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마음 돈오’를 열어주는 두 문② - 간화선 화두 참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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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09:43 / 조회8회 / 댓글0건본문
혜능이 설한 ‘무념의 돈오견성’을 계승하면서 조사선의 특징까지 추가하면서 전개해 가던 선종은, 송대宋代의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에 이르러 돈오견성 방법론에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화두 의심과 돈오견성을 결합한 간화선看話禪의 등장’이 그것이다.
돈오견성 방법론의 새로운 전개: 화두 의심
혜능 이래 조사선까지의 선문에서는, 말 끝나자마자[言下] ‘바로 그때 그 자리[卽今]’에서 돈오견성하는 대화와 사례만 전할 뿐, 돈오견성을 위한 별도의 수행 방법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대중 집회에서는 법문을 통해 깨달음에 대한 선종의 관점을 설하여 돈오견성으로 이끌고, 일대일 대면 상황에서는 몸짓 언어와 시각 언어까지 채택한 독특한 대화법을 펼쳐 ‘무념의 마음 국면’을 ‘바로 그때 그 자리[卽今]’에서 일깨워 주는 창발적 언어방식을 펼치고 있을 뿐이다.
‘화두 의심을 통한 돈오견성’을 설하는 간화선의 등장은 돈오견성의 방법론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실로 획기적 전환이다. 스승으로부터 설법을 듣거나 일대일 대화를 통해 그 자리에서 돈오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선사들의 깨달음과 관련된 일화나 언구[機緣]’들을 표준[公案]으로 삼아 그 공안에서 의심/의정疑情을 일으켜 돈오견성을 체득하는 방법이다.

공안에서 일으킨 의심을 ‘화두 의심’이라 하고, 화두 의심을 간직해 가는 것을 <화두를 간看한다>라고 한다. 그래서 간화선看話禪이다. <화두 의심/의정을 오롯하게 챙겨 가다가, 마침내 더는 나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통로에 갇힌 것과 같은 상태인 ‘의심 덩어리[疑團]’가 되었을 때, 어떤 계기를 만나 홀연 이 의심 덩어리를 깨뜨리면 돈오견성하게 된다>라는 것이, 간화선이 수립한 돈오견성 방법론의 요점이다.
간화선 맥락의 화두 법문은 당대唐代 조주종념趙州從念(778〜897)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인 황벽희운黃檗希運(?〜850)의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에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라는 무자無字 화두 법문(주1)으로 이미 등장한다. 그러나 황벽이 조주보다 근 50년 앞서 입적하였다는 점, 『완릉록』의 이 내용이 판본에 따라 없는 곳이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사실이라 해도 이때까지 의심/의정은 부각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임제의현臨濟義玄(?〜867)까지만 해도, <화두에서 의심/의정을 일으켜 ‘의심 덩어리[疑團]’로 만들고 그 의심 덩어리를 깨뜨려 마침내 돈오견성하는 방법>은 형성되고 있지 않다. 이후 오조법연五祖法演(?〜1104)에 이르러 무자無字 화두를 통한 화두 참구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고, 마침내 대혜선사가 <오직 공안公案 화두에서 의심/의정을 일으켜 그 화두 의심을 타파하는 것>을 요점으로 하는 ‘의심/의정을 통한 화두 참구법’을 확립시킨다.

선종 전개의 어느 시점부터 선종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돈오견성 방법론’에 대한 요구가 비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설법이나 대화를 통해, 말 끝나자마자 ‘바로 그때 그 자리[卽今]’에서 돈오견성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희소한 경우였다. 따라서 널리 공유할 수 있는 ‘돈오견성 방법론’에 대한 갈증이 고조되었을 것이다. 이 요청에 대한 응답이 ‘화두 의심을 방법론으로 주목하는 통찰들’로 방향을 잡았고, 이러한 흐름을 계승·종합하여 집대성한 인물이 대혜였던 것으로 보인다.
화두 의심을 주목하게 된 시대적 배경도 있다. 송대의 선종에서는 활발한 어록 편찬 등 이른바 문자선文字禪, 선구禪句의 뜻을 사변 능력으로 헤아려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의리선義理禪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지식인 사대부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문文의 부흥’이라는 시대적 풍조와 선종이 결합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련된 문文 교양의 연장선에서 다분히 지적 관심의 대상으로 선에 접근했던 사대부들은, 의리선 풍조에 편승하여 선사들의 돈오견성 법문을 사변의 총명으로 해석하기를 즐겼다. 그 결과 선을 지식과 이해의 범주에서 다루는 경향을 고조시켰다. 문자선과 의리선 풍조에 따르는 부작용의 극복. 이것이 송대 선종의 과업이었다. ‘조작하는 분별로 해석하는 사유를 끊고 막는 방법’을 모색하던 선종 구도자의 집단 지성은 마침내 화두 의심을 주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화두 의심에서 대안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대되자, 대혜는 이 일련의 흐름을 집대성하여 ‘화두 의심을 돈오견성의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간화선’을 확립한다.
간화선에 대한 불교적 질문
구도자적 학인이라면, 간화선의 길에 들기 전에, <화두 의심은 돈오견성의 문門이다>라는 명제 자체의 의미와 타당성을 먼저 성찰해야만 한다.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하는 돈오견성의 길이기에, ‘화두 의심을 통한 돈오견성’이라는 방법론이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는 지적 전망을 우선 확보해야 한다. 간화선의 의미와 타당성에 대한 성찰적 신뢰를 먼저 마련해야 간화문에 용맹 발심할 수 있다.
<화두 의심만 해결하면 도인이 된다>라는 기대에만 부풀어 일으킨 수행 의지라면 자칫 맹목적이다. ‘결과에만 설레어 일으킨 발심’은 성공하기 어렵다. ‘사실에 맞는 이해와 관점의 수립[正見]’이 팔정도 해탈 수행의 첫 행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간화선 수행을 <그 어떤 이해나 지적 전망도 필요 없이 그저 화두 의심에만 몰입하다 보면 견성하게 되는 특별한 수행법>이라 생각한다면, 그런 관점으로는 간화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수행 테크닉’에만 관심이 있는 기능주의 수행관은 진리 탐구에 장애물이다. ‘맹목의 신념’일수록 기세등등하기 마련이어서 구도 학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선종 구성원들이나 선 사상에 관한 탐구들은, <화두 의심을 참구하면 돈오견성하게 된다>라는 것을 ‘질문이 불필요한 진리 명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질문하면 할수록 분별 허물만 키운다는 관점까지 일반화되어 있다. 게다가 이런 관점은 ‘분별심의 가공적 전개’를 막아주는 선문의 이런저런 언구들을 논거로 삼기 때문에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런 언구들의 의미는 ‘조건을 지닌 특수한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 ‘조건적 의미’를 간과하는 비非연기적 사유는, <화두 의심만을 간절히 챙겨 가면 어느 순간 돈오견성의 장場이 활짝 열려 무애도인이 된다>라는 말을 ‘질문할 필요가 없는 절대 명제’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무조건적 사유에 따른 절대 신념’은 간화선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간화선의 토대를 허무는 자해 행위다.
이런 신념은 간화선에 대한 불교적 성찰과 질문을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불교적 성찰’은 곧 ‘연기적 사유에 의한 성찰’이다. 그리고 연기적 사유는 ‘모든 현상을 그 발생 조건들과 관련하여 탐구하고 이해하는 사유’다. 따라서 불교적 성찰과 질문은 곧 ‘연기적 사유로 던지는 질문’이다. 간화선에 대한 불교적 질문은 이렇다. <화두 의심은 왜 돈오견성으로 이어지는가? 화두 의심이 돈오견성의 발생 조건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간화선 행보의 내용과 성패가 결정된다.
한국 불교는 세계적으로 간화선이 살아 숨 쉬는 유일한 경우다. ‘간화선은 최고의 선 수행법’이라는 인식이 아직은 보존된다. 그러나 간화선의 현실적 지위와 평가는 근저에서부터 균열의 징후가 표면화되고 있다. 간화선에 대한 이해가 현재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선 사상과 수행 현장에서 누리던 간화선의 위상과 역할은 위태롭다. 간화선 위기론은 사상과 현실 양면에서 날로 심화하고 있다. 간화선이 직면한 위기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대안 제시도 속출한다. <이대로 가면 간화선은 한국 불교에서도 더는 유지되기 어렵다>라는 위기의식과 우려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간화선이 부활할까?
간화선에 대한 불교적 질문과 대답이 활발해져야 활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돈오견성’ ‘화두 의심’ 등을 비롯한 간화선의 핵심 개념들에 대한 불교적 질문과 대답이 거듭거듭 이루어져야 한다. 선종의 핵심 개념과 명제들에 대해, 그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과 의미를 탐구하는 질문과 응답들이 살아나야 한다. <화두 의심은 왜 돈오견성으로 이어지는가? 화두 의심이 돈오견성의 발생 조건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화두 의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핵심부에 놓여 있다.
또한 <간화선과 니까야의 사띠 수행은 연속적인가 불연속적인가? 현재 유행하는 사띠 명상은 붓다의 사띠 설법에 얼마나 상응하는가? 화두 의심과 돈오견성은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선 법설에 상응하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대답도 핵심부에 놓인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개방된 태도’와 ‘관행에 매이지 않는 탐구적 응답’에 따라, 선종과 간화선의 명운이 갈리고 붓다 선禪의 전망도 결정된다고 본다. 필자도 꾸준히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제기하고 나름대로 대답해 왔다. 그 과정에서 확보한 관점은 기존의 것과는 차이를 보이는데, 이 차이는 선 담론의 역동적 진보를 위해 필요할 것이다.
질문이 막힌 이유
‘화두 의심과 돈오견성의 인과관계’를 질문하고 대답하려는 성찰 의지가 마비된 것에는, ‘화두 의심과 언어·사유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큰 역할을 한다. ‘화두 의심과 돈오견성의 인과관계’에 대한 성찰과 해명은 ‘사유와 언어의 길’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화두 의심은 모든 언어와 사유의 길을 끊는다고 하는데, 언어와 사유의 성찰을 통해 간화선의 본령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간화선 화두 의심은 언어와 사유의 행로를 끊는다>라는 것과 <언어와 사유로 성찰하여 간화선 수행법을 제대로 이해한다>라는 것은 충돌하는 양립 불가능 명제가 아니다. ‘간화선 화두 의심’과 ‘이해·판단·평가하는 사유와 언어’의 관계는 조건적 맥락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이 된다. 이들의 긍정 관계와 부정 관계는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에 따라 생겨나는 연기적 현상’이지, ‘일의적一義的으로 결정되는 무조건적 현상’이 아니다.
<변화·관계·차이의 현상세계와 접속한 채, 현상세계가 지닌 변화·관계·차이를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如實)’ 이해하여 관계 맺는 길, 그리하여 변화·관계·차이를 ‘불안과 고통’이 아닌 ‘풍요와 안락’의 근거로 누리게 하는 길>이 붓다의 중도中道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사유·감정·욕구·행위는 변화·관계·차이 현상을 조건 삼아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중도는 <변화·관계·차이의 현상세계와 접속하면서도 현상세계가 지닌 변화·관계·차이의 속성을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如實)’ 이해하여 관계 맺는 언어·사유·감정·욕구·행위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다.
따라서 붓다의 길에서는, 언어·사유·감정·욕구·행위의 중도적 주인공이 되는데 필요한 맥락과 조건에 따라, 언어·사유·감정·욕구·행위가 부정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리고 원효나 선종도 이러한 태도를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혜능과 이후의 조사선 거장들, 대혜와 후대의 간화선 거장들, 성철은 모두 언어의 긍정·부정을 자유롭게 구사한 언어의 중도적 주인공이었다. 언어·사유·감정·욕구·행위와 깨달음을 상호 부정적 관계로만 취급하는 것은 신비주의의 시선이지 선종이나 불교의 시선이 아니다.
※이번 글로 2년간의 집필 기한이 끝난다. 귀한 지면을 제공해 주신 『고경』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불교 잡지로 자리매김하길 기원한다. 영문판도 기대해 본다. 재미없는 필자의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각주>
(주1) 『신수대장경』 48권, p.387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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