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황제의 하사품 『제불보살명칭가곡』에 대한 임금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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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6 년 1 월 [통권 제153호] / / 작성일26-01-04 17:39 / 조회34회 / 댓글0건본문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가 직접 간여하여 『제불세존여래보살존자명칭가곡諸佛世尊如來菩薩尊者名稱歌曲』(이하, 『제불보살명칭가곡』)을 편찬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1407년(영락 5)부터 10년의 창작 과정을 거쳐 1417년(영락 15)에 전全 47권의 초간본을 만들고, 이후 몇 차례의 증보를 거쳐 1420년(영락 18) 4월에 전 51권으로 완성하였다.
명나라 황제의 하사품 『제불보살명칭가곡』
제1부분인 권1-18에는 불보살의 명칭을 노래한 「불보살명칭가곡」을 수록하였고, 제2부분인 권19-47에는 「법계의 노래」, 「이익 넓힘의 노래」, 「일체를 이익되게 함의 노래」, 「좋은 인연 넓힘의 노래」, 「속세의 노래」 등의 주제들을 수록하였으며, 제3부분인 권48-51에는 영락제가 지은 「어제감응서」 4편 외에 「법계의 노래」와 「이익 넓힘의 노래」 등의 주제를 수록하였다. 영락제는 이 책을 조선에서 온 사신에게 하사하였다.
11월 1일에 황제가 정전正殿에 나아와서 『제불보살명칭가곡』 1백 책과 『신승전神僧傳』 3백 책과 『책력冊曆』 1백 책을 주시므로 신 등이 공경히 받들고 2일에 출발하여 돌아왔습니다. … 『신승전』과 『제불보살명칭가곡』을 각 종파의 사사寺社에 나누어 주어서 각 관청과 여러 경대부의 집에까지 골고루 미치게 하였다. 『신승전』은 한漢나라 이래로 여러 괴이하고 허황된 승려의 요망한 말과 삿된 행적을 모은 것이요, 『제불보살명칭가곡』은 여러 부처·보살의 이름을 집성하고 음율音律을 갖춘 것이다. 황제가 백성들로 하여금 날마다 외우게 하고, 또 여러 나라에 하사하였던 것이다.
- 『태종실록』 17년(1417) 12월 20일.

태종 17년(1417)에 원민생 일행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처녀 한씨 등을 바치자, 영락제가 『제불보살명칭가곡』 1백 책과 『신승전』 3백 책을 하사해 주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듬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하성절사賀聖節使로 간 김점은 3백 책을 더 받아왔다.
하성절사 김점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통사通事 김을현이 아뢰었다. “황제가 『제불보살명칭가곡』 3백 책을 내려 주었습니다. 명나라 예부상서가 김점의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이 『제불보살명칭가곡』은 다른 나라에는 반포하지 않았지만 오직 그대 조선이 예의의 나라이고 또 전하를 경애하므로 특별히 하사하는 것이다.’ …” 하였다.
- 『태종실록』 18년(1418) 5월 19일.
태종과 세종은 황제가 하사한 책이긴 하지만 부처를 찬탄하는 내용이므로 널리 권장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체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세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참찬 김점이 『제불보살명칭가곡』에 대해 언급하였다.

참찬 김점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황제가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주었사오니, 청컨대 우리 음악과 섞어 연주하여 중국 사신에게 들려주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저 높이는 것은 괜찮겠지만, 굳이 섞어 연주할 필요까지야 있겠느냐. … ” 하고 윤허하지 않았으나, 뒤에 사신이 왔을 때에는 섞어 연주하도록 명하였다. - 『세종실록』 즉위년(1418) 8월 20일.
세종은 즉위 초까지만 해도 불교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상왕인 태종의 억불 정책을 이어 종파를 축소하고 사찰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줄였다. 그런데 이듬해 명나라 환관 육선재가 사신으로 오면서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추가로 가져왔다.
흠차 환관 육선재가 칙서와 함께 황제가 하사한 『제불보살명칭가곡』 1천 책을 받들고 왔다. (조정에서는) 비단 장막 늘어뜨린 무대에 잡귀 물리치는 나례儺禮를 설치하고,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려 상왕을 모시고 모화루로 가서 (칙서와 하사품을) 맞이하고 경복궁에 이르러 의식을 행하였다. - 『세종실록』 즉위년(1418) 9월 4일.

영락제는 세종이 즉위하자 『제불보살명칭가곡』 1천 책을 추가로 조선에 하사하였다. 세종은 황제의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불보살을 노래한 『제불보살명칭가곡』에 맞추어 음악을 연주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중국 사신이 지나는 지역의 승려들에게 외워서 익히도록 하였을 뿐 궁궐에서는 연주하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상왕의 선지를 받들어,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연주하지 못하도록 하고, 예조로 하여금 유후사留後司와 경기도·황해도·평안도에 공문을 보내, 중국 사신이 지나는 주·군의 승려들로 하여금 이를 외우고 익히게 하라고 하였다.
- 『세종실록』 즉위년(1418) 12월 26일.
『제불보살명칭가곡』을 둘러싼 이견
조정 대신들 가운데에는 황제가 하사한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음악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입장과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의 궁궐에서 불보살을 찬탄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임금과 대신이 회식하는 자리에서 술을 한 잔 들이킨 대신이 먼저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참찬 김점은, “황제는 불교를 존중하고 신앙하여, 중국의 신하들은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외우고 읽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중에는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선비가 어찌 없겠습니까만, 황제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입니다.”라고 하였고, 예조 판서 허조는, “불교를 존중하고 신앙하는 것은 제왕의 성덕이 아니므로, 신은 취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점은 발언할 적마다 말이 지루하고 번거로우며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으나, 허조는 서서히 반박하면서도 낯빛이 화평하고 말이 간략하였다. 임금은 허조를 옳게 여기고 김점을 그르게 여겼다.
- 『세종실록』 1년(1419) 1월 11일.

참찬 김점은 황제의 하사품이므로 그 뜻을 받들어 음악으로 연주해야 한다고 하였고, 예조 판서 허조는 아무리 황제의 하사품이라고 하더라도 제왕의 성덕이 아니므로 연주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하들의 논쟁은 임금이 궁궐에서 연주하는 것에 부정적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동년 12월에 상왕(태종)과 임금(세종)이 낙천정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는데, 찬성 정역이 아뢰기를, “황제가 지극히 독실하게 불교를 숭신하니, 일찍이 하사한 『제불보살명칭가곡』 등 불서佛書를 중국의 예에 의하여 임시로 누각을 세워 간직하고, 또 외우고 읽게 하여 존경하는 뜻을 표시하소서.” 하고 두 번 세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상왕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옳으나 거짓으로 높이는 것은 의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세종실록』 1년(1419) 12월 8일). 그런데 이틀 후 억불 정책에 항의하며 중국으로 도망간 승려 30명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그 승려들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에게 조선의 불교 정책에 대해 고발할까 염려하며, 상왕(태종)과 세종이 이 문제를 의논하면서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언급하였다.
상왕이 세종에게 말하기를, “… 옛날 사람들도 변고를 제압하기 위해 임시로 방편을 써서 변통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은 마땅히 승려들에게 위안이 되고 흔쾌히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속히 서북면과 황해도 등 사신이 왕래하는 곳에 승려들과 늙은이들을 모아서 황제가 하사한 『제불보살명칭가곡』과 『위선음즐』 등을 항상 읽고 외우게 하며, 또 부처를 칭송하고 황제가 믿음으로 과보를 얻고 상서로운 보답이 자주 나타났던 현상을 노래와 시로 지어서, 뛰어난 기녀로 하여금 익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명나라 사신이 와서 지나는 길가에 경을 외우는 자가 있고, 연회에서 가무할 때에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자가 있으면, 황제가 듣고서 반드시 우리나라가 황제의 마음을 본받는다 하여 기뻐할 것이다. …” 하였다. - 『세종실록』 1년(1419) 12월 10일.
대신들이 여러 차례 황제의 하사품인 『제불보살명칭가곡』을 가볍게 다루지 말 것을 건의하였으나 묵살했던 태종과 세종은 중국 사신이 지나는 길에 있는 승려들에게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외우고 중국 사신이 참석하는 연회에서 연주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었다.
임금이 경연에 나아가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반포한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외우는 일은 일찍이 서울과 지방의 절에 공문을 띄웠는데, 지금 그대로 실행하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서울 내 각 종파는 승록사가 조사하고, 지방 각 절은 유후사와 여러 도의 감사가 조사하여, 4계절의 마지막 달(3·6·9·12월)마다 송습誦習한 일과를 장부에 적게 하고, 세초歲抄 때 예조에 보고하도록 하여 수사할 수 있는 증거로 삼도록 하소서. 그 『권선서勸善書』·『위선음즐』·『신승전』은 모두 잘 간직하게 하여, 만약 더럽히거나 훼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엄하게 다스리고, 또 승과에 응시하려는 승려는 유생의 『문공가례』를 강하는 사례에 의거하여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외울 수 있는 자만 응시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년(1419) 12월 12일.
4차에 걸쳐 유입된 『제불보살명칭가곡』
국가가 관리하는 모든 사찰의 승려들에게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외우도록 하고, 승과僧科에 응시하려는 승려들에게 먼저 『제불보살명칭가곡』의 암송 여부를 확인한 후에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그만큼 조선에서는 불교 정책에 있어서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사신으로 갔던 경녕군 이비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 속에 『제불보살명칭가곡』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녕군 이비가 황제가 하사한 양 4백 60마리, 『위선음즐』 22궤櫃, 『제불보살명칭가곡』 30궤, 꿀에 담근 용안龍眼 2항아리, 꿀에 담근 여자荔子 2항아리, 담근 호초胡椒 2항아리 등의 물품을 올렸다.
- 『세종실록』 1년(1419) 12월 18일.

이처럼 『실록』을 통해 확인되는 중국 황제의 하사품 『제불보살명칭가곡』은 1417년 12월 20일에 100책, 1418년 5월 19일에 300책, 1418년 9월 4일에 1,000책, 1419년 12월 18일에 30궤 등 4차에 걸쳐 조선에 유입되었다. 영락제가 1424년(세종 6)에 사망하였으므로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소중히 다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락제가 사망하고 여러 해가 지나면서 『제불보살명칭가곡』에 대한 중요도가 떨어졌다.
황제가 내려 준 『위선음즐』 4백 41책을 각 관청과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고, 『제불보살명칭가곡』 1백 35책을 선교양종禪敎兩宗에 나누어 주어 간직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16년(1434) 5월 25일.
영락제가 사망한 지 10년이 되던 해에 국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여러 사찰에 나누어 주었다. 이로써 이 책은 국왕과 대신들의 기억으로부터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제불보살명칭가곡』이 ‘용비어천가’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제불보살명칭가곡』의 수용 이후 조선 향악鄕樂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달라졌고, ‘용비어천가’는 향악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영락제의 대일통大一統 정책에 호응하여 사신이 지나는 길에 승려들로 하여금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외우게 한다거나, 사신이 이르렀을 때 향악과 함께 연주하기는 하였으나, 자의적으로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수용했다고 볼 만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만일 『제불보살명칭가곡』을 수용하고자 하였다면 그 음악을 학습하도록 하였겠지만 그러한 사실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므로 『제불보살명칭가곡』이 향악이나 ‘용비어천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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