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사뿐히 걸어가는 능파각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최신호 기사

월간고경

[거연심우소요]
물 위를 사뿐히 걸어가는 능파각


페이지 정보

정종섭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09:51  /   조회5회  /   댓글0건

본문

태안사

 

다시 태안사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혜철 화상은 귀국 후에 오늘날 화순和順인 무주武州의 쌍봉사雙峰寺에 머물다가 842년에 무주지방 동리산桐裏山으로 들어와 대안사大安寺에 머물면서 선문을 개창하였다. 이 난야는 원래 경덕왕景德王(김헌영金憲英, 재위 742~765) 원년인 742년에 3인의 승려가 지은 것이었는데, 혜철선사가 주석하면서 선문으로 점점 이름이 알려졌다.

 

조선시대에 붙여진 사명 태안사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908?) 선생의 문집인 『고운집孤雲集』에 실려 있는 봉암사의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을 보면, 최치원 선생은 혜철화상이 주석한 절을 ‘태안사太安寺’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동리산이라는 이름으로 보면 옛날 이곳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던 것 같다. 동리산을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봉두산鳳頭山으로도 불렀으니, 이곳은 봉황이 내려와 사는 산이라는 말이다.

 

봉황이 살려면 뽕나무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뽕나무가 많아서 봉황을 생각했는지 봉황이 먹고 사는데 뽕나무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산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산이 먼저냐 봉황이 먼저냐? 잘 모르겠다. 지금의 태안사泰安寺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와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태안사泰安寺’로 기재되어 있다. ‘太태’ 자와 ‘泰태’ 자는 같은 글자이니 굳이 개명이라 할 것도 없다. 어쩌면 최치원 선생이 살았던 신라시대에도 두 글자를 같은 뜻으로 혼용했을지도 모른다.

 

혜철선사는 왕경인 경주 귀족 박朴씨 가문의 출신으로 유학儒學과 노장학老莊學 등을 공부하다가 15세에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浮石寺에 출가하여 화엄학을 공부하고 22살에 비구계를 받았다. 그는 부석사의 여러 승려들의 권유로 당나라로 건너가 공공산龔公山의 지장선사 문하에서 수행하고 선법을 전수받아 왔다. 당시 신라에서 지장선사에게서 법을 받은 이로는 도의선사 이외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828년에 남악南嶽에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하고 실상산문을 개창한 홍척선사가 있었다. 도의선사나 홍척선사가 신라로 귀국한 시절에 혜철선사는 당나라에 있었다.

 

혜철선사는 불법을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고 총명하여 그를 만난 지장 선사가 바로 인가를 할 정도였다. 지장선사는 그에게 외국 사람으로서 중국 땅을 멀다 하지 않고 와서 법화法化를 청하니, 훗날에 설하는 바 없는 설[無說之說]과 법이 없는 가운데 있는 법[無法之法]이 해동에 전해지면 더 없이 복 받을 것이리라고 했다. 사찰의 건물 가운데 오늘날에도 무설전無說殿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있는데, 이는 이 무설지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지장선사의 선법을 받은 혜철선사

 

지장선사가 입적하자 그는 공공산을 떠나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 등 중국의 여러 사찰을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자리를 잡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읽고 그 종지를 터득한 다음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 비문으로 보면, 임금과 백성들이 모두 그의 귀국을 반기며 나라가 보물을 얻었고, 붓다의 지혜와 달마의 선법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고 하였다. 혜철선사는 이곳 태안사에 주석하며 법과 교화를 펼쳤다. 문성왕은 때때로 사람을 보내어 법을 청하기도 했다. 

 

사진 1. 보제루와 응향각 사이 적인선사탑으로 가는 길.

 

861년에 입적하자 제자들이 송봉松峰에 사리탑을 모셨다. 경문왕은 868년(경문왕 8)에 선사에게 ‘적인寂忍’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조륜청정照輪淸淨’으로 내렸다. 탑비는 872년(경문왕 12)에 세워졌다. 탑비의 비문은 당나라에서 숙위宿衛를 한 신라 한림대翰林臺의 영수인 한림랑翰林郞 최하崔賀 선생이 지었는데, 비문에서 혜철선사가 선법을 펼친 동리산문을 도가道家의 진인眞人들이 살았다는 나부산羅浮山과 육조혜능慧能 대사가 법을 펼친 보림사寶林寺가 있는 조계산曹溪山에 비유하면서 그 높은 경지를 찬양하였다.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자 구양순체歐陽詢體로 이름을 떨친 동궁東宮 소속의 중사인中舍人 요극일姚克一(?~?)이 썼는데, 그는 경문왕대에 시중侍中 겸 시서학사侍書學士를 지냈으며, 구양순체를 습득하여 글씨로도 김생金生(?~?)에 버금가는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태안사는 이러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기에 옛날에는 송광사松廣寺, 선암사仙巖寺, 화엄사華嚴寺, 쌍계사雙溪寺 등이 모두 태안사에 소속되어 있었다. 

 

60년에 걸친 최씨 무단정치

 

혜철선사는 쌍봉사에도 주석하였다. 그 이후 마조선사의 제자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에게서 법을 받은 도윤 화상이 금강산에 있다가 855년에 이곳 쌍봉사로 와 주석하였고, 그 제자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826~900) 화상이 사자산문獅子山門을 개창하면서 사세가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 때 집권자였던 최항崔沆(?~1257, 제3대 교정별감: 1249~1257)이 승려 시절에 쌍봉사의 주지를 지냈던 사실을 보면, 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 쌍봉사의 사세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최우崔瑀(1166~1249)와 기생 사이에 태어나 최만전崔萬全으로 불린 그가 오늘날 송광사인 수선사修禪社의 승려가 되기도 했지만, 그런 절 생활도 무의미했던 것이 그가 환속하여 권력을 쥔 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졌을 뿐 아니라 계모 대大씨를 독살하고 조정의 수많은 중신들도 유배를 보내거나 죽이는 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중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崔寔 1178~1234) 화상의 행장을 짓게 되는 정안鄭晏(?~1251)도 모반 혐의로 백령도에 귀양을 가서 죽임을 당하였다.

 

정안은 최우의 처남으로 최항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정안은 최씨 정권의 버팀목이 되었던 4대 가문 즉 경주김씨, 정안임씨, 하동정씨, 철원최씨 가문에 속하여 집권자 최우의 천거로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어 권세를 누리기도 했지만, 날로 난폭해지는 최우 정권을 피하여 육지의 끝자락인 남해南海로 내려가 사재로 정림사定林寺까지 세우고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고려대장경 일부를 간행하기도 하며 살았다. 이때 새긴 재조대장경再彫大藏經의 경판이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백련암>편에서 이야기하였다. 정안은 피세避世를 끝내고 최항의 집권기에 벼슬길로 나서 참지정사參知政事까지 올랐지만 결국 비극적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최항도 권력을 잡은 지 8년 만에 독살되어 황천길로 떠났다. 후사後嗣가 없이 죽었기 때문에 최항이 승려로 있을 때 송서宋壻의 여종과 정을 통해 낳은 최의崔竩(1233~1258, 제4대 교정별감: 1257~1258)가 졸지에 권력을 차지하였다. 최의 역시 혼란스런 국정을 운영하다가 1258년 대사성 유경柳璥(1211~1289), 최충헌崔忠獻(1149~1219)의 노비 아들로 낭장이 된 김인준金仁俊(=金俊, ?~1268), 별장 차송우車松祐(?~1268) 등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60년의 최씨 무단정치의 막이 내렸고, 고려는 몽골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뒷날 이야기인데, 혜철선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주석했던 쌍봉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태안사 2대조사 윤다 화상

 

다시 태안사 이야기로 돌아간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로 들어오면서 태안사 2대 조사인 광자廣慈대사 윤다允多(864~945) 화상이 주석하면서 절을 대가람으로 만들었다. 윤다 화상은 신라 말 경문왕 4년에 경주 귀족가문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출가의 원을 세우고 전국을 행각하다가 동리산으로 가서 상방上方 화상인 여如선사의 문하로 들어가 시봉하였다. 그는 혜철선사와 여선사로 이어지는 선법을 유지하였지만 혜철선사도 그랬듯이 수행자로서 경전을 중시하고 계율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에 더 많은 무게를 두었다.

 

마조도일의 선에서도 유식唯識에서의 법상法相을 기반으로 하여 계율과 선 수행을 중시하였는데, 윤다 화상의 선풍도 이와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본 것처럼 나말여초의 시대를 살았는데, 선사들을 우대하던 효공왕孝恭王(재위 897~912)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그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았다. 자신이 미륵보살임을 내세우고 나선 궁예弓裔(857?~918, 태동 국왕 재위: 901~918)와 견훤이 난립하던 난세를 관통하며 살다가 왕건王建(재위 918~943)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왕건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지냈다.

 

왕건이 윤다 화상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였다. 화상은 출가한 이후 한 번도 권세가를 만나러 절문을 나선 적이 없었지만, 이때에는 처음으로 걸어서 수도 개성까지 갔다. 왕건은 화상과 문답을 주고받은 후에 화상을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 개성 흥왕사興王寺 황주원黃州院에 모시도록 하였다. 윤다 화상은 왕경에서 지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아 태안사로 돌아갈 것을 여러 차례 청한 결과 만년에 태안사로 다시 돌아왔다.

 

왕은 전라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전결田結과 노비, 향적香積을 적극 제공하게 하고 사찰을 보호하도록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윤다 화상도 태조를 돕기에 이르렀고, 태조의 지원으로 태안사는 132칸에 달하는 당우를 중창할 수 있었다. 태안사는 이 시절에 사세가 크게 번창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945년(혜종 2년)에 82세로 태안사에서 입적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1396~1486)의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비는 원찰願刹이 되어 효령대군으로부터 전답, 시지, 노비, 청동 바라 등 많은 재산을 시주받았다. 그리하여 태안사에는 대공덕주大功德主인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이 세워졌고, 종친부宗親府로부터 각종의 잡역雜役과 사역使役을 면제받는 혜택을 받았다. 대군의 발원으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큰 바라는 현존하는 바라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인근 강진의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도 효령대군이 지원하여 중창을 하였고, 많은 시주를 한 그의 원당이 있었다.

 

전강·송담선사와 근현대의 태안사

 

태안사 계곡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처음 만나는 것이 「棟裡山門」이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는 문을 만난다. 사역이 시작하는 곳에 세운 것인데, 여기서 한참이나 들어가야 일주문이 있기에 근래에 사역이 시작되는 지점을 알리고자 문을 세웠다. 문의 현액과 양쪽 기둥에 걸린 주련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선장인 송담정은松潭正隱(1927~) 선사의 글씨이다. ‘裏리’와 ‘裡리’는 같은 글자다. 송담선사는 전강영신田岡永信(1898~1975) 선사의 적전제자로 ‘북송담 남진제’라고 칭할 때, 그 송담선사이다. 스승이 오도송을 읊고 한 시절 머물었던 태안사이기에 송담선사의 감회는 특별했으리라 생각된다. 

 

사진 2. 동리산 태안사 사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동리산문’.

 

전강선사는 절에서 유가儒家의 책을 읽고 있는 총명한 청년이 한눈에 들어 점지하고는 출가하도록 하였다. 송담선사는 그 길로 스승을 따라 나섰고, 스승은 제자에게 평생 벙어리로 살라는 명을 내리고는 자신은 밥하고 빨래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제자를 위해 뒷바라지를 하였다. 제자는 그날로 입을 다물고 10년 세월을 벙어리로 살며 수행하였다. 그리고는 세월이 지나 스승이 이제는 말문을 열어도 된다고 했을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해 설법을 하였으니, 우리가 그간에 들어온 논리적이면서도 청산유수 같은 법문이다.

 

전강선사는 발길이 닿는 대로 운수행각을 하던 시절 어느 날 호서지방 태안사로 향했다. 사람 잡아먹은 호랑이 이야기가 전하는 고개를 한밤중에 넘어오다가 문득 화두가 터지면서 오도悟道를 체험했다. 선사의 말대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한문 실력이지만 태안사에서 오도의 순간을 적은 송頌은 이러했다.

 

지난 밤 삼경에 누각에는 달이 가득 찼고,

옛집 창밖에는 갈대꽃 핀 가을이로다.

붓다와 조사도 여기에서 목숨을 다하나니,

바위에서 떨어진 물이 다리 밑을 지나가도다.

 

작야삼경월만루 昨夜三更月滿樓

고가창외노화추 古家窓外蘆花秋

불조도차상신명 佛祖到此喪身命

암하유수과교래 岩下流水過橋來

 

선사는 그랬다. ‘이렇게 적어 보았지만 이를 누구와 함께 말할 것이며,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으며, 이 경계를 알겠는가’라고. 그리고는 법당 앞마당에 오줌을 냅다 갈겼다. 절에서는 낯선 중이 와서 이런 무례를 범한다며 난리가 났다. 선사는 말했다. “그러면 내가 어디에 오줌을 누면 되는지 일러 봐라! 온 천지가 비로자나의 몸인데 어디에 오줌을 누라는 말이냐!” 그때 태안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전강선사는 경허성우鏡虛惺牛(1849~1912)-만공월면滿空月面(1871~1946)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은 선사이다.

 

사진 3. 송담선사 그림.

 

내가 처음 송담선사를 뵌 것은 전강선사의 진영이 걸려 있는 인천 용화사龍華寺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시는 모습을 먼발치로 보았을 때였다. 꼬박 10년의 묵언수행을 하고 난 후 송담선사에게서 나온 오도송은 이랬다.

 

황매산 암자 뜰에 봄눈이 내렸는데

찬 하늘에 기러기가 북쪽으로 울며 간다.

무슨 일로 십 년 세월 헛되이 버렸는가

달빛 아래 섬진강만 길이 길이 흘러간다.

 

황매산정춘설하 黃梅山庭春雪下   

한안누천향북비 寒雁淚天向北飛

하사십년왕비력 何事十年枉費力

월하섬진대강류 月下蟾津大江流

 

훗날 송담선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10년 묵언수행을 해도 한 소식을 얻지 못하면 다시 10년간 눈도 감아버리려 했다고 말했다. 스승과 제자는 이렇게 치열했다. 나는 송담선사의 현판 글씨를 보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눈은 글씨에 머문 것 같은데, 머리에는 다른 생각만 가득 했다. 송담선사에 관한 일체의 자료는 해남 대흥사大興寺 성보박물관에 있다. 

 

능파각을 지나 청량한 가람 속으로

 

이 문을 지나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사역이 시작된다. 찻길을 따라 걷는 것보다 계곡 숲을 따라 난 길을 걷는 것이 훨씬 운치가 있고 산사를 찾아가는 맛이 있다. 여전히 소나무와 산죽山竹들이 우거지고 나무 사이로는 햇살이 비친다. 계곡의 물소리는 옥구슬이 구르듯이 맑고 깨끗하다. 물빛도 그렇지만 그 소리도 그렇다는 말이다. 단풍철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기도 하지만, 인적이 뜸해진 시간에 이 골짜기를 찾아들면 홀로 사유의 시간을 가지고 고독을 즐길 수 있다. 

 

사진 4. 태안사 능파각

 

길을 따라 계류를 사이에 두고 걷다 보면 석교로 된 반야교般若橋와 해탈교解脫橋를 건너게 된다. 붓다를 만나러 가는 길이 길게 나 있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걷다 보면 한껏 낮아진 자신이 어느덧 절에 다다른 것을 발견한다. 물소리 들으며 걸어 온 숲길이 끝나는 지점의 계곡에는 반석들이 층을 이루고 있다. 솟아 나온 작은 바위들 사이로 개울물이 흐르고 여기저기 작은 폭포도 만들고 있다.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눈을 들어보면 개울을 건너는 다리 위에 누각 하나가 멋있게 서 있다. 언뜻 보면 계곡을 가로질러 세운 공중누각 같다. 이름하여 능파각凌波閣이다. 능파는 물 위를 가뿐히 걷는다는 말인데, 정말 다리 누각이 계류를 건너고 있었다. 단층이라서 더 경쾌하다. 이 다리는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다리이고, 붓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건너가세 건너가세(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수없이 되뇌는 것은 바로 이렇게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을 염원하는 것이리라. 죽어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무명의 세계에서 진리의 세계로 가는 것!

 

사진 5. 송광사 우화각. 사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다리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것은 문루門樓를 겸한 공간을 연출한 것인데, 동리산문이 없었을 때에는 이 능파각이 사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혜철선사가 절을 지었을 때에도 다리를 놓았다고 되어 있고, 광자대사가 이 다리를 개축했을 때에 누교樓橋로 불렀던 것을 보면 그 시절에도 다리에 누각을 얹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천복루薦福樓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 이후 조선시대 1737년(영조 13)에 본격적으로 누각을 중창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 6. 능파각에서 일주문 가는 길.

 

능파각은 계곡의 양쪽에 석축을 쌓아 축대를 만들고 통나무보를 걸쳐 그 위에 누각을 지었다. 사찰에 따라서는 돌로 무지개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세우기도 하는데, 무지개다리에 누각을 세운 것으로는 인근 송광사의 우화각羽化閣이 그 한 예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이 풍광은 실로 일품이다. 나는 이 풍경을 보려고 개울 쪽으로 내려가 한참이나 위를 바라보며 풍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절로 가는 것도 잊고 말이다. 도대체 누가 저런 다리를 지었을까? 그리고 이름은 어째서 그렇게 지었을까? 능파라는 말은 불교적인 것은 아니다. 굳이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비천飛天이 이 계류 위로 내려와 물 위를 걸어가는 모습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과한 상상이리라.

 

사진 7. 태안사 일주문.

능파각을 건너면 양쪽으로 하늘을 가리는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마치 숲길로 들어선 것과 같은 느낌이다. 산사의 공기가 소쇄瀟灑하다. 이른 아침나절에 절을 한 바퀴 돌아 이 길을 걸어보면 청량淸涼하다는 말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일주문에 걸린 동리산태안사

 

길 끝 지점에 쌓아놓은 돌계단을 밟아 올라서면, 앞으로 우러러보이는 자리에 서 있는 늘씬한 자태를 하고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만난다.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은 양쪽으로 구하기 힘든 굵은 나무 기둥을 일주一柱라는 말 그대로 하나씩 세우고 작은 보조기둥을 세워 5층의 다포多包를 쌓아 올려 화려하게 만들어 세운 것이다. 찬란하면서도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간략하게 느껴지고 맑고 기품이 있는 기운이 감도는 문이다.

 

사진 8. 김돈희 글씨 동리산태안사 현판(좌). 사진 9. 봉황문 현판(우).

 

조선시대인 1683년(숙종 9)에 학현學玄대사가 중건한 이래 보수를 거치며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다. 보물로 지정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문화유산이다. 현판의 글씨는 구한말에 당대 조선을 대표한 서예가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7) 선생이 썼다. 성당 선생의 자유로운 예서풍이 진하게 배어 있는 필법으로 해서로 쓴 것이다. 글씨를 새기는 사람이 성당 선생의 원래의 필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이 아쉽다. 문의 뒤쪽에는 「鳳凰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정종섭님의 모든글 보기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