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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를 만들어 낸 불교의 바닷길 ]
서역육로에서 남방 바닷길로 확충된 불교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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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  2026 년 1 월 [통권 제153호]  /     /  작성일26-01-04 17:50  /   조회4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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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는 후한 명제(재위 57~75) 때부터 법이 비로소 동쪽으로 유전되었는데, 이때로부터 그 가르침이 점차 넓어져서 일가의 학이 되었다고 하였다(『南史』 「夷貊傳」). 광무제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난 명제는 한무제의 서역 지방 진출을 이어받아 서역으로 향하였다. 이 대외정책에 의하여 반초가 활약하게 된다. 명제 시대의 불교 전래설은 백마사白馬寺의 창건과 42장경의 전래에 관한 전승이 대표적이다. 

 

서역 육로를 통한 불교 전파 

 

『송사』 외국전에도 불교는 한대漢代에 전래한다. 서역 비단길로 전파된 것이다. 『후한서』에 이복형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황로黃老와 함께 부처를 숭상했다”고 전한다. 한대에 이미 안세고安世高, 지식支識, 축불삭竺佛朔, 지겸支謙 등이 들어와서 역경에 종사하였다. 안세고는 안식국 태자로 알려지며, 지식과 지겸은 월지국, 축불삭은 인도인이다. 백마사에서 불경을 한역했던 천축승 천축담마가라天竺曇摩迦羅(Dharmasatya), 안식국 승려 담제曇帝, 천축승 승가발마僧伽跋摩(Samghavarman)도 뛰어난 역경가였다.

 

사진 1. 최초로 중국에 불법을 전하고 백마사를 창건한 섭마당.

 

그런데 후한 명제 때의 국가적 공전公傳·공인公認과 다르게 그 이전 기원전에 이미 불교가 당도했다는 학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원전 2년 전한 시기에 ‘부도경[붓다의 경전]’을 구두로 전해 주었다는 『위서』 「석로지釋老志」의 내용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열자列子』 공자의 말에 “서방 사람 중에 성인이 있다”는 부분을 붓다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여 이미 불교가 선진先秦 시대에 전래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진시황이 불전을 가지고 들어온 것을 금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마도 기원전부터 불교가 중국에 당도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후한 명제 때 공식적으로 접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기원전에 이미 민간에 확산된 불교가 기원후에 공식 수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단계를 반영한다. 이들 불교는 대부분 서역을 통한 육로 전파였다.

 

민월을 통한 불교의 바닷길 개척

 

서역으로 육상실크로드가 개척되고 있었다면 남방의 바닷길로 해양실크로드가 개척되고 있었다. 중국 남부는 중원의 세계와 전혀 사정이 달랐다. 오늘날은 중국 북부와 남부가 하나의 중국이지만 남부는 본디 중국 바깥의 다른 세상이었다. 민월閩越의 세계는 그 자체가 해양의 세계였다.

 

남해에서는 전혀 새로운 남해로南海路의 역사가 쓰여지고 있었다. 중원에서 남쪽 민월閩越로 눈길을 돌리면서 본격적으로 바다로 가는 길이 열렸다. 실크로드가 본격 가동된 것은 한나라에 이르러서다. 최초 실크로드는 중국 서북에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지중해 동부로 통하는 육로였다. 한과 로마제국이 있었던 기원전 2세기경부터 발달했다. 한은 일찍이 기원전 139년에 장건張騫을 보내어 당시 서역 여러 나라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본격 개설했다. 

 

남해 바닷길인 남해로를 처음으로 밝힌 기록은 『한서지리지』다. 처음에는 서역 육로, 즉 북방길로 불교가 들어왔지만 곧이어 남해로를 통해서 불교가 전파가 시작되었다. 바닷길 불교는 인도에서 직접 건너오거나 푸난과 교지, 말레이반도 부장계곡 같은 중개 거점을 거쳐서 들어왔다.

 

사진 2. 광주통해이도에 기반한 당대 해양실크로드.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한무제가 합포에서 인도와 스리랑카로 가는 길을 개설했을 때, 오늘의 역사가는 이 루트를 일반적으로 ‘해상실크로드[海上絲綢之路]’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양서』 「제이전」은 광주에서 인도에 이르는 바닷길을 기술하면서, “후한의 환제桓帝 시대에 대진과 천축이 모두 이 길을 통해서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라고 했다. 한무제(기원전 141~89) 이전에도 당연히 천축 가는 뱃길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전일적인 루트가 마련된 것은 한대에 이르러서 가능했을 것이다. 『한서지리지』의 기록이 중요하다. 이를 토대로 더 세련되게 발전시킨 것이 당의 해양실크로드였다. 

 

베트남 북부 교지[통킹만] 합포에서 남인도 칸치푸람까지 가는 노선이 이미 한대에 개척되어 있었다. 상선이 남중국-남인도 노선을 오고 갔기에 『한서지리지』가 완성될 수 있었다. 당시 민월국은 동남 일대의 최강 국가로, 성촌城村의 왕성 역시 동남 일대 최대 규모였다. 민월국은 복건의 토착 백월白越의 풍속과 습관, 종교 관념, 문화, 예술 등을 발전시켰다. 정치와 경제면에서는 한의 영향 속에서도 독자적 민월 문화를 가꿨다. 1958년의 민월고성 발굴이 이를 증명한다. 그 민월이 후에 한에게 통합된 것이다. 중국의 해양실크로드사에서 정점을 찍은 천주泉州, 복주, 광주 등의 빼어난 도시들은 모두 민월 바다에서 숙성되었다. 이러한 장기지속의 역사는 당·송·원·명·청과 근대까지 이어졌다.

 

남해로를 중시한 손권의 시대 

 

천축 바닷길은 삼국과 육조시대에 좀 더 부각되었다. 삼국시기는 위魏·촉蜀·오吳가 대립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바닷길 개척의 으뜸은 오나라였다. 오는 장강 이남부터 오늘날의 통킹만, 해남도까지 아우르고 도읍을 건업에 두어 남중국해로 손쉽게 들어설 수 있는 위치였다.

 

사진 3. 청동 도끼에 새겨진 선박 문양(상)과 청동 악기에 새겨진 돛단배 문양(하).

 

손권孫權은 남해를 중시했다. 230년 1만 병력의 대선단을 이주夷州(오늘날의 대만)에 파견했으며, 남방 길목인 교지와 구진九眞을 평정했다. 오는 선박 5,000여 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조선술이나 항해술에서 당대 최고였다. 그 시대에 교주를 통하여 로마 사절도 들어왔다. 남해 인식이 넓어졌고, 당연히 천축 가는 바닷길도 열리게 된다. 

 

229년 교주자사 여대呂岱는 강태康泰와 주응朱應을 파견하여 짬파와 푸난을 순방하도록 했다. 귀국 후에 주응은 『부남이물지扶南異物志』, 강태는 남해 여러 나라의 견문록인 『오시외국전吳時外國傳』과 『부남토속전扶南土俗傳』을 각기 저술했다. 이들 기록은 인멸되었으나 후대 기록에 일부 흔적이 남아서 전해온다. 『오시외국전』에서는 부남, 교주, 천축, 안식과 서로 교역한다고 하였다. 오늘의 통킹만과 메콩강, 인도와 서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사진 4. 남방으로 눈길을 돌린 오나라의 손권.

 

강태의 『부남토속전』은 인도를 왕래하던 중국 상인 가상리家翔梨가 인도에서 귀환 길에 푸난의 왕 범전范旃을 만나 자신이 보고들은 풍습과 불교의 융성을 설명하고 있다. 인도 중국 간의 무역선이 존재했으며, 그 중간에 놓인 메콩강 삼각주에서는 이미 불교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푸난 사람은 모두 박舶을 타고 다닌다고 했다. 수준 높은 해양력으로 인도에서 직접 불교를 들여왔을 가능성이 높다.

 

불교의 바닷길 역사에서 강승회의 존재감

 

손권의 시대에 이미 불교의 초기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고승전』에 따르면, 당시 오는 “위대한 불법이 전파되기 시작하고 있을 뿐, 그 가르침의 영향은 아직도 먼 상태”였다.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 따르면, 강승회康僧會가 손권의 요청으로 강동으로 가서 손권을 만난다. 강승회 선조는 강거인康居人, 즉 중앙아시아 유목민으로 대대로 천축에서 살았다. 부친은 상인이었기 때문에 교지로 옮겨갔다. 그 당시에 손권은 장강 동쪽을 지배하고 있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천축에서 살다가 중국으로 들어온 강승회는 남해 바닷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강승희를 만난 왕이 불법을 믿으면 어떤 영험한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사진 5. 남해로를 통하여 불교를 처음 전파한 오나라 강승회.

 

강승회는 붓다가 열반에 드신 지 천년이 지났지만 사리의 영험은 멀리까지 미친다고 하였다. 손권이 그 말을 거짓이라 여겨 만일 사리를 얻을 수 있다면 탑을 세우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형별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강승회가 삼칠일을 기도하면서 간청하자 감응하여 사리가 나타났다. 손권이 힘센 장사에게 명하여 철퇴로 이를 내려치도록 하였으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에 크게 감복하고 마침내 건초사建初寺를 창건하였다. 이러한 이적異蹟과 신이神異는 대체로 불교 전래 초기에 등장하는 어디서나 있는 통과의례이다. 조금 뒤에는 월지 계통의 지강량접支疆梁接이 오나라 오봉五鳳(255)부터 다음 해까지 교주에서 『십이유경十二遊經』, 『법화삼매경』을 번역하였다. 손권의 시대에 불교가 어떤 식으로든지 우여곡절 끝에 강동에 정착하였음을 증명한다.

 

여전히 소통하던 서역길

 

1981년 장강 하구인 강소성 연운항 공만산에서 벼랑을 깎아서 만든 일단의 부처상 150여 구가 발견되었다. 조각상 형태와 양식은 키질(Kizil), 돈황, 용문만이 아니라 인도 및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상과 유사하다. 이 조각상들이 2세기 후반인 동한말東漢末에 만들어졌음을 확정할 수 있다. 후한(25~220)은 수도를 전한의 장안보다 동쪽 낙양에 두었기에 동한이라 부른다. 

 

사진 6. 동고銅鼓에 각인된 서한시대의 선박 문양과 키[舵]. 선박의 꼬리 키[尾舵]는 중국 조선造船 기술의 3대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힌다.

 

불교의 바닷길이 개척되었다고 하여 서역 육로가 끊긴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여전히 서역을 통하여 불교가 들어오고 있었다. 서진(265~420)과 동진(317~420) 시대에는 구마라집鳩摩羅什(Kumarajiva)이 당도하여 역경의 일대 전환을 이룬다. 서진시대에 180여 곳에 불과하던 사원이 동진시대에는 1,768곳으로 늘어나며 승려도 2만 명을 넘어서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승관僧官도 설치된다. 불약다라弗若多羅(Punyatara), 비마라차卑摩羅叉(Vimalaksas), 불타야사佛陀耶舍(Buddhayassa),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Buddhabhadra) 등이 당시에 활동한 중요한 역경가였다. 『남사』에 따르면, 동진 의희義熙(405~418) 연간에 사자국에서 사자를 보내왔다.

동진 의정이 남해로를 통하여 천축으로 향한 것은 이같은 배경에서 가능하였다. 의정의 등장과 그의 기록으로 말미암아 불교 전파의 바닷길은 역사적으로 선명한 실체로 다가오게 된다. 다음 편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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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분과학문의 지적·제도적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융·연구를 해왔다.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민족학 등에 기반해 바다문명사를 탐구하고 있다. 제주대 석좌교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역사민속학회장,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POCC) 등을 거쳤다. 『마을로 간 미륵』, 『바다를 건넌 붓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등 50여 권의 책을 펴냈으며, 2024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했다.
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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