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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점문과 돈문의 발원지는 12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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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5 년 2 월 [통권 제142호]  /     /  작성일25-02-04 09:10  /   조회3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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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를 형성하는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은 두 가지 상반되는 맥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명 연기와 지혜 연기가 그것이다. 무명 연기는,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이,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을 조건으로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識]가 발생하고 … ”라는 맥락이다.(주1) 지혜 연기는,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이 소멸하고,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이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識]가 소멸하고 …”라는 맥락이다.(주2)(주3)

 

12연기의 두 계열과 점문漸門·돈문頓門

 

지혜 연기의 구절은, “(사실 그대로 아는)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에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이 생겨나고,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이 생겨나기 때문에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에 따르는 알음알이[識]’가 생겨나며 …”라고 바꾸어 읽을 수 있다. <무명이 소멸한다>라는 것은 <지혜가 생겨난다>라는 말의 부정형 서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 연기는 명지明知(vijjā/ñāṇa, 사실 그대로 앎)가 드러남’이 조건이 되어 펼쳐지는 인식과 삶의 인과적 전개다.

 

무명 연기는 ‘무명이 조건이 되어 전개되는 인과 계열’이고, ‘무명이라는 전제가 유효한 인과 범주’다. 그런데 점문漸門은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관점·이해가 유효한 계열·범주’ 안에 있으면서 사유·욕망·행위의 내용을 바꾸며 걸어가는 길>이다. ‘출발점에 이어지는 길 위에서 발길을 옮겨가는 행보’인 것이다. 따라서 무명 연기의 길은 점문漸門의 길이다. 무명 연기의 주체인 중생 인간은, ‘무명의 끈을 붙들고 가는 사유·욕망·행위의 인과 계열’인 점문의 길에서 삶과 세상을 구성해 간다.

 

이에 비해 지혜 연기의 주체인 ‘구도의 보살 인간’은, ‘무명의 끈을 붙들고 가는 길’로부터 ‘무명의 끈을 놓아버리는 길’로 ‘한꺼번에’ ‘통째로’ 옮겨간다. 무명의 끈을 잡고 가던 길을 버리고, 그 끈을 놓아버리는 새길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돈문頓門은, <관점·이해를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것’으로 바꾸어 기존 사유·욕망·행위의 계열·범주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온 후,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사유·욕구·행위의 계열·범주’에서 삶을 재구성하는 길>이다. 지혜 연기의 길과 돈문의 길은 ‘출발점이 달라진 길 위에서 발길을 옮겨가는 행보’라는 점에서 같다.

 

그런데 <무명의 끈을 놓아버린다>라는 것이, <‘무명에 오염된 삶’을 ‘명지의 삶’으로 완전히 바꾸었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무명의 끈에 속절없이 질질 끌려다니지는 않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12연기의 ‘지혜 연기’ 구절의 의미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지혜 연기는, 해탈·열반을 완성하는 단선적 단층 인과가 아니라, 해탈·열반으로 이어지는 다층적 인과 계열이다. 나아가다가도 물러나고 물러났다가도 다시 나아가는 수행 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지혜 연기의 인과 계열에 진입한 이후에 비로소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수행 길’에 오르는 것이다. 돈문 안에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갈래 수행 길을 만나는 것과도 같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싯다르타 태자(3세기 말, 인도 뉴델리국립박물관, 스투파의 숲). 사진: 서재영.

 

‘무명의 끈을 붙드는 사유·욕망·행위의 인과 계열’이 무명 연기이고, ‘무명의 끈을 놓아버리는 사유·욕망·행위의 인과 계열’이 지혜 연기다. 그런데 지혜 연기는 순전한 내용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무명 연기가 다시금 수시로 끼어드는 길이다. 애써 놓았던 무명의 끈을 다시 붙들고 걸어가는 일이 반복되는 길이다. 그럴 때마다 다시 무명의 끈을 놓아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한 길이다. 돈문의 길에 들어서도 돈오와 점수의 수행을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과도 같다.

 

‘점문의 길인 무명 연기’와 ‘돈문의 길인 지혜 연기’를 가르는 것은 무명이다. 점문의 길을 하염없이 걷는 것은 무명의 끈을 움켜쥐기 때문이고, 돈문의 길에 오르는 것은 무명의 끈에 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명이 무엇이길래 인생길을 ‘점문의 길’과 ‘돈문의 길’로 가르는 것일까?

 

무명無明(avijjā)은 언어인간 특유의 현상

 

인간의 모든 경험은 ‘인식적認識的’이다. ‘인식적 경험’이라는 말은, <언어를 통한 개념적 인지가 경험 발생의 토대 조건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12연기의 무명 연기는 ‘무명에 매인 인식적 경험의 인과적 발생’을 설하고 있다. 따라서 무명 연기는, <언어에 수반하는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함’(무명無明, avijjā)에 매인 인식적 경험의 인과적 전개>에 관한 통찰로 읽을 수 있다. 또 12연기의 지혜 연기는, <언어에 수반하는 무지를 극복한 ‘사실 그대로 앎’(명지明知, vijjā/ñāṇa)에 근거한 인식적 경험의 인과적 전개>에 관한 통찰이다.

 

12연기를 ‘언어인간 특유의 인식적 경험의 문제’로 읽으면, 12연기가 지닌 ‘지금 여기의 삶에 관한 치유력’이 잘 드러난다. 특정 종교나 교파의 시선에 국한된 호소력이 아닌, 보편적·합리적 호소력을 지닌 의미 해석이 가능해진다. 12연기를 ‘과거생·현재생·미래생에 걸친 윤회의 태생학적 인과를 설명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부파불교 유부의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과거생·현재생·미래생에 걸친 두 겹의 인과설)이 읽어 내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이 드러난다. 대승의 유식 연기나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연기는 12연기를 ‘언어인간 특유의 인식적 경험의 인과적 전개’로 읽는 시선에 부합한다.

 

무명의 핵심은 ‘언어에서 발생한 동일성 관념’ 

 

무명無明(avijjā, 산스크리트어 avidyā)은 √vid(알다)로부터 파생한 단어의 부정형으로, ‘알지 못함(ajñānam)’ 혹은 ‘어리석음(saṃmoha)’을 뜻한다. 따라서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함’, 즉 ‘이해의 근원적 결함’이 무명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인도 전통철학에서는 무명을 ‘미혹 세계를 창조하는 환술적 힘(māyā)’으로 간주한다. 우파니샤드 전통의 인도 철학은 무명을 신비와 신화적 마술의 장막으로 감쌌다. 붓다는 그 장막을 벗겨버리고 무명을 ‘경험 현상의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인식적 무지’로 포착했다. 무명을 언어인간의 진화 과정과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는 ‘합리의 길’을 연 것이다.

 

무명은, 우주에 편만해 있으면서 세상을 만들어 내고 제멋대로 주무르는 거대 마법魔法이 아니다. 무명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적 앎’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인간의 인식적 경험에 대한 여러 학문 분야의 탐구 성과는, ‘현상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원초적이고도 장기적인 흠결을 안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흠결의 핵심은 ‘동일성 관념에 의한 왜곡’이다. 세계의 모든 현상은 ‘관계와 변화’의 법칙에서 예외가 없다. ‘스스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것’이거나 ‘불변의 것’은 본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앎과 이해는 그런 현상에 ‘독자성’과 ‘불변성’을 부여한다. 언어 때문이다. ‘언어를 통한 차이·특징의 분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동일성 관념’이다. 사물과 현상을 ‘독자적인 것’ ‘불변의 것’으로 간주하려는 인식은 이 동일성 관념의 표현이다. ‘동일한 것’은 곧 ‘독자적이며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로 변화하는 현상들 가운데 유사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언어다. 유사한 차이나 특징들을 언어에 담아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 무수한 차이·특징들의 구분과 비교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동일화로 인한 차이·특징들의 선명한 구분과 비교는 판단·평가·분석·예측 능력을 발현시키고, 급기야 ‘언어로 분류된 차이·특징’(개념)들 사이에 작동하는 법칙성을 포착하는 ‘이해 능력’을 고도화시킨다. ‘인간의 인식적 능력’은 그렇게 동일성 관념과 더불어 발전한 것이다.

 

무명의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함’은, ‘언어에서 발생한 이해 능력의 가장 깊숙한 지점에서의 흠결’이다. 그리고 그 흠결의 핵심부에는 ‘동일성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무지 가운데, ‘언어에서 발생한 동일성 관념으로 모든 현상을 왜곡하는 것’보다 더 깊은 수준의 원초적 무지가 있을까? 무명은 <‘언어에서 발생한 동일성 관념’ 때문에 사물과 현상에 대해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함’>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언어를 매개로 수립된 동일성 관념’이 무명無明(avijjā,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함)의 구체적 내용을 발생시키는 핵심 조건이다. ‘언어에서 발생한 동일성 관념’과 그에 기초한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는 관점과 이해’ - 이것이 무명의 핵심이다. 그리고 언어인간이 다시 그 동일성 관념을 제거하는/제거한 것이 명지明知(vijjā/ñāṇa, 사실 그대로 앎)이다.

 

세계는 ‘가변적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현상[緣起法]’이기에 ‘변화와 관계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를 ‘동일성 관념’으로 채색하여 ‘불변의 것’·‘독자적인 것’이라 오인하는 것, - 붓다가 무명이라 일컫는 것은, 이 사태에 대한 통찰과 직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이 언어인간의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함’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을 동일성 관념으로 왜곡시키는 것도 언어능력 때문이고, 그 동일성 관념의 허구를 해체할 수 있는 것도 언어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언어인간이 ‘무명·윤회의 주체’인 동시에 ‘해탈·열반의 주역’이다.

 

무명의 핵심부에 자리 잡은 것을 ‘동일성 관념’이라 본다면, ‘무명 연기의 길’을 걷던 발길을 ‘지혜 연기의 길’로 통째로 옮기는 일이 ‘지금 여기’에서 가능해진다. ‘동일성 관념’을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을 ‘관계 속에서 변하는 조건에 의한 발생’으로 이해하는 연기 관념으로 바꾸면 ‘한꺼번에’ 길을 옮길 수 있다.

 

그런데 곧 난관에 봉착한다. 학습과 성찰을 통해 동일성 관념이 언어인간의 원초적 무지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하자. 그리고 연기법이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도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동일성 관념’을 ‘연기 관념’으로 대체하였다고 하자. ‘동일성 관념’이 비록 본능처럼 깊이 새겨진 것이라 해도 거부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적어도 이해와 관점의 측면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하여 ‘무명 연기의 길’을 버리고 ‘지혜 연기의 길’로 한꺼번에 발길을 옮겼다고 하자. 그러면 무명의 그늘, 그 동일성 관념의 지배력에서 완전히 해방되는가? 아니다. 이해와 관점이라는 지적 측면에서는 ‘한꺼번에 깨달음[頓悟]’이라 할 수 있는 변화가 있지만, 삶의 실제는 한꺼번에 변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명의 동일성 관념이 또다시 실존을 압도한다. <불변하는 독자의 것은 본래 없다>라고 알지만, 여전히 <나와 내 것을 ‘불변하는 독자적 소유물’로 확보하려는 사유·욕망·행위와 그로 인한 삶의 불안 및 훼손>이 일상을 이끈다.

 

이 난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모처럼 진입한 지혜 연기의 행보가 빛바랜다. 돈문의 길에서 누릴 수 있는 ‘진리다운 이로움’이 제약된다. 어찌해야 하는가? 부처님이 일러주신 대로 하면 된다. ‘문제를 발생시키는 조건들’(연기緣起)에 대한 성찰에서 출구가 보인다. 이에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해와 마음’의 의미와 관계를 주목한다. 

 

<각주>

(주1) 순관順觀의 내용이다. 

(주2) 역관逆觀의 내용이다.

(주3) 『상윳따 니까야』 「연기 경(Paṭiccasamuppāda-sutta)(S12:1)/각묵 번역 『상윳따 니까야』 제2권, pp.85-91; 「분석 경(Vibhaṅga-sutta)」(S12:2)/각묵 번역 『상윳따 니까야』 제2권, pp.92-103. 필자가 번역문의 ‘의도적 행위들(行)’을 ‘의도 작용들(行)’로 고치고 괄호 내용을 삽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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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고려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취득. 울산대 철학과에서 불교, 노자, 장자 강의.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원효의 화쟁철학』, 『원효의 통섭철학』,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
twpark@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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