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를 넘나들었던 신라의 순례승들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최신호 기사

월간고경

[설산 저편 티베트 불교]
히말라야를 넘나들었던 신라의 순례승들


페이지 정보

김규현  /  2025 년 11 월 [통권 제151호]  /     /  작성일25-11-05 10:44  /   조회87회  /   댓글0건

본문

2001년 케룽현에서 4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종까마을에서 국보급 가치가 있는 고대석각古代石刻이 발견되어 중국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던 일이 있었다. 바로 〈대당천축사출명〉이란 비문(주1)이다. 이 명문은 자연적인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 양각전서체陽刻篆書體로 〈대당천축사출명〉이라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조금 작은 해서체楷書體로 24행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 하단의 일부는 수로 공사로 인해 훼손되어 현재 311자만 판독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 1. ‘니번고도’ 상의 공탕라모(5,236m) 고개에 선 필자.

 

 

〈대당천축사출명大唐天竺使出銘〉의 발견

 

그중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보인다. 필자가 애타게 찾던 바로 그 대목이다. “현경玄京 3년 6월 대당좌효위 장사 왕현책王玄策…”이라는 구절이다. ‘현경’은 당 제3대 황제인 고종高宗(주2)의 연호年號로 ‘현경 3년’이면 658년이니, 태종의 특사 왕현책이 3차로 천축행을 나선 해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 더 있다. 왕현책 일행은 정관 19년(645년) 1월 27일 중천축국 왕사성 기사굴산耆署崛山에 올라 석비를 세웠고, 동년 2월 11일에는 마하보리사摩河菩提寺에 석비를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가는 곳마다 자신들의 행적을 남기기 위한 기념 비석을 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진 2. 케룽마을 인근에 위치한 고대 공탕왕국의 유적.

 

나아가 네팔 공주와 당나라 공주가 토번으로 시집온 해(639년, 641년)와 송첸캄포의 사망(649년), 문성공주의 사망(679년), 고종의 사망(683년) 그리고 현장의 순례 기간(629~645년간) 등과 같은 주변 연대기와도 부합하여 이 석각명문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은 “케룽현을 경유하는 ‘왕현책 루트’가 이미 공인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왕현책의 생몰연대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그의 존재 자체마저 의문시되었지만, 이 명문의 발견으로 인해 왕현책이 복권되었다. 따라서 네팔 브리꾸띠 공주의 신행길 루트, 즉 ‘니번고도尼蕃古道’의 경유지와 현조삼장玄照三藏 외 여러 명의 순례길도 명확해졌다.  

 

사진 3. 〈대당천축사출명〉이 새겨진 마애석각명문.

천축으로 가는 직행 루트 ‘왕현책로王玄策路’

 

당태종의 천축 개척의 밀명을 받은 특사 왕현책이 대규모 사절단을 꾸려 티베트를 종단하여 중천축국中天竺國을 4번씩이나 들락거렸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로 공인되었다.

 

이런 사실은 기존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인도로 가는 전통적인 실크로드 대신에 새로운 직통로를 개척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바로 필자가 ‘왕현책로’라는 가칭假稱으로 부르는 길로서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케룽현을 경유하는 ‘니번고도’와 같은 궤적을 그리는 국제적인 소통로이다. 

 

사진 4. 〈대당천축사출명〉에 관한 안내판.

 

역사적 기록들은 왕현책의 활약상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현책이 인도에 2번째로 도착했을 때에는 하르샤 왕은 죽은 뒤였고, 혼란을 틈타 왕위를 찬탈한 아루나스바(Arunasva, 阿羅那順)가 중국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고 공물까지 약탈하며 사절단 30명을 인질로 감금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한 왕현책은 토번왕국에 SOS를 쳤다. 아마도 이에 네팔의 부리꾸띠 공주와 당의 문성공주의 설득에 의해 송첸캄포 임금은 기마병 1천 2백 기를 급파하였을 것이다.

 

사진 5. 당태종의 천축특사 왕현책의 초상화.

 

또 한편으로 네팔 왕비의 오빠인 나렌드라데바(Narendradeva, 641~679)에게도 파발을 띄워 네팔 기병 7천 기를 파병하게 하여 합동작전을 펴서 당나라 사신들을 구하라고 안배하였다. 이렇게 두 나라의 연합군 8천여 명을 지휘하여 왕현책은 기습작전을 펴서 마갈타국을 토벌하고 반란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왕현책은 10여 년간 4차례에 걸쳐, 정관 17년(643), 현경 2년(657), 용삭 2년, 인덕 2년(665) 간에 천축을 들락거리며 큰 활약을 하고 중원-티베트-네팔-인도를 잇는 소통로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기격인 『중천축행기中天竺国行記』10권(주3)을 지었다고 한다.  

 


 

천축을 넘나들었던 신라 순례승들

 

왕현책 사절단에는 일단의 불교 승려들이 합류하였는데, 그들 중 신라의 승려들도 섞여 있었다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이들의 천축행은 시기적으로 혜초慧超보다도 반세기 앞서고 있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이어지지 않아서 조금 아쉽다. 

 

당 의정삼장義淨三藏이 저술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주4) 「현조본전玄照本傳」에는 56명에 달하는 구법승들의 전기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현조법사를 따라 천축을 오고 간, 무려 9명(주5)에 달하는 해동의 순례승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사진 8. 「서역구법고승전」에 실려 있는 현조玄照법사 부분. 2차에 걸쳐 당 문성공주(당시 토번국 왕비)의 도움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인 혜륜법사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다.

 

그들은 대부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범어를 배운 천축파天竺派들인데, 정관 연간(627~649)에 칙서를 받고 떠나는 현조법사의 시자승侍子僧으로 함께 중천축국으로 떠났다.

 

혜륜慧輪의 범어 이름은 반야발마이고 신라인으로 출가한 다음 부처의 땅을 그리워하여 당나라 초기에 배를 타고 광동 지방에 도착하여 장안으로 입성하였다. 대흥선사에서 범문梵文을 배운 후, 정관 연간에 칙서를 받고 떠나는 현조玄照법사의 시자로 함께 천축으로 가게 되었다. (중략) 내(의정삼장義淨三藏)가 서행西行하여 그곳(나란다 사원)에 이르렀을 때 당시 40세의 혜륜을 만났는데 범어에 능란하였고 『구사론』에 정통하였다. 

 

또 기타 신라승의 기록이 계속된다.

 

현낙玄恪은 신라인으로 역시 현조법사를 따라 서행하였는데 마가다국의 대각사에 이르러 예를 베풀고는 30여 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또 혜업慧業법사도 신라인으로 중인도 나란다 사원에서 경전을 읽다가 그곳에서 60여 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는 신라인으로 중국에 온 시기는 미상이다. 정관 연간에 장안에서 출발하여 중천국 나란다 사원에 머물렀다. 그는 그곳에서 경율론을 학습하였으며 여러 경전을 많이 열람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불법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지만 애석하게도 돌아갈 기일이 채 되지 않아 70여 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현태玄太의 범어 이름은 살파신야제파인데 신라인이고 고종 영휘 연간(650~655)에 서행하여 토번, 네팔을 지나 중천축에 이르렀다. 그는 보리수에 예를 올리고 경율론을 번역하고 검열한 다음 동쪽으로 돌아오던 도중 토번 영토인 토곡혼에 이르러 도희道希법사를 만나 다시 함께 천축으로 가서 대각사에 머물다가 후에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디서 입적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진 9. ‘니번고도’와 ‘왕현책 루트’였던 케룽을 경유하는 현 ‘우정공로’의 풍경.

 

다시 정리해 보면 만약 현대에 케룽석비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신라 순례승들이 어느 루트를 통해서 천축으로 들락거렸는지 알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천축행 자체가 모호한 상황에 이르렀을 것이니, 오늘의 주인공 케룽석비의 존재는 그만큼 우뚝하다고 하겠다.

 

덤으로 추모 율시 한 구절을 붙인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불후의 역작 『삼국유사』를 저술한 고려시대 일연一然스님도 「의해義解」조에서 이들 순례승들에 대한 추모시를 남겼다. 「귀축제사歸竺諸師」가 바로 그것이다.

 

천축에의 길은 멀고 멀어 만첩 산인데,

가련하구나!

힘들게 순례길을 걷던 그대들이여!

외로운 배 달빛 타고 몇 번이나 떠나갔건만, 

지금까지 한 명도 구름 따라 돌아오지 못했구나. 

 

<각주>

(주1) 중국 당국은 오랜 고증과 연구 끝에 2001년 우리나라 국보에 해당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주2) 당 태종太宗의 유지를 이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그 황제이다.

(주3) 이 책은 제목과 목차만 남고 그 내용은 망실되었으나 『법원주림法苑珠林』 같은 문헌에서 부분적인 기록들이 발췌되어 남아 있다.

(주4) 이 책은 당 현장법사에서 의정 자신 대에 이르기까지 약 50년 동안 천축으로 구법 여행을 떠났던 여러 승려들의 행로와 주변 정황들에 대해 출신지를 강조하여 순차적으로 편집한 전기이다.

(주5) 여러 가지 자료들을 합산하면 해동의 천축구법승의 숫자는 총 17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김규현
현재 10년째 ‘인생 4주기’ 중의 ‘유행기遊行期’를 보내려고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로 들어와 네팔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틈틈이 히말라야 권역의 불교유적을 순례하고 있다.
suri116@daum.net
김규현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