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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적인선사탑과 광자대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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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6 년 1 월 [통권 제153호]  /     /  작성일26-01-04 17:28  /   조회4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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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❸   

 

일주문을 지나면 앞으로 금강문金剛門이 보인다. 일주문에서 금강문까지는 돌로 포장된 길이 일직선으로 나 있다. 금강문을 지나면 통상 천왕문天王門이 나오는데, 태안사에는 천왕문이 없다. 어쩌면 옛날에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금강문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면 1796년(정조 20)에 중건한 중층의 보제루普濟樓와 높은 축대 위에 담으로 둘러싼 응향각凝香閣 사이로 가게 된다. 이곳에서 잘 정돈된 돌계단을 밟아 올라서면 대웅전大雄殿을 마주하게 된다.

 

전쟁 이후 복원된 대웅전

 

원래는 대웅전을 마주하기 전에 해탈문解脫門이 있기 마련인데, 이곳에는 이런 문이 없다. 뿐만 아니라 대웅전 앞마당에 있을 법한 탑도 보이지 않는다. 원래의 대웅전은 6·25전쟁 당시에 불타버려 1969년에 대웅전을 다시 세웠다. 「大雄殿」의 현판은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1908~1997) 선생이 썼다. 일본 식민지시기에 동경東京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고 제주도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평생 서예가로 활동하였다. 운필은 자유분방하지만 서법을 이탈하지 않은 글씨다. 소암 선생의 글씨는 특히 행서에서 독자적인 풍을 잘 나타내 보여준다. 

 

사진 1. 태안사 대웅전.

 

대웅전의 불상들은 봉서암鳳瑞庵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태안사의 당우로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능파각 다리와 일주문 정도인데, 6·25전쟁으로 15채의 당우들이 소실되는 전화戰禍의 와중渦中에 여러 문들도 없어지고 탑도 파괴되었을지도 모른다. 태안사에는 원래 탑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없어진 것 같다. 흩어진 석탑의 일부를 모아 최근 조성한 연못 중앙의 섬에 복원하여 놓았다.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양식인데, 그 시대 가람구조가 1금당 2탑인 점을 고려하면, 태안사에도 원래는 쌍탑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가람배치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진 2. 현중화 글씨 대웅전 현판.

 

대웅전을 옆으로 돌아 뒤쪽으로 가면 염화실拈花室이 있다. 전주 출신으로 당시에 글씨를 잘 쓴다고 알려진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쓴 「拈花室」의 현판이 걸려 있다. 만세루의 현판도 그가 썼다. 그 옆으로 난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禪院」이라는 현판이 걸린 당우가 앉아 있는 앞마당이 열린다. 이곳이 바로 당대의 선장들이 수행했던 그 유명한 태안사 선원이다. 현판은 성당惺堂 김돈희 선생이 예서로 강건하게 썼다. 가로획의 끝을 강하게 들어올리는 성당 예서의 특징이 여기서도 잘 나타나 있다. 기둥에 걸린 주련도 성당 선생의 글씨이다. 현재의 건물은 1969년에 다시 지은 것인데, 현판과 주련은 원래의 것을 걸었다. 

 


사진 3. 이삼만 글씨 염화실 현판(상)과 만세루 현판(하).

 

이 앞마당에서 산 쪽으로 보면, 장대하게 쌓은 석축 위에 긴 담을 조성하고 높은 돌계단을 올라 출입문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다. 마치 도솔천으로 들어가는 것마냥 하늘을 배경으로 높은 곳에 있다. 도대체 문을 넘어서면 무슨 공간이 있기에 이렇게 조성하여 놓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곳에 혜철 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이 있다. 

 

사진 4. 김돈희 글씨 선원 현판.

 

태안사의 존재 근거이고 지금까지 태안사가 한국불교의 중요한 가람인 연유이다. 선원 마당에서 위로 쳐다보면 출입문에 「拜謁門」이라는 현판이 높이 걸려 있다. 현판의 글씨는 이삼만이 썼다. 사찰에서 문의 이름을 이렇게 짓는 경우는 드문데, 혜철 선사의 득도한 경지와 존재감이 압도적이었음을 잘 나타내 보여준다. 특히 선종의 경우에는 선사가 곧 붓다이기 때문에 선종 사찰의 가람 구조에서는 불상을 봉안한 불전佛殿보다는 그 뒤 높은 자리에 배치하는 설법 공간인 법당法堂이나 조사의 승탑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태안사의 경우에도 대웅전 뒤에 있는 개산조開山祖의 승탑을 봉안한 곳이 사찰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된다.  

 

석조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적인선사탑

 

<적인선사탑>은 4각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가 모두 8각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승탑이다. 기단부의 8각으로 된 하대석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고, 각 면에 사자상獅子像이 강한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이 사자상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것같이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낮은 중대석에는 8각의 면마다 길게 안상眼象을 새겼다. 세 겹의 앙련仰蓮들이 둥글게 받치고 있는 8각의 상대석 위에 8각의 탑신을 세웠다. 탑신의 앞면과 뒷면에는 문 모양을 새겼고, 그 옆면으로는 제석천상帝釋天像과 범천상梵天像을 새기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과 서까래와 막새기와까지 정교하게 조각하고, 추녀의 끝이 모두 올라가 있어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펼친 모습을 한 누각과 같은 느낌을 준다. 돌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사실적이고 아름답기가 이를 데 없다. 상륜부를 장식하고 있는 앙련仰蓮,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주寶珠 등은 원래의 모양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장식들은 기단부와 탑신부의 정교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보이게 해준다.

 

사진 5. 선원과 배알문.

 

통일신라시대 후기인 경문왕 원년(861)경에 조성된 것이고, 지리산 주변에 남아 있는 승탑 가운데는 가장 빠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전성기의 승탑과 같이 뛰어난 조형성과 미적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고루 갖추고 있어 봉암사의 <지증대사탑智證大師塔>과 같이 석조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국보로 지정된 국가유산이다.

 

승탑 옆에 서 있는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즉 <적인선사탑비>는 원래의 것이 아니고 1927년에 추담오성秋潭午性 선사 등이 주도하여 다시 건립한 것이다. 귀부는 원래의 것이고, 이수는 원래 <광자대사탑비廣慈大師塔碑>의 이수를 다시 사용한 것이다. 이수의 비액에는 ‘寂忍禪師’라고 전서로 새겼다. 원래는 <광자대사탑비>의 이수였기 때문에 기존의 것을 지우고 새로 쓴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있는 비의 비문은 대강백인 석전한영石顚漢永(1870~1948) 선사가 원래의 비문을 축약하고 <동리산기실桐裏山紀實>이라는 글을 새로 지은 것이다. 글씨는 김돈희 선생이 다시 썼다. 

 

이 비에서 성당 선생의 작은 소해小楷 글씨를 잘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성당 서풍書風에 자주 나타나는 획의 변화를 줄이고 격조를 유지하면서 유려流麗하고 멋이 있게 썼다. 일주문과 선원의 현판과 주련 그리고 새로 건립한 <적인선사탑비>의 글씨를 모두 김돈희 선생이 쓴 것을 보면, 사찰을 중수하던 그 시절에 한꺼번에 쓴 것 같기도 하다. 최하 선생이 비문을 쓴 원래의 <적인선사탑비>는 872년에 세워졌다. 귀부만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재 실물의 부분이 남아 있는 신라시대 남종선의 선사탑비로는 이 탑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사진 6. 적인선사탑.

 

단속사斷俗寺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는 813년(헌덕왕 5)에 세워졌으나, 현재 그 내용이 탁본으로만 남아 있고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신행神行(704~779) 선사는 ‘홍인弘忍(601~674)-옥천신수玉泉神秀(?~706)-숭산보적崇山普寂(651~739)-지공志空(?~?)’으로 이어지는 북종선의 지공 선사에게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단속사에서 불법을 펼쳤다. 일본 교토京都 히에이잔比叡山에 천태종天台宗의 본산인 연력사延曆寺를 세운 전교대사傳敎大師 사이초最澄(767~822)는 숭산보적의 법맥을 이은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숭산보적-도선道璿(701~760)-행표行表(?~?)’로 이어지는 행표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적인선사탑>을 배알하고 계단으로 내려와 다시 선원 앞마당에 이르렀다. 선원의 각 방문 앞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다. 일반인의 걸음이 근접하지 않게 대나무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았다. 태안사의 선원은 큰 규모인데, 혜철 선사의 사리탑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더 큰 의미가 있다. 혜철 선사의 육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가르침은 여전히 이 공간에 머물고 있는 만큼, 수행자들은 바로 혜철 선사의 문하에서 선법을 배우는 것이리라.

 

오늘날에도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hgaya의 마하보디대탑Mahabodhi Great Stupa이나 붓다를 상징하는 최초의 불탑인 산치Sanchi 대탑이 있는 곳에 전 세계에서 온 수행자들이나 신자들이 예배하고 기도하거나 참선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리라. 현재 이곳 선원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어서 안거安居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사진 7. 적인선사탑비.

 

나는 앞마당에서 한참 동안이나 서성거렸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발걸음이 쉽게 옮겨지지 않았다. 어쩌면 어느 시절 어느 때 달 밝은 밤에 수행승들이 이 마당을 걸으며 행선行禪을 했을지도 모르고, 인적 드문 고요한 마당에 적막이 감돈 지도 수세기가 반복되었을 것이다. ‘관강수월래觀降水月來!’, ‘저기 내려오신다, 수월관음보살 오신다’, ‘어서 오셔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주소서’라고 누군가 원을 세워 기도하였을지도 모르고, 어느 시절에 누군가는 휘영청 밝은 달밤에 중생을 구제하러 내려오는 수월관음水月觀音의 현현顯現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간절한 기원의 목소리인 ‘관강수월래’가 나중에 ‘강강수월래’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홀로 나와 선사의 사리탑 옆에 앉아 보기도 했을 것이다.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존재, 독존獨存인 인간 그 자체로 말이다.

 

그렇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온 곳이 없는 데 갈 곳은 있는가?’ 하는 등등의 영겁회귀永劫回歸하는 이 질문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알아챘을 때는 시간이 제법 지나 태양이 서서히 하늘 가운데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말여초 승탑 양식을 간직한 광자대사탑

 

경사진 사역에서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아래로 내려와 금강문 밖으로 나오면 왼편에 팔각원당형 승탑, 구형 승탑, 석종형 승탑 등 여러 형태의 많은 승탑들을 모아 조성한 부도림이 있다. 원래의 자리에서 이리로 옮겨 놓은 <광자대사탑>이 있고, 그 옆에는 파괴되고 남은 비의 한 부분도 세워져 있다. 탑비의 비신을 받치고 있었던 귀부龜趺 위에 비신의 머릿돌인 이수螭首를 포개어 놓았다.  

 

광자 대사의 입적이 있자 태조의 장자로 왕위를 승계한 혜종惠宗(재위 943~945)은 국비를 지원하고 주민들을 동원하여 대사의 승탑을 태안사에 세웠다. 이 팔각원당형의 승탑은 혜철 선사의 <적인선사탑>과 같이 나말여초 시기 승탑의 양식을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형태와 균형 그리고 정교한 조각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기 그지없다. 승탑은 기단부基壇部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 위에 탑신塔身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대석에는 운룡雲龍무늬와 복련伏蓮무늬를 새겼고, 상대석에는 앙련仰蓮 바탕 위에 연꽃무늬를 화려하게 새겼다. 〈적인선사탑〉과 비교하면 하대석에 연꽃을 새겨 놓은 것이 눈에 띈다. 그 위에 8각의 탑신을 얹었는데, 각 면에는 향로와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겼다. 지붕의 골과 서까래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고, 8각의 지붕은 곡선을 이루고 추녀 끝은 위로 향하게 하여 날아갈 듯이 만들었다. 역시 보물로 지정된 국가유산이다. 

 

사진 8. 광자대사탑 귀부와 이수.

 

<유당고려국무주고동리산대안사교시광자대사비명병서有唐高麗國武州故桐裏山大安寺敎諡廣慈大師碑銘幷序>로 되어 있는 <광자대사탑비>는 945년 윤다 화상이 입적하고 승탑을 건립한 후 문도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고려 광종光宗(재위 949~975) 원년(949) 10월에 왕명에 의하여 세웠다. 비문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은 지제고知制誥 손소孫紹(?~?)가 지었고, 문민文旻(?~?)이 행서行書로 글씨를 썼다. 여기서 대안사라고 쓴 것을 보면, 태안사를 대안사라고도 하며 같이 불렀던 것 같다. 뜻으로 보면, ‘대안사大安寺’나 ‘태안사太安寺’ 또는 ‘태안사泰安寺’는 모두 같은 말이다. 태안사의 태안泰安이 ‘국태민안國泰民安’에서 따온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깨지고 남은 비신은 2000년에 보수하면서 분리하여 따로 세워 놓았다. 하단부가 결락이 된 비의 탁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에 남아 있다. 비의 내용은 1774년에 오봉은현五峰隱玄(?~?),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 봉암낙현鳳巖樂賢(?~1794) 3화상이 태안사 서부도西浮屠 터에 서 있던 비를 판독하고 등초謄抄한 것으로 『태안사지泰安寺誌』에 실려 있다.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1925년에 쓴 「심춘순례尋春巡禮」에 의하면, 그가 여기에 들렀을 때에도 비는 크게 두 쪽으로 파괴되었고, 여기서 떨어져 나온 많은 돌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고 했다. 

 

사진 9. 광자대사승탑.

 

부도림에는 비를 세웠던 귀부 위에 이수를 얹어 놓은 것이 있다. 귀부의 용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정면을 보고 있고, 등에는 귀갑문龜甲紋이 새겨져 있다. 이수의 정면에는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迦陵頻迦(Kalavinka)를 매우 튀어나오게 조각하였고 사방에 반룡을 새겼다. 위쪽에는 세 부분에 여의보주를 분명하게 조각하여 놓았다. 이 귀부는 <광자대사탑비>의 귀부라고 한다. 그런데 이수는 <광자대사탑비>의 이수로 보이지는 않는다. 비액을 보면, 구슬무늬 원 안에 전서로 쓴 ‘大○寺○’라고 되어 있다. 대안사비를 세울 때 사용한 이수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연구자가 연구해 볼 일이다. 현재의 상태를 보면, 이수의 하단 부분을 깨어내고 비를 끼울 부분을 파내고 그 홈에 비신을 끼웠던 것 같다. 어쨌든 <광자대사탑비>의 이수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진 10. 광자대사탑비의 잔편.

 

부도림 즉 탑림塔林에는 여러 종류의 승탑이 있다. 이른바 석종형石鐘形 승탑도 있고, 최근에 조성한 승탑 중에는 동종 모양으로 만들어 앙화仰花를 얻어 놓은 것도 있고, 팔각원당형의 승탑도 있다. 승탑을 흔히 부도탑浮屠塔이라고도 부른다. 엄격히 말하면, 부도浮屠=浮圖=浮頭=佛圖라는 말은 붓다Buddha라는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어서 불타佛陀라는 용어처럼 소리일 뿐 그 어떤 뜻도 가지고 있지 않다. 부도탑이란 말을 뜻으로 보면 붓다의 탑이 되는데, 그러면 부도탑이 불탑佛塔과 같은 말이 된다. 그런데 불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거나 진신사리가 없는 경우에 붓다의 가르침인 경전이나 불상 등을 봉안한 것이어서 승려의 탑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개념상 혼동을 피하려면 붓다의 탑은 불탑이라고 하고 승려의 탑은 승탑이라고 하는 것이 용어상 정확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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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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