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중종대 왕실 기신재와 내수사 장리의 혁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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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5 년 8 월 [통권 제148호] / / 작성일25-08-05 11:56 / 조회11회 / 댓글0건본문
중종은 1506년 9월 2일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곧바로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잡고자 하였고, 즉위한 지 3일째 되는 9월 5일에는 왕실의 기신재忌晨齋를 복원하기도 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신하들과 많은 논의를 이어갔는데, 연산군을 몰아내는 과정에 적극 참여한 신하들 중에는 조광조를 비롯한 성리학 교조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불교에 대해서는 부정적 논의가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기신재를 복원한 중종
중종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실 기신재와 내수사 장리長利의 혁파’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다. 기신재와 장리가 혁파되는 1516년(중종 11) 6월 2일까지 『중종실록』에 기록된 신하들의 기신재 폐지 요구는 140여 회에 이르고, 이 가운데 30여 회는 내수사의 장리 혁파도 함께 요구하였다.

기신재란 돌아가신 조상의 4대조까지 기일忌日에 설행하는 불교식 재회齋會로서, 망자 사후 1년째 기일에 소상재小祥齋를 지내고, 2년째 기일에 대상재大祥齋를 지낸다. 왕실의 기신재는 주관하는 승려가 기일 전날 저녁에 4대조 왕과 왕후의 혼령을 불러들이는 의식과 함께 신주神主를 모시고, 기일 당일에는 4대조 왕과 왕후의 신주를 욕실에서 깨끗이 닦은 뒤 흰색 평상 위에 신주를 올려놓고 옆문을 통해 법당에 들어가면 다른 승려들이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신주를 맞이한다.
이어서 불단 위에 신주를 올려놓고 불상에 예경하듯이 소문疏文을 읽고 명복을 빈다. 왕실의 임금과 비빈들은 기신재 의식을 마친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반승飯僧 공양을 올린 후 신주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러한 불교 의식은 성리학을 공부한 신하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미 성종 대에 왕실의 수륙재가 폐지되었는데 기신재는 연산군 말기까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조 판서 송질이 아뢰기를, “기신재는 비록 선대 왕조에서 해왔던 일이지만 그다지 좋은 행사는 아니었습니다. 폐왕(연산군)이 일찍이 이를 폐지하면서 승려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지금 만약 다시 시작한다면 사방의 승도들이 풍문을 듣고 떼를 지어 서울에 모여들 것이니, 그 폐해를 장차 구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혁파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제 만약 새로이 사찰을 창건하는 것이라면 안 되지만, 이 일은 성종같이 명철하신 임금님도 선왕 선후를 위하여 폐지하지 않으셨는데, 어찌 나에 이르러 이를 폐지하겠느냐?”고 하였다.
- 『중종실록』 1년(1506) 9월 19일.
중종이 왕위에 오른 지 3일째 되는 날 기신재를 복원하자, 그로부터 14일째 되는 날 예조 판서가 기신재의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중종이 불교식 기신재를 복원했던 것은 왕실 비빈妃嬪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신하들의 직접적 요구가 있어도 들어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로부터 기신재를 둘러싼 왕실과 신하들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성균관 학생 채침 등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사찰을 고치거나 새로 짓는 일을 그만두라고는 명하셨으나 기신재를 그만두라는 명은 받지 못하였으므로 신 등은 몹시 실망합니다. … 제사할 제 귀신이 아닌 것에 제사하면 곧 음사淫祀가 되며, 음사에는 복이 없다는 것이 유교 경전에 실려 있습니다. … 이 때문에 신 등은 탄식하고 통한히 여기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선대 임금 때로부터 그대로 지켜 오셨다 하여 고치지 않으신다면 더욱 옳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미 사찰을 중창하는 일은 그만두도록 명하셨으니, 이어 기신재를 혁파하고 양종 및 모든 사찰의 주지들을 혁파하며 온 나라 사방의 승려들을 머리 기르게 하여 모조리 평민으로 돌리소서. 그리하여 불교가 다시는 우리 유가 성인의 도를 훼방하고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신다면, 우리 유교의 다행일 뿐 아니라 참으로 종묘사직의 다행이겠습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내가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선대 임금들이 이미 행하던 일이니, 반드시 하루아침에 고쳐 없앨 일이 아니다.”고 하였다. - 『중종실록』 3년(1508) 5월 8일.
성균관 학생들 역시 국가에서 관리하는 불교의 모든 제도를 혁파할 것을 요청하면서 기신재의 폐지도 건의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선대 임금들도 폐지하지 않고 설행하던 의식이므로 갑자기 폐지할 수 없다며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서 신하들의 요구가 이듬해 1월까지 지속되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기신재는 선대 왕과 왕후의 위패를 가지고 뜰 아래에서 부처에게 절하고, 승려에게 공양한 뒤에 제사 지내며, 이어서 벌여 놓은 부처 앞에서 선대 왕과 왕후의 이름을 씁니다. 이 세 가지 일을 모두 폐지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중종실록』 3년(1508) 5월 18일.
기신재 폐지를 수용한 중종
이후에도 여러 신하들이 똑같은 논리로 기신재의 폐지를 요구하였으나, 그때마다 중종은 “기신재는 돌아가신 선대 임금을 위해 베푼 것이고, 갑자기 혁파하기 어려운 것”이라며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하들의 요구는 조강朝講과 석강夕講에서도 이어졌다.
석강에 나아갔다. 『논어』를 강하다가, ‘제사 지내지 못할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짓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시강관 김당이 아뢰기를, “성인의 가르치심이 이와 같이 지극합니다. 국가의 기신재 같은 것도 또한 혁파해야 하오며, 또 성 안의 사대부가에도 무당이 풍속을 이루어 거리낌 없이 출입을 하오니 금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무당의 일은 사헌부에서 마땅히 금단해야 하겠지만, 기신재는 폐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 『중종실록』 4년(1509) 1월 5일.
임금과 신하가 아침과 저녁에 만나서 유학을 공부하던 조강과 석강에서도 틈만 나면 신하들은 기신재가 공자의 가르침과 다르다며 혁파를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중종은 기신재를 혁파하지 않았다. 이처럼 신하들의 집요한 요구를 번번이 거절하던 중종이 1516년 6월 2일에 갑자기 왕실의 기신재와 내수사의 장리를 혁파하라는 명을 내린다.

임금이 예조에 분부하기를, “기신재는 이전의 왕조에서 시작되어 상하가 모두 재를 베풀어 복을 비는 것에 익숙해지고 드디어 습속이 된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이교異敎를 깊이 배척하여 풍속이 점점 바르게 돌아가나, 기신재의 일만은 지금까지 구습을 따라 폐지하지 않았으므로 말하는 자가 다들 ‘고쳐 바로잡을 때는 바로 지금이다.’고 하였다. 다만 선대 왕조의 옛일이라 하여 차마 고치지 못하고 주저하여 왔는데, 대신에게 물으니 다들 고쳐야 한다 하고, 나도 ‘선대 왕조를 받드는 효도에는 본디 올바른 예도가 있는 것이요 욕되게 하는 일에 구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후로는 선대 왕과 왕후의 기신재를 영구히 혁파하여 거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 『중종실록』 11년(1516) 6월 2일.
같은 날 중종은 왕실 재정을 관리하는 내수사의 장리를 혁파하라는 분부도 함께 내렸다. 장리의 사전적 의미는 ‘봄에 꾸어 준 곡식에 대하여 가을에 그 절반을 이자로 받는 변리’이다. 곡식을 꾸어간 사람은 가을에 빌려 간 원금의 50%에 달하는 비싼 이자를 물어야 했다. 이러한 사찰의 장리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비판이 있었다.
사간원 대사간 성준 등이 조목별로 시폐를 진술하여 상소하기를, “… 지금 큰 사찰에는 모두 장리를 하는 데 이름난 승려가 있고, 또한 사사로이 재물을 모으는 자가 있으며, 가을에 추수하여 징수를 독촉할 즈음을 당해서는 백성의 의복을 벗겨가고, 백성의 우마를 빼앗으며, 재산을 모두 찾아서 약탈하여 취하되,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못하면 잇달아서 채찍하여 황황하게 이익을 구하기를 실로 장사치와 같이 하니, 이것이 어찌 청정 과욕한 자가 마땅히 할 짓이겠습니까? …” 하였다. - 성종 3년(1472) 1월 15일.
내수사 혁파 수용
중종 대에 이르러서도 내수사의 장리를 비판하며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여론이 일찍부터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내수사의 장리는 물론이고 내수사 자체를 혁파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유순은 아뢰기를, “대사헌이 아뢴 바가 매우 타당합니다. 내수사는 비록 조종조에서 설립한 것이지만, 폐지하는 것이 매우 타당합니다. 앞으로 내수사의 물자가 비록 부족하더라도 더 모아들이지 마소서.” 하였다. … 홍경주가 아뢰기를, “내수사의 장리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성종께서도 혁파하지 못하셨지마는, 대개 국가에는 큰 법도가 있어서 상황에 따라 개혁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러한 일이겠습니까? 성종께서 이를 혁파하셨어야 하지만, 자손이 많아서 갑자기 혁파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고 하였다.
- 『중종실록』 2년(1507) 11월 15일.
중종은 내수사의 장리 역시 기신재와 마찬가지로 선대 왕조부터 해오던 관례라는 이유로 신하의 혁파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하들은 내수사 장리의 혁파를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결국 1516년 6월 2일에 이르러 ‘내수사의 장리 및 왕실의 기신재 혁파’의 명을 내린다. 도대체 이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6월 2일 오전의 조강에서도 중종은 신하들의 혁파 요청을 거절한 바 있었다.
사간 유보와 지평 김인손이 기신재와 장리 등의 일을 아뢰니, 임금이 한참 잠자코 있다가 이르기를, “이 일을 혁파하기가 과연 무엇이 어렵겠느냐? 다만 선대 임금께서도 갑자기 혁파하기 어려워하시던 것이니 하루아침에 모두 혁파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 『중종실록』 11년(1516) 6월 2일.

이날 중종의 행보 가운데 주목되는 일정은 밤에 조광조·유관·윤세호를 만난 것이다. 『중종실록』에서는 주강과 석강에 나간 것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만 주강과 석강에서 있었던 대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밤에 조광조·유관·윤세호를 만나서 『고려사』 등을 강독한 내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추정컨대, 오전의 조강에서 신하들의 혁파 요청을 거절했다가 오후에 혁파를 허락하는 명령을 내렸다면 그사이 심정에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밤에 신하들 중에 가장 성리학적 보수주의자라고 평가되는 조광조 등을 만났다는 것은 신하들의 오랜 불교 의식 및 장리 혁파의 요구를 결국 수용하면서 정치적 타협을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결국 기신재와 장리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중종을 이어서 어린 나이에 즉위한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가 기신재를 다시 복원시켰다. 문정왕후가 기신재를 복원시키자, 『중종실록』을 기록하던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 뒤로는 왕실에서 필요한 용품이 부족하면 곧 팔도 사찰의 전지田地를 찾아 모아서 내수사에 옮겨 붙이도록 명하였다. 해마다 왕실의 서리를 지방에 나누어 보내어 거기서 나는 것을 거두어 관창官倉을 통해 운반하여 왕실의 여러 가지 용품을 장만하게 하니, 이는 장차 여알女謁이 성하고 정령政令이 여러 군데에서 나올 조짐이다.
위 글은 명종 대에 『중종실록』을 만들면서 사관이 논한 것이므로 ‘여알’이란 문정왕후를 가리킨 것이다. 명종 대인 1550년 문정왕후가 선종과 교종의 양종을 재건하고 기신재도 재개했다. 그래서 사관은 문정왕후를 비판하면서 위와 같이 사론史論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 사후 불교식 기신재는 중단되었고, 원묘原廟인 문소전文昭殿 등에서 유교적 기신제忌晨祭가 설행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문소전이 소실된 뒤에는 왕릉이나 원묘園墓에서 유교식 기신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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