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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속의 불교 ]
소신공양과 죽음이 삶을 이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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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13:28  /   조회3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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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선생이 내 백씨를 보고,

“범부, 중국 고승전高僧傳에서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니 분신공양焚身供養이니 하는 기록이 가끔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아…” 했다.

내 백씨는 천천히 입을 열며,

“글쎄요. 형님이 못 보셨다면야…”

하고 자기도 기억이 없노라는 것이다.

내가 참견을 했다.

“소신공양이 뭡니까?”

나에게 있어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주지 스님이 그 대답을 맡았다.

“옛날 수좌수들이 참선을 해도 뜻대로 도통道通이 안 되고 하니까 자기 몸을 스스로 불태워서 부처님께 재물로 바치는 거라. 성불成佛할라고 말이다.”

“불 속에 뛰어듭니까?”

“그렇게 하믄 공양이 되나?”

“그럼 어떻게?”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앉아야지. 머리 위에 불덩어리 든 향로나 그런 걸 갖다 씌워야지.”

“?…”

나는 더 물을 힘이 나지 않았다. 벌겋게 단 향로 따위를 머리에 쓴다고 생각하자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뜨거움을 어떻게 견뎌낼까, 어떻게 곧 고꾸라지지 않고 앉은 자세를 유지해 낼까 … 나는 아래턱이 달달달 떨려서 견딜 수 없었다.(주1)

 

사진 1. 김동리의 형이자 소설가인 김범부(1897~1966).

 

한국문학사에서 대표적인 불교소설로 꼽히는 「등신불」의 탄생 장면을 김동리는 ‘만해 한용운’과 그의 큰형 ‘김범부’의 위와 같은 대화에 대한 회고에서 찾는다. 만해의 질문에 대한 김범부의 대답, 그리고 동리의 질문에 대한 당시 도솔사 주지였던 최범술의 설명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등신불」의 소설화에 관련된 창작 모티프이면서 그 자체로 ‘불교와 문학’이 만나는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김범부, 만해 한용운, 최범술, 범산 김법린 등이 다솔사에 모여 있을 수밖에 없었던 1938년 당시의 정황은 일제의 탄압이 극도로 심해져서 불교계, 문학계, 출판, 문화 등이 모두 친일의 강요와 압력에 놓인 시기였다. 일찍이 선학원을 중심으로 김범부, 한용운, 김법린, 최범술 등이 불교의 유신 등을 추진하다가 선학원이 친일 쪽으로 기울면서 경성을 떠나서 해인사의 말사인 다솔사에 내려와 집결한 것인데, 이런 정황은 당시 다솔사 주지였던 최범술의 글(주2)에 잘 나타난다. 

 

사진 2. 1961년 11월 《사상계》 101호에 게재된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

 

김범부와 항일불교단체 만당卍黨을 이끌던 한용운, 그리고 승려 최범술의 대화 장소에 김동리가 동석同席을 했고, 그 결과가 약 20여 년 후인 1961년 「등신불」의 발표로 나타난 것이다. 서정주가 ‘신라의 내부’를 탐색한 결과라고 했던 시집 『신라초』를 출간한 것도 1961년이라는 점에서, 김범부를 통해 ‘신라’와 ‘『삼국유사』’를 알게 된 ‘동리와 미당’이 같은 해에 내놓은 작품이 시집 『신라초』와 소설 「등신불」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 문학사적인 ‘사건’ 혹은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정주와 김동리의 신라와 불교

 

신라의 상상적 복원을 시로 쓴 ‘서정주’, ‘만해와 김범부’의 대화에서 ‘소신공양’과 보살행, 성과 속의 경계 없음을 모티프로 「등신불」을 창작한 김동리는 모두 ‘김범부’를 경유한 『삼국유사』의 세계관과 불교를 ‘문학’으로 옮겨 놓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의 작업은, 소설에서는 설화와 옛이야기에 머물던 ‘불교적 서사’를 ‘현재적 문제’로 옮겨 놓았고, 시에서는 ‘설화의 수사와 노래의 정신’을 현대시에 접목시키는 성과를 낳았다.

 

사진 3. 소설가 춘원 이광수(1892〜1950).

 

1960년대 이후 한국문학사의 시와 소설을 이끌면서 ‘문협정통파’라는 중심의 신화를 만든,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석전 박한영, 송만공, 만해 한용운, 해인사의 백용성 등 불교계 유신 운동을 이끈 혁명적 인사와 선학원 강사로 있던 김범부 등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는 점 역시 이 두 사람의 이후 ‘문학세계’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불교소설은 양건식의 「석사자상」, 「한일월」, 「아의 종교」, 「오!」를 시작으로 하여, 이광수의 「무명無明」, 「육장기鬻庄記」, 「난제오亂啼烏」, 「꿈」 등의 중·단편과 『사랑』, 『이차돈의 사』, 『원효대사』 등의 장편소설, 한용운의 『박명』 등, 김동인의 「석가여래」, 「논개의 환생」, 「낙왕성추야담落王城秋野談」, 「조신의 꿈」, 「제성대帝星臺」, 현진건의 『무영탑』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광수는 특히 『마의태자』, 『세종대왕』, 『이차돈의 사』, 『원효대사』 등 역사소설류와 조신설화를 바탕으로 한 「꿈」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 밖에 그가 쓴 「무명」, 『사랑』, 「육장기」, 「난제오」 등의 작품은 불교적인 세계관을 통해 당시의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불교소설’의 새로운 유형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광수의 불교소설 개척의 공로에 견주어 본다면, 김동리는 1961년 이후 「등신불」, 「극락조」, 「눈 오는 오후」, 「저승새」, 「미륵랑」, 「호원사기」 등 보살행을 통한 구원, 수행과 인간적 고통의 극복을 위한 자비와 보살행의 실천, 예술혼과 불교적 해탈의 연결, 윤회론을 담은 소설 등 주제와 세계관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은 인간적 고통과 그로부터의 해탈을 위해 고투하는 ‘종교적 수행과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탐구’로 정리되는데, ‘삶의 구경究竟 탐구’라는 그의 문학에 대한 신념은 이 점에서 ‘불교적 구도’와 상당히 근접한 것이기도 하다. 

 

선학원과 김동리, 서정주의 첫 만남

 

김동리와 미당 서정주의 첫 만남은 ‘선학원’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첫 만남은 이 두 사람이 이후 한국문학사에서 ‘불교’를 체득하고 그것을 문학정신에 녹여내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김동리는 형 김범부를 찾아서 상경하고, 서정주는 학교를 그만둔 채 경성에서 넝마주이를 하다가 박한영 선사의 부름을 받으면서 불교계와 인연을 맺었고 또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 친구가 된다. 

 

사진 4. 만공스님과 선학원 유교법회.

 

또 이 둘의 만남을 연결해 준 사람이 미사 배상기인데, 그는 범부의 제자이면서 석전 박한영에게 미당을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선학원 강사로 있던 김범부, 조선 불교 교정이면서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인 박한영이 각각 김동리와 서정주의 후원자였고, 이 둘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면서 두 사람의 후원자인 김범부와 박한영의 영향을 동시에 받게 된다.

 

김범부로부터는 ‘경주’ 즉 서라벌이라는 고대 신라의 특별한 장소성과 화랑정신, 국선도, 『삼국유사』 등의 세계관을 전수받았다면, 석전 박한영과의 인연은 이 두 사람이 모두 한때 출가를 할까 하는 생각을 품는다든가 불교 경전과 교리를 접하고 체득하는 계기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도 선학원을 오가게 되면서 당시 ‘불교 유신’을 통해 ‘민족 불교’를 일으키려고 노력하던 한용운, 백용성, 송만공, 박한영, 김법린, 최범술 등의 불교계 지식인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후 이 두 사람의 문학적 세계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체험이 된다. 

 

사진 5. 김법린(1899〜1964). 문교부장관과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지냈다(좌). 사진 6. 효당 최범술(1904〜1979). 독립운동가로 제헌의원을 지냈다(우).

 

미당 서정주는 한용운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금강산으로 송만공을 찾아가 만났고, 박한영에게 직접 불교의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 반면, 김동리는 형 김범부를 통해서 선학원 인맥과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 인사들과의 만남을 쉽게 갖게 되는데, 서정주에게는 ‘선운사’, 김동리에게는 ‘해인사’와 ‘다솔사’가 각각 지역적인 연고와 불교적 상상력의 바탕이 되는 원체험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운명애와 영통, 그리고 저승이 이승을 이기는 곳

 

김동리가 김범부를 통해 한용운을 만나고 다솔사로 낙향한 행보는 1938년 당시로 치면 김동리에게 친일을 면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다솔사와 해인사 생활을 통해 ‘신라’라는 상상세계를 구축하고, ‘저승이 이승을 이기는 곳’으로서의 ‘경주’의 장소성을, ‘생의 구경 탐구’, ‘제3휴머니즘’으로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게 해 준다. 형 김범부의 ‘신라’와 ‘『삼국유사』’는 김동리와 서정주에게 각각 ‘신라’를 자신의 유년기 체험이 시작된 고향, 경주와 고창을 재창조하는 시작점이 되었고, 그 결과는 1961년 김동리의 「등신불」을 시작으로 하는 불교소설과 서정주의 『신라초』로 나타난다. 

 

김동리의 문학사상은 무속, 국선도의 선仙 사상이 핵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불교적인 해탈을 인간의 궁극적인 한계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는 그의 생각이, ‘죽음’, ‘영혼’, ‘귀신’, ‘운명’ 등 삶이나 인생을 규정하고 제약하는 또 다른 저편의 불가항력적인 조건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게 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7. 김동리(1913〜1995).​

 

이 점에서 그의 제3휴머니즘은 서정주와 마찬가지로 ‘니체’적인 운명애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동리에게 「등신불」은 이런 운명적 제약에 대한 순응과 체념을 바탕에 둔 ‘자비’와 ‘보살행’을 다룸으로써 전혀 부처 같지 않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육신을 그대로 간직한 대상이면서 ‘죽음이 삶을 이기는’ 역설의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킨 소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정주는 ‘신라’를 통해 불교적 가치와 세계관이 일상이 된 사람들의 풍류와, 삶의 속박을 초탈하는 ‘영통’을 시로 구현한다. 반면, 김동리는 사바세계의 고통을 이기는 정신의 근거로 ‘죽음과 저승’을 상상하고, 그에 대한 탐구를 ‘생의 구경 탐구’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승이 이승을 이긴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는 삶이 모든 가치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삶을 이기는 죽음의 힘, 그 능력을 ‘영통’이라고 한다면, 구도나 해탈의 지향은 ‘운명적인 한계’를 ‘숙명’이 아니라 ‘해탈과 도전’의 조건으로 인식하게 된다. 

김동리 소설의 갈등은 이 점에서 삶의 표면을 넘어서는 가치와 이념에 대한 추구로 연결되는데, 이런 특성은 종종 불교적인 구도 행위로 나타나거나 그런 구도를 ‘실존적 기투’나 니체적인 ‘운명애’로 표출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각주>

(주1) 김동리, 「만해 선생과 ‘등신불’」, 『나를 찾아서』, 민음사, 1997, 181~182쪽.

(주2) 최범술, 「청춘은 아름다워라-최범술 43」, 『국제신보』, 1976. 1.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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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계간 <시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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