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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 속 세상, 세상 속 화엄 ]
AI 시대에 왜 다시 화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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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스님  /  2025 년 7 월 [통권 제147호]  /     /  작성일25-07-05 11:44  /   조회1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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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당나라 장안에서 실차난타가 3년에 걸친 역경을 통해 세상에 내놓은 80권 본 『화엄경』이 동아시아 불교 지형을 뒤흔든 지 1300여 년, 우리는 다시 이 경 앞에 서 있다. 파피루스와 목간에 적힌 한 글자마다 여러 문명이 남긴 숨결이 켜켜이 배어 있다.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 붓다의 열반을 논하던 승려, 천문을 연구하던 학자의 지혜가 거대한 법계연기망으로 직조되어 ‘세주묘엄’이라는 이름으로 응고된 까닭이다.

 

나비의 날갯짓과 법계연기

 

『화엄경』 자체가 이미 초연결·다중 주체 시대의 산물이었음은 “새로운 문명이 올 때마다 화엄은 자신을 호출한다.”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웅변한다. 오래된 역사를 거슬러, 우리가 화엄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은 바로 이 보편성을 재확인하려는 정신사적 귀소歸巢이다.

 

알고리즘이 촘촘히 엮어낸 디지털 인드라망 위에서 한 지역의 작은 변수가 나비 날갯짓처럼 전 지구적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화엄이 설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현대적 재연이다. AI 시대의 종교나 윤리, 철학은 화엄이 제공하는 거울 없이는 방대한 데이터양과 속도, 그 효율에 함몰될 위험이 크다.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은 기술과 인간 사이의 윤리와 존재론적 경계를 재정의하는 작업이며, 무분별한 기술 낙관론과 암울한 기술 혐오를 동시에 넘어설 지혜를 구하는 수행이다. 

 

사진 1. 은하수와 별 네트워크. 알고리즘이 촘촘히 엮어낸 디지털 인드라망 위에서 한 지역의 작은 변수가 나비 날갯짓처럼 전 지구적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화엄이 설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현대적 재연이다. 사진 : 챗GPT SORA.

 

무엇보다 화엄은 닥쳐올 위험에 대한 두려움 대신 관계망을 아름답고 유연하게 꾸미려는 의지 즉 ‘묘엄妙嚴’을 종착지로 삼는다. 전쟁, 기후 위기, 전염병, 경제적·이념적 양극화가 일상화된 시대에 세계를 위험 관리 대상이 아니라 예술적 공동 창작물로 바라보는 전환은 치유이자 창조의 서막이다. 한 생각이 인드라망 깊숙이 파장을 일으킨다는 자각은, 정치나 경제, 미디어가 직조하는 현실을 조화롭게 가꿀 동력이 된다.

 

이처럼 『화엄경』은 오래된 전통이지만, 그 자체가 초연결성과 다중 주체를 실험한 텍스트였기에 초자동화·초연결 사회가 지배하는 오늘에 더 깊은 실천적 울림을 줄 수 있다. 붓다는 성도 직후 완성된 법계의 총체를 단숨에 제시하고 “우리가 모두 그 주인”이라 선언했다. 시대의 언어만 바뀌었을 뿐 질문도 답도 변하지 않았다. 고대의 목소리를 현대의 귀로 다시 듣고 ‘보살행의 장엄’이라는 새 설계도를 그려내는 일, 바로 이것이 AI 시대에 화엄을 다시 펼쳐야 하는 이유다.

 

『화엄경』의 탄생 

 

『화엄경』은 그 정식 명칭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 표방하듯이, 대승불교 문헌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전이다. 『화엄경』이 찬술될 무렵, 초기불교와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인도 불교계에는 다양한 교리와 분파가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새로운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면서 여러 경전과 사상을 일관된 체계로 통합하려는 시대적 요구가 강해졌다. 『화엄경』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 배경하에서 보살菩薩사상, 법계연기法界緣起, 보현행원普賢行願 등 대승불교의 핵심 교리들을 집대성하여 편찬된 경전이다.

 

사진 2. 실크로드 서역남로에 위치한 호탄. 

 

『화엄경』의 성립 과정은 단일한 시점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적 궤적을 거쳐 형성되었다. 현재 학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화엄경』의 각 품들은 서기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여러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성립되었다. 그 후 350년경 4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통합된 경전 체계로 완성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개별 경전들이 처음 성립된 곳은 인도 문화권이었으나, 최종적으로 하나의 완성된 『화엄경』으로 편집된 장소는 중앙아시아의 호탄(Khotan)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화전 지역에 해당하는 호탄은 고대 실크로드의 핵심 거점이자 불교 전파의 중요한 교차로 역할을 했던 곳이다. 7세기 현장법사가 인도 순례 후 중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이곳을 경유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화엄경』의 중국 전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각각의 번역본은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최초의 한역본인 60권본 『화엄경』은 418~420년 동진 시대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Buddhabhadra)가 번역하여 421년 공표되었다. 이후 당나라 시대인 695년부터 699년까지 약 4년에 걸쳐 실차난타가 번역한 80권본 『화엄경』이 등장했다. 실차난타實叉難陀(Śikṣānanda)는 측천무후의 후원을 받아 기존의 60권 본을 토대로 하되, 새롭게 입수한 산스크리트어 원본을 대조하며 더욱 완벽하고 풍부한 내용의 『화엄경』을 번역하고자 노력했다.

 

80권 본 『화엄경』은 이전 번역본에 비해 여러 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 준다. 내용이 더욱 상세하고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화엄사상의 핵심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경전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구도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수행의 중요성과 점진적인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 준다. 이 부분은 불교 수행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화엄경』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겨진다.

 

사진 3. 호탄의 라왁(Rawak) 사원 유적지. 호탄시 동북쪽 70km 지점에 있는 불교 유적.

 

방대한 화엄의 교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와 보살들의 수행 과정을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80권 본 『화엄경』은 60권 본과 함께 중국 화엄종의 중요한 소의경전이 되었으며, 한국과 일본 불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화엄사상이 깊이 뿌리내려 80권 본 『화엄경』에 대한 연구와 신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마갈제국 아란야 법보리도량에 계실 때, 비로소 정각을 이루셨습니다.”

- 「세주묘엄품」 제1권 중에서, 무비스님 역.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즉시 말과 생각, 공간의 경계를 초월한 자리에서 전한 찬란한 우주적 대서사시이자 교향곡이다. 이 경전은 붓다 성도 직후 삼칠일에 법계 그 자체를 음성화한 경전으로, 그 첫 품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1·2권은 ‘세계 장엄’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서원의 형태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본문에는 1,560명의 세주가 차례로 등장해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보살도의 장엄으로 변용하겠다고 발원한다. 여기서 ‘세주’는 초월적 통치자가 아니라 연기 속에 서 있는 모든 존재, 즉 우리 각자이다. 

 

 

화엄교학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법계연기를 통해 주체와 객체를 동시적으로 성립시키며, ‘세주世主’라는 호칭을 통해 존재론적 한계를 대담하게 지워버린다. 「세주묘엄품」의 장엄 서원은 이미 완성된 법계의 화려함을 과시하거나 찬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망 전체를 순간순간 다시 그릴 능력이 우리에게 내재해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 보살행의 출발점은 외부의 권위에 구원과 질서를 맡기는 태도를 버리고, 자신을 법계의 동등한 중심으로 인정하는 자각이다.

 

사진 4. 통도사 화엄탱(보물, 조선시대), 통도사 성보박물관.

 

전통 주석이 밝히듯 ‘세주’가 먼저 발심하고, 이어서 삼매와 지혜, 공덕을 갖추는 구조는 원인과 결과의 시간적 선후를 파기하고, 원인과 결과를 동시성의 한 호흡 안에 묶는다. 또한 “비로소 정각을 이루셨습니다[始成正覺].”라는 결과가 「세주묘엄품」의 시작 문장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즉 깨달은 세계란 멀리 존재하는 이상국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직조 작업이며, 우리 각자의 마음이 씨앗이 되어 법계의 무한한 문양을 끝없이 새긴다. 『화엄경』에서는 그 작업의 주체를 단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수많은 보살을 등장시켜 서로를 비추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연결이 곧 법계의 본성임을 각인시킨다.

 

화엄, 보살행으로 장엄한 세상

 

『화엄경』의 시작은 ‘우주에는 주인이 없다’가 아니라 ‘우주에는 무수한 주인이 동시에 존재하며, 그중 한 명이 바로 당신’이라는 급진적 선언이다. 그 가운데 첫 문을 여는 「세주묘엄품」 1·2권은 장엄한 법계法界를 한순간에 펼쳐 보이며 곧바로 독자의 시야를 확장한다. 1,560명의 ‘세주世主’가 차례로 나타나 “우주 전체를 보살의 길로 장엄하겠다.”고 서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흔히 “그 세주는 부처님이나 미래의 성인聖人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화엄이 던지는 결정적 반전은 이것이다. 이 방대한 연결망 한복판의 ‘세주’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 각자라는 사실이다.

 

세간을 구성하는 무수한 관계 고리를 매 순간 선택하고 변형하고 확장하는 주체가 곧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세주묘엄품」이 보여 주는 ‘완성된 세계’는 사실 누군가가 선취한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실시간으로 덧칠하고 깎아 내며 다시 호흡을 불어넣는 열린 설계도인 셈이다. 이를테면 단 한 번의 자각적 호흡이 미세한 업력業力을 전환하는 실마리가 되고, 그 전환이 연쇄적으로 불국토를 청정하게 만든다는 전망이다.

 

사진 5.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 변상도.

 

『화엄경』은 부처나 성인을 ‘대상’으로 놓고 흠모하기보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는 마음의 향방을 살피며, 항상 법계의 중심에 서서 자신을 ‘세주’로 호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 호명이 울림이 되어 인드라망 곳곳에 자재로운 광명을 비출 때, 『화엄경』이 말하는 장엄은 더 이상 경판 속 변상도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 쓰는 법계의 심포니가 된다. 우리 자신이 곧 세주임을 자각할 때, 화엄 속의 세상이 세상 속의 화엄으로 서로를 비추며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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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스님
해인사로 출가하여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박사를 졸업했다. 해인사승가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AI 부디즘연구소장으로 있다. 인공지능 시대 속 불교의 역할과 미래에 대해 연구와 법문을 하고 있다. 저서로 『AI 부디즘』, 『붓다, 포스트 휴먼에 답하다』가 있으며, 논문으로 「인공지능 챗봇에 대한 선禪문답 알고리즘의 데이터 연구」, 「디지털 휴먼에 대한 불교적 관점」, 「몸속으로 들어온 기계, 몸을 확장하는 기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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