밖 성저십리城底十里 혹은 한양 인근에는 비구니 사찰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가령 성현의 『용재총화』(1525)에 의하면, 오늘날 서울의 만리동에서 충정로 3가로 넘어가는 약현藥峴이라는 고개에 비구니원이 있었다고 하였다.
일찍이 성 안의 니사尼社는 정업원만 남겨두고 헐어 버리고 모두 동대문 밖 안암동 등으로 내쫓았기 때문에 서너 채만 남아 있었다. 남대문 밖 종약산 남쪽에 옛날부터 한 채가 있었는데, 그 뒤에 두 비구니가 각기 그 곁에 작은 집을 짓고 여기에 거처하더니, 지금은 10여 채가 되었다.
- 『용재총화』 권8.
그 후 영조대에 이르러서는 정업원이 있었던 위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영조는 정업원이 있던 곳을 찾아서 비석을 세웠다.
임금이 정업원의 옛터에 누각을 세우고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내렸다. 정업원은 흥인문 밖 산골짜기 가운데에 있는데, 남쪽으로 동관왕묘와 멀지 않았으며, 곧 연미정동으로 단종 대왕의 왕후 송씨가 지위를 내어준 후에 거주하던 옛터이다.
- 『영조실록』 47년(1771) 8월 28일.
현재 영조 대에 세운 ‘정업원구기’가 동망봉東望峰(성북구 보문동6가와 종로구 숭인동에 걸쳐 있는 산)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곳이 정업원이 있던 옛터라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실록』의 여러 기록을 통해 정업원이 원래 응봉鷹峰(성동구 응봉동과 용산구 한남동에 걸쳐 있는 봉우리) 아래 창경궁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업원구기가 동망봉 아래에 세워진 것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동망봉에 있었던 사실과 또한 그가 정업원 주지로 있었던 사실이 얽혀서 잘못 전해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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