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속의 불교 ]
『님의 침묵』 탈고 100주년, ‘유심’과 ‘님의 침묵’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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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 2025 년 4 월 [통권 제144호] / / 작성일25-04-04 15:51 / 조회24회 / 댓글0건본문
서정주의 시에 깃들어 있는 불교가 ‘신라’라는 장소를 바탕으로 하는 불교, 『삼국유사』의 설화적 세계를 상상의 기반으로 삼는 불교라면, 한용운의 시에 담긴 불교는 ‘형이상학’이나 ‘초월’ 혹은 ‘공空’과 ‘무無’의 영역에 있는 불교를 ‘색色’이나 ‘일상’ 혹은 ‘중생衆生’의 위치에서 끌어안고 하나가 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서정주의 신라 정신 역시 ‘욕계 제2천’이라는 ‘피’와 ‘육체’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중생’의 불교를 그 시적 수사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한용운의 시적 언어는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불교적인 역설’이 끌어안은 ‘중생’ 혹은 ‘화엄’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어쩌면 한용운의 시는 불교적인 ‘근원’에 갇혀서 오히려 그 ‘향香’과 ‘색色’을 잃어버리고 관념에 빠져 버릴 위험 또한 큰 것이 사실이다. 이런 ‘관념’과 ‘예술’의 경계는 ‘찰라’의 경지와 같은 것인데, 그 ‘찰라’는 한용운에게는 ‘시’와 ‘선’, ‘시적 진리’와 ‘최고의 미’가 맞부딪치는 시적 ‘현현’의 ‘순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찰나는 시간의 개념이 아니고 모든 경계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절대’를 함축한 ‘순간’, 모든 시공간이 사라진 ‘정지’, ‘무’의 상태를 암시한다.
님의 ‘침묵’과 ‘이별’이 의미하는 것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전문
「님의 침묵」은 한용운이 1925년 8월 백담사에서 탈고하여, 이듬해 회동서관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올해는 『님의 침묵』 탈고 100주년이고 2026년은 출간 100주년이 된다. 『님의 침묵』의 탈고와 출간이 지닌 각별한 의미는 이 시집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문학사적인 기적’에 해당할 만한 이례성과 예외성에 의해서도 부여된다. 불교와의 연관성, 승려 시인,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종교적 형이상학과 윤리, 보편적 신념으로 확장하도록 이끌어 냈다는 점, ‘님’이라는 2인칭 대명사의 시적 활용, 미와 진리의 동시적 현현 가능성에 대한 모색 등 이 한 권의 시집이 지닌 문학사적 성취는 1920년대적인 상황 아래에서는 거의 ‘도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위에 인용한 시 「님의 침묵」은 잘 알려져 있듯이, 시 한 편의 구조가 시집 전편에 실린 시 88편의 배열 구조와 동일하다. “이별, 슬픔, 희망, 기다림, 만남에 대한 믿음”의 형태는 실제로 시집 전체의 시편이 지닌 주제들의 배열과 구성의 형태가 거의 흡사하다. 결국, 표제작의 내용 속 ‘침묵’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님의 부재 상황’을 대표하는 단어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침묵’과 ‘이별’의 상황이 단순한 시련이나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일종의 깨달음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깨우침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수행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깨우침을 위해서는 ‘이별’이 필요하고 그 이별의 시간 속에 겪어야 하는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진리의 ‘드러냄’ 혹은 ‘각성’을 위한 전제이거나 증거에 해당된다.

‘침묵’과 ‘이별’, 즉 님의 부재가 없다면 역설적이지만 ‘사랑’도 ‘미’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불교적인 역설이 이 순간 시 속으로 들어온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색즉시공 공즉시색’처럼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은 역설적이지만 이 시집 전편에 걸쳐서 상호적인 작용을 주고받으면서 완성과 승화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진리와 깨달음에 다가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 사랑의 진행 과정이기 때문에 이 시집은 남녀의 사랑을 전제로 한 화법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적인 우주관과 세계관, 그리고 불교적 역설의 수사법을 완벽하게 구현해 낸다.
문학사에서 종종 거론되는 미스터리 중에 하나는 승려인 한용운이 왜? 시를 썼는가 하는 점이다. 『님의 침묵』 발간 이전에도 한시나 다소 관념적인 선시를 쓴 적이 있기는 하지만 『님의 침묵』 시편처럼 전적으로 완성도 높은 자유시, 그리고 불교 정신을 육화하여 사랑의 담론으로 재현하는 작품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88편 전체가 마치 하나의 ‘기적’의 결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1926년까지 발간된 시집의 목록을 살펴보면, 『해파리의 노래』(김억, 1923, 최초의 개인 창작시집), 『아름다운 새벽』(주요한, 1924), 『흑방비곡』(박종화, 1924), 『조선의 마음』(변영로, 1924), 『진달래꽃』(김소월, 1925), 『국경의 밤』(김동환, 1925), 『봄의 노래』(김억, 1925), 『승천하는 청춘』(김동환, 1925) 등 8권이 있고, 번역 시집으로는, 「오뇌의 무도』(김억, 1921), 『잃어진 진주』(아더 시몬즈, 김억 역, 1924), 『빠이론 시집』(전진현 역/최상희 역 두 개 판본, 1925)과 김억이 번역한 『ᄭᅵ탄자리』(1923), 『원정園丁』(1924), 『신월新月』 등 타고르 번역 시집 3권을 포함한 총 7권(빠이론 시집은 번역자만 다르고 같은 책임을 감안하면 6권)이 있다.

따라서 1919년 『창조』가 발간된 이후 동인지 문단을 거쳐 식민지 조선의 문학장이 근대적 제도로서의 ‘문단’을 구성하고 시형식의 근대성과 조선시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과 연관해서 보면, 『님의 침묵』의 출간은 먼저 간행된 여러 개인 시집과 번역 시집의 성과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향후 조선시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님의 침묵』 출간 100년의 의미는 이 점에서 문학사적으로도 조망이 가능하지만 왜? 불교가 초창기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그 미적, 인식적 중심에 놓이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불교와 현대성’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와 불교의 ‘유신維新’-‘심心’이 ‘님’이 될 때까지
심心은 심心이니라.
심心만 심心이 아니라 비심非心도 심心이니 심외心外에는 하물何物도 무無하니라.
생生도 심心이오 사死도 심心이니라.
심心이 생生하면 만유萬有가 기起하고 심心이 식息하면 일공一空도 무無하니라.
심心은 무無의 실재實在요, 유有의 진공眞空이니라.
심心은 인人에게 루淚도 여與하고 소笑 여與하나니라.
금강산金剛山의 상봉上峯에는 어하漁鰕의 화석化石이 유有하고 대서양大西洋의 해저海底에는 분화구噴火口가 유有하니라.
심心은 하시何時라도 하사하물何事何物에라도 심心 자체自體뿐이니라.
심心은 절대絶對며 자유自由며 만능萬能이니라.(주1)
인용한 시는 만해 한용운이 1918년 『유심』 창간호의 맨 앞에 발표한 「심心」이라는 작품이다. 아직 관념적인 언어와 서술이 두드러지지만, 그 내용은 『님의 침묵』의 「군말」을 떠오르게 할 만큼 흡사한 구석이 많다. 또한 6행의 단어와 문장은 전통적인 한학의 지식이 아니라 근대적인 과학과 지리학의 ‘학지學知’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점은 한용운의 유신維新과 새로운 지식에 대한 섭렵이 서로 상당한 친연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려준다. 앞에서 말한, 한용운은 왜 시를 썼는가와 불교가 초창기 한국 시에 어떠한 연유에서 중요한 인식적 기초를 제공했는가 하는 질문은 이런 ‘불교의 유신維新’이라는 기획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실제로 이 시의 핵심 내용인 ‘심’은 유심론唯心論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심’이 모든 유와 무의 경계를 넘어선 유일한 ‘절대’라는 생각은, ‘님’이 단순한 대상이거나 실체가 아니라 ‘마음’의 변형물로서 외부의 타자이지만 이미 타자가 아닌 존재, 즉 마음에 따라 그 가치와 실체가 결정되는 대상임을 알게 한다.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말은 ‘님’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에 절대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마음’임을 암시한다.
마음이 투영되어야 비로소 ‘님’이 드러나고 나타난다. 그리고 이 마음은 아마도 『님의 침묵』에서는 ‘사랑’의 완성으로 향하는 절대적 속성을 지닌다. 님이 ‘자유’, ‘만능’인 것처럼, 사랑도 님과 함께 완성될 때 비로소 절대와 자유와 만능을 얻는다. ‘님’과 ‘사랑’이라는 단어의 형이상학적 차원은 이 점에서 ‘유심唯心’이라는 생각에서 파생된 것이고 그 유심은 ‘연애’, ‘육체적 차원’의 사랑을 절대 자유와 만유萬有에 대한 사랑이라는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한용운의 시에서 ‘심’이 ‘님’이 되는 과정에는 타고르의 시와 아서 시몬즈의 시에 대한 김억의 번역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2) 아서 시몬즈의 『잃어진 진주』에 대한 김억의 번역에서 영향을 받아서 김소월의 ‘님’이 시적 언어로 정립되는 과정, 그리고 김억의 타고르 시 번역에서 나타나는 “~습니다”체 등은 『님의 침묵』의 핵심적 문체인 감탄사와 “~습니다”체, “님”이라는 2인칭 대명사의 사용의 복합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특히, ‘타고르’ 시의 송가 형태가 준 영향력과 별도로 김억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자가 타고르 시에서 2인칭 대명사를 ‘주主’라고 번역하고 있는데도, 한용운이 ‘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 선택이 다분히 의식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님의 침묵은 ‘송가’라기보다는 ‘깨달음’을 염원하는 ‘구도송’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주主’라는 단어가 ‘심心과 님’의 연관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절대와 자유와 만능’의 깨우침이라는 함의를 이 단어가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시에서 ‘님’은 이 점에서 김소월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매개로 한 나와 만유 사이의 경계 허물기, 숨은 진리의 현현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교적인 사유의 한 정점을 시적 언어예술로 구축한 놀라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
(주1) 용운, 「심心」, 『유심』 제1호, 1918. 9. 2~3쪽.
(주2) 김춘식, 「님의 시적 표상과 타고르」, 『선문화연구』,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21. 6. 12~16쪽. 최라영, 『김억의 창작적 역시와 근대성 형성』, 소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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