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일본 황벽종의 조사 은원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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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09:25 / 조회9회 / 댓글0건본문
일본선 이야기 24
선종의 일본화는 중국선을 도입한 12세기 중세부터 약 300년간에 걸쳐 이뤄진다. 무사들의 발흥과 더불어 선종은 황금기를 이루기도 했지만, 몇몇 전통을 빼고는 쇠락해 갔다. 특히 임제선은 시문·게송 같은 문자 구사를 중시하는 바람에 참선은 형식에 그쳐버렸다.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할 스승을 구하기가 힘들어 무사독오無師獨悟했다. 쇄국정책으로 중국으로 유학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전국戰國시대를 거치고 정세가 안정된 근세의 에도막부에 이르러 중국 전통성을 그대로 일본에 이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명말청초의 국수주의 움직임이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황벽종을 세운 은원융기隱元隆琦(1592~1673)다. 한류가 세계를 풍미하는 것처럼 중국풍의 문물 또한 그를 통해 근세 일본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황벽종의 탄생
복건성 출신인 은원은 29세에 고향인 복청福清에 있는 황벽희운이 주석했던 황벽산 만복사 감원흥수鑑源興壽의 문하에 입참했다. 35세에 비은통용費隠通容의 인가를 받고, 법을 계승했다. 이후 줄곧 황벽산의 주지로 있던 중 일본 나가사키의 숭복사崇福寺 주지로 초빙을 받았다. 그 사찰은 국가의 혼란으로 건너간 중국인들이 세운 사찰이었다. 4번에 걸친 초청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3년 간의 예정으로 1654년 20여 명의 제자를 이끌고 도일했다. 당시 명나라의 선풍과 은원의 고덕을 숭경하는 승려들과 학자들 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그의 명성이 확산되면서 다음 해에는 교토 묘심사 수좌 류케이 쇼센龍溪性潛(1602~1670)의 간청에 따라 오사카의 보문사에 주지로 오게 되었다. 류케이는 후에 은원에게 감복하여 제자가 되었다. 은원은 중국의 첩자라는 오해를 받아 에도막부는 사찰 외부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류케이의 노력으로 당시 막부 4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와 대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우지시에 1663년 새 사찰을 창건하게 되었다.
산호와 사찰을 모국에서와 같이 황벽산 만복사萬福寺로 이름지었다. 일본 내에 중국 사찰을 건립한 것이다.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은원의 선은 엄밀히 말해 양기방회, 원오극근, 무준사범, 그리고 설암조흠을 잇는 임제선이었다. 하여 그는 임제선의 정통을 전한다는 의미의 임제정종臨濟正宗 또는 임제선종 황벽파로 자칭했다. 은원은 자신을 임제의 32세손이라고 자부했다. 세월이 흘러 1874년 메이지 신정부는 선종을 임제종과 조동종의 2종으로 정했다가 1876년에 황벽종의 독립을 허용했다. 그만큼 앞의 2종과는 차별화된 독자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원이 중국에서 행했던 『황벽청규』를 시행하자 종통 부흥을 외치며 사법嗣法·규구規矩 쇄신에 노력하던 조동종의 만잔 도하쿠卍山道白(1636~1715)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당시 조동종에는 스승과 제자의 법통을 잇는 인법人法과 사찰의 주지직에 의해 가람의 법통을 잇는 가람법伽藍法의 전통이 있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만잔은 전자로써 종조인 도겐을 일사一師로 한 면수사법面授嗣法을 정통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막부는 대본산인 영평사와 총지사의 법도法度 제정을 통해 만잔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덴케이 덴손天桂伝尊 등은 황벽종의 청규를 가져와 실재의 깨달음보다 사법 규칙을 우선시하는 것은 형식주의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논쟁은 종학 연구, 종전宗典 출판 등을 활발하게 하여 교단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만잔이 활동하던 대승사는 도겐의 89권본의 『정법안장』을 출판했다. 이를 만잔본으로 부른다.
활발발한 선풍
그렇다면 은원의 선풍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전체적으로는 종합적인 성격을 띠며, 특히 명조풍이었던 선정쌍수禪淨雙修의 염불선, 선밀쌍수禪密雙修의 다라니선을 도입했다. 또한 수행자로서 지계를 강조했다. 창건 당시 설립된 계단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지계회를 열어 에도시대의 계율부흥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중이 되어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어찌 무애라고 할 수 있는가. 업이 차면 그 사람에게 떨어진다. 사람의 책임은 언젠가 져야 하니 명심해야 하리.”〈『은원전집隠元全集』, 이하 동일〉라는 경책의 싯구를 지었다. 그리고 “중이 되어 복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귀의 종족이다. 승으로서의 위덕은 날로 사라져 신神은 웃고 귀신은 염마장閻魔帳에 기록하리라.”고 하며 수행자를 경책한다.
은원의 선풍은 스승 비은의 가르침을 계승한 방할선棒喝禪으로 보고 있다. 임제의 방할은 살활자재의 선이었다. ‘부처가 와도 또한 한 방, 마귀가 와도 또한 한 방’이라고 한 것처럼 엄격했다. 선사가 내려치는 봉 끝에 눈이 있는 듯이 추호秋毫(아주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다. 분별망상이 일어나는 즉시 한방에 나가떨어진다.
그는 “단전직지單傳直指의 길에 따로 언설은 없다. 단지 자기 자신 및 일체의 진로塵勞를 도방하여 직하에 본래 면목을 반조하여 무위無位의 진인眞人을 갈파할 때, 외물로부터 침입하는 것은 없다. 거울이 거울을 대하듯이 요요분명了了分明하여 애초에 일물의 오염은 없으며, 또한 한 점의 장애도 없다. 원타타圓陀陀, 활발발活潑潑, 적쇄쇄赤洒洒, 전록록轉轆轆, 이름도 붙일 필요가 없으며, 앎도 어찌 앎이겠는가. 오직 자철자오자료自徹自悟自了를 얻는 것뿐.

이미 확철대오하여 명료하면, 생사거래에 자유하며, 부귀에 처해 부귀에 농락당하지 않고, 인천에 처해 인천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마땅히 만상의 주인이 되고, 사생의 부모가 되어 천하를 일가로 삼고, 만류를 자식으로 삼는다.”고 설파했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불성을 회복하면 대자유인이 된다. 이를 위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여 어떤 번뇌도 용납하지 않는 확철돈오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임제의 가풍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투철한 수행자의 자세
하여 은원은 참선은 수행자의 기본이라고 설파한다. 그는 “참선은 생사를 초월하는 것, 일직선의 해가 닿는 곳으로 돌진한다. 본래인本來人을 간파하는 것은 혼신으로 생신生身의 철鐵을 주조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참선을 가볍게 취급하는 자가 있다. 잘 보면 허세 부리는 자와 같다. 웅크리며 앉은 모습에 사람은 놀라지만, 바람이 불면 한 번에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뼈(허망한 자신의 모습)가 드러나리라.”라며 참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침내 “참선은 시절이 없으니 깨달음이 투철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수많은 생사를 반복했으니, 한 칼로 내리쳐 피를 보듯 명백해야 하리.”라고 한다.
그는 무사들을 의식하여 전투적인 선풍을 설하기도 했다. “참선은 한 사람이 만인을 적으로 삼는 마음가짐을 행하는 것이다. 적진에 들어가 대장의 목을 잡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이다.” 자신의 번뇌, 특히 탐진치의 대번뇌를 잡는 것임은 무사들은 깨달았을까. 때로 무사들을 깨우치기까지 했다. 그의 신변 조사를 행한 무사가 그에게 물었다. “선사는 중국 황벽산에서 때때로 움직이는 바위인 사자암 위에서 참선을 할 때, 그 바위가 가루로 부서졌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기적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중국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당신은 모른다. 나 또한 당신이 일본의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모른다. 이러한 두 사람이 오늘 이렇게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존재의 절대성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당시에는 묘심사를 중심으로 정법선 수립이 회자되고 있었다. 정등성正燈禪을 주장하는 묘심사의 구도 토쇼쿠愚堂東寔(1577~1661)가 대표적이다. 그는 마조의 ‘평상심’, 임제의 ‘평상무사平常無事’의 가르침에 기반, 시비선악의 대립을 넘는 무분별의 경지를 구현하는 일상다반사를 핵심으로 삼았다. 이러한 순수선의 입장에서 은원의 계율선이나 염불선을 비판했다. 그렇지만 계율은 선수행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선도량에서 불던 계율 중시의 움직임에 큰 힘이 되었다.

황벽종 연구자인 양경경楊慶慶은 은원의 계율사상의 특색에 대해 대승보살계와 소승성문계를 중시하는 점, 제악막작諸惡莫作은 견지금계堅持禁戒로써 사미 10계, 비구 250계, 보살 10중 48경계 등의 계상戒相을 엄격하게 지키고 위범하면 참회할 것, 중행봉선은 행위마다 타인의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으로 계덕戒德을 촉진한다는 점, 그리고 효를 중시하는 점을 들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자유활달한 선풍과 지계주의 사상이 은원의 개방적 성격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은원과 류케이 쇼센(隠元と龍溪性潛)>) 실제로 수행과 제도에서 다양한 방편을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량한 제도 방편
은원은 방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고향의 거리에서 판매되고 있는 살아 있는 물고기나 새를 사서 풀어주기도 했다. 창건된 만복사 앞에는 방생지放生池를 만들었다. 법요 후에는 반드시 방생을 하도록 했다. 무사들이 정권을 잡아 살생이 그칠 날이 없는 시대에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방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읊는다. “백세는 긴 꿈과 같지만 윤회를 거듭하니 얼마나 무상한가. 사생의 모든 생명은 한 가지이니, 상처를 주어 좋을 것이 무엇인가. 덕을 베풀되 물고기와 새에게도 미쳐 자비심을 일으키고 선량함에 이르러야 하리. 이러한 노력이 중생제도의 길이며, 물아物我의 기쁨이 더할 나위 없으리라.” 불도의 자비에 깊이 사무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원이 제자들과 함께 일본에 가져온 중국풍의 문화는 매우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불상, 건축, 서書, 회화, 의복, 의학 등 여러 측면에서 중국문화의 붐을 일으켰다. 특히 흔히 정진요리로 부르는 보차요리普茶料理는 전차煎茶의 의한 다례와 함께 전해졌다. 보차의 보는 대중에게 차를 베푼다는 뜻이다. 법요가 끝나고 승려들과 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양받은 계절 야채, 건어물이나 콩을 요리해서 평등한 식탁에서 전차나 말차를 즐기는 식사다. 현대에는 보차요리 전문점이 있을 정도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은원의 법손인 데츠겐 도코鐵眼道光에 의해 『데츠겐판 일체경』이 판각, 인쇄되었다는 점이다. 황벽판 대장경으로도 부르는데, 원판은 은원이 가져온 명판 대장경이다. 인쇄 기술은 물론 인쇄본을 열람하도록 하기 위해 권학원勸學院을 전국에 세워 도서관의 선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은원은 서예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황벽삼필黄檗三筆로서 은원은 덕행, 제자인 모쿠안 쇼토木庵性瑫는 도행道行, 소쿠이 뇨이치即非如一는 선행禪行에 뛰어난 인물로 본다. 이들에 의해 근세의 중국 서도가 대중 속에 확산되었다.

1673년 은원은 열반 3일 전에 제자를 불러 엄명했다. “선법은 중하게 여기고, 조금이라도 명리를 구하며 덕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죽음 이후, 나의 법을 등지면 나의 일문一門은 아니다.” 그리고 역대의 주지는 중국인으로 할 것을 정했다. 이러한 전통은 이어지다가 14대 때부터 일본인이 주지가 되었다. 불법은 국경을 초월하여 문화의 가교역할을 한다. 그리고 폐부 깊숙이 진리를 전달한다. 은원은 무경계의 불법을 자신의 주인공으로 삼고 허공에 족적을 찍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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