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일본 수묵화의 화성 셋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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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5 년 6 월 [통권 제146호] / / 작성일25-06-04 10:13 / 조회222회 / 댓글0건본문
일본선 이야기 18
예술은 진리를 향한 하나의 통로다. 우리는 오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예술적 상징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세계, 느낄 수 있지만 표현할 수 없는 세계,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절대적 세계에 접근하는 길이 예술인 것이다. 그 길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보여준 인물이 바로 셋슈(雪舟, 1420∼1506)이다. 그는 무로마치 시대(1336∼1573)의 선승이자 화승으로 일본 회화의 독자성을 구축했다. 심화心畫로서의 선화禪畵의 세계를 보여준 그를 화성畫聖으로 보는 이유다.
셋슈의 출가와 활동
그의 천재성은 어렸을 때의 전설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의 오카야마현 태생인 셋슈는 생가와 가까운 보복사寶福寺에 맡겨졌다. 불도 수행에는 관심이 없던 그는 주지의 노여움을 사서 본당의 기둥에 묶이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주지가 가보니 셋슈의 발아래 쥐가 한 마리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쥐를 쫓아내려고 가까이 다가갔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쥐는 어린 셋슈가 눈물로 그린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근세의 화가 카노 에이노(狩野永納)가 쓴 『본조화사本朝畵史』에 등장한다.

10세 무렵 교토의 임제종 상국사에 주석하던 당대 최고의 선승 슌린 슈토(春林周藤)의 문하에 들어갔다. 도요(等楊)라는 호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화승으로 유명한 덴쇼 슈분(天章周文)을 사사했다. 그는 한화漢畫의 조祖로 불렸던 다이코 조세츠(大巧如拙)의 제자였다. 상국사는 중국과의 외교 일선에서 활약했던 선승들만이 아니라 뛰어난 화승들의 무대이기도 했다.
34세 때에는 명나라와 교류가 깊었던 야마구치현의 세력가이자 영주인 오오우치 마사히로(大内政弘)의 도움으로 운곡암雲谷庵으로 옮긴다. 47세 때인 1467년에 마침내 견명선을 타고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마침 그해는 앞으로 11년 간 지속될 내란인 오닌(応仁)의 난이 일어났다. 영파를 거쳐 천동산에 올랐다. 경덕사에서 수좌에 임명되었다. 중국에서도 뛰어난 화승으로 알려져 북경에서는 예부원 중당에 벽화를 그렸다. 50세에 귀국하여 오오이타현에 정착했다. 시마네현, 기후현, 이시카와현 등을 탐방하며 정원을 조성하거나 초상화, 산수화, 병풍화 등 다양한 작업 활동을 했다. 66세에 야마구치현으로 돌아와 오오우치의 후원으로 화업을 지속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수묵화에 담긴 선의 정신
셋슈의 대표적인 작품은 중국에서 그린 〈사계산수도〉를 비롯하여 〈사계산수도권卷〉, 〈파묵破墨 산수도〉,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아마노하시다테도(天橋立圖)〉, 〈사계화조도병풍四季花鳥圖屛風〉 등이 있다. 물론 이는 전부 국보이거나 중요문화재다. 셋슈는 때로 그의 그림에 ‘사명천동산 제일좌四明天童山第一座’의 칭호를 서명으로 넣기도 했다. 그만큼 수행승으로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중국에서 제자 소엔(宗淵)에게 보낸 〈파묵산수도〉의 문면에 “명의 화단에는 볼 만한 것은 없고, 일본의 시문집이나 서설叙説을 재인식”했다는 글을 썼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는 명대에 저장성의 화풍인 절파浙派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남송의 하규夏珪나 북송의 이당李唐 등의 화풍을 공부했다. 이들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풍경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라며 닥치는 대로 사생에 전념했다. 그의 작품에는 선화, 즉 진리를 인식하는 선의 세계관이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496년에 그린 〈혜가단비도〉는 선종의 역사를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준다. 달마선사가 숭산 소림사에서 면벽 좌선하는 모습을 그렸다. 면벽은 철주鐵柱의 불성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 작품은 굴속에서 정좌하고 있는 달마를 그렸다. 마치 〈이입사행론〉에서 말하듯 무소구행無所求行의 모습이다. 2조 혜가인 신광이 칼로 벤 왼쪽 팔을 바치고 있다. 중국의 선종조사도를 참고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셋슈 만년의 작품으로 자신의 일생이 곧 수행이었음을 나타낸다. 달마를 향한 신광의 굳은 의지가 바로 자신의 그것인 것이다. 그는 상국사에서 익힌 ‘그림으로 삼매의 불사를 삼는다’는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자신의 구법 행위는 바로 그림이었던 것이다. 자른 팔이 그림에 그려진 것은 다른 선화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비록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이지만 단비를 통해 확고한 신信을 통한 구도의 의지가 내면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굴속 정면을 응시하는 달마의 눈빛에 더해 옷의 굵은 선은 생생약동하는 선기禪機와 불타 이래 전해진 견성성불의 길이 인간에게는 유일한 생명임을 보여준다.
산수화에 나타난 진공묘유의 소식
선승으로서 대자연을 보는 셋슈의 의식이야말로 그의 경지가 어느 곳에 도달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계산수도〉가 바로 그것이다. 산수는 「논어」 이래 인자함과 지혜를 의미했다. 또한 세속과 절연된 수행의 장소,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은자들의 서식처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셋슈는 산수의 사계 변화를 통해 우주의 체용을 체현하고자 했다. 그림은 대작이다. 각 계절의 그림이 가로가 1m 50cm, 세로가 80cm에 달한다. ‘일본선인등양日本禪人等楊’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다. 중국 산수화의 절파풍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거대한 산이 화면의 중심이 되고, 그 아래에는 인간 세상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필묵의 농염 정도에 따라 바위산의 명암을 보여주고 있다. 산의 중간 부분에 빛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아래 위에만 묵으로 그렸다. 사계의 빛의 변화를 통해 그림 전체가 자동으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셋슈가 원근법의 선구자라고도 평을 한다. 마을에서는 말을 타거나 짐을 나르는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이 그려져 있다. 신선이 따로 없다. 법신의 웅장한 대자연의 품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 자연과 하나가 된 모습이 바로 그가 생각한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수미산이 따로 없는 것이다.

셋슈가 66세 때인 1486년 그린 〈사계산수도권〉은 〈산수장권山水長卷〉으로 부르기도 한다. 수묵만이 아니라 남색이나 적색도 가미하여 보다 생동감 있게 그렸다. 여기서는 세계를 철견한 셋슈의 안목이 드러난다. 종자從者를 데리고 산속을 거닐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 아닐까. 40cm의 폭에 계절의 변화를 그리며 16m나 이어진다. 평화로운 어촌과 마을이 무릉도원처럼 자연의 일부로 되어 있다.
흙이 없는 바위 위에 가지를 늘이고 있는 소나무는 마치 수행자의 내면을 보는 듯하다. 뿌리 없는 사념을 제거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가 여기에 있다. 암석의 둥근 굴은 각자覺者의 무념의 의식을 보여준다. 허공을 집어삼킨 무착과 무주의 공간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산과 바다, 들판을 덮은 안개는 세상이 진공묘유의 실상임을 나타낸다. 그 안개는 물론 〈사계산수도〉에서처럼 묵의 농담의 의해 표현된 것이다. 동양화의 여백은 결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현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돌파하는 화법이다. 그 안개는 우주와 자연을 감싸는 에너지이다. 감춰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는 세월에 따라 수많은 형상을 보여준다. 그림 속의 어부나 꽃나무 아래 부부의 한가한 모습은 진공묘유의 세계 속 주인공이다.

그것을 더욱 드러낸 것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다. 근세 일본 최대의 전문화가 집단인 가노파(狩野派)의 거장 가노 탄유(狩野探幽)가 모사한 것이 남아 있다. 무로마치 시대 산수화에는 주로 소상팔경이 모티브였다.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화제畫題였다. 소상은 호남성의 동정호를 비롯한 강들의 풍경을 말하는데, 연사만종煙寺晩鍾, 어촌석조漁村夕照, 산시청람山市晴嵐 등의 8가지로 표현했다. 셋슈는 이를 자신의 작품 속에 재현해 낸 것이다. 성과 속의 세계가 혼연일체 된 주객미분, 경식구민境識俱泯의 의식이 그대로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그림을 방편으로 활용하여 선의 구경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미의 세계가 진과 선의 세계와 일치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절정에 달한 선화의 경지
셋슈가 80대의 최만년에 그린 〈아마노하시다테도〉는 선화의 경지가 절정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노하시다테는 교토부의 북부, 동해안의 미야즈만(宮津湾)의 절경을 말한다. 마츠시마(松島), 미야지마(宮島)와 함께 일본 삼대 절경에 속한다. 20∼70m의 폭에 3.6km의 사주砂州에 수천 본의 오래된 소나무가 자라서 아름다움을 뽐낸다.

셋슈는 오늘날 드론이 내려다보듯이 그곳의 풍광을 정밀하면서도 중후한 필치로 묘사한다. 먼 산, 앞바다, 신사와 사찰, 주택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심신탈락의 경지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다. 직업적인 기교는 마치 없는 듯이 느껴진다. 아마도 지금처럼 항공촬영을 한다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실제의 장소를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정관靜觀과 직관의 경지는 단순한 상상력을 넘어선 것이다.
여기에는 낙관 인장도 없어서 셋슈의 작인지 의문도 있지만, 작풍으로 볼 때 셋슈의 작품임을 사계가 인정하고 있다. 저무는 인생에 있어 초월과 달관의 경지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삶은 엄연한 현실이며, 인간은 역사적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전란으로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선문은 권력의 주구가 되어 갈 때, 그 현실을 비켜 갈 수는 없지만 무아와 대아의 경지에서 세상을 볼 것을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근세 회화의 개조로 명명되는 이유는, 〈아마노하시다테도〉에서 보듯 선화로써 개아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무념과 무상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근대에 『일본미술사』를 쓴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은 셋슈에 대해 세 가지로 평가한다. 첫째, 서양 미술에 셋슈에 비견될 만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근대의 화가들에게까지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 둘째, 일본미술사 중 무로마치 시대에 처음으로 자각적인 미술을 창조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셋슈라는 점, 셋째, 무로마치 시대 미술의 시대정신과 셋슈의 화풍은 근세에 이르러 가노 탄유에게 계승되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다소 국수주의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본미술만이 아니라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승 셋슈의 자각적인 미술이라는 점은 불교의 토착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불교가 그 시대, 그 지역, 그 인물에 의해 재현되고 재창조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류 최고의 가치인 불성의 개현이라는 보편성이 시공을 달리하면서 그 특수성에 의해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 불교의 역사다. 셋슈는 그것을 선화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셋슈는 말년에 야마구치현의 동광사東光寺에 입산하여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수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87세에 열반했다. 〈파묵산수도〉를 보면 추상화에 가까운 기법으로 대자연의 경계가 아스라이 사라져 간다. 무無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마치 무에서 왔다가 무로 돌아가듯이 삶은 묵처럼 자유자재로 허공을 휘젓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셋슈의 묵의 향연은 그 자체로 대자연의 법어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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