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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명문 ]
호계삼소, 경계를 넘어선 아름다운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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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당  /  2026 년 1 월 [통권 제153호]  /     /  작성일26-01-04 21:15  /   조회8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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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호계 한 줄기 깊게 난 길 廬岳虎溪一徑深

도사와 스님 그리고 유학자가 함께 있네 黃巾白衲與靑衿

세 사람 같이 걸으며 모든 것을 잊었으니 三人同步渾忘却

셋이서 웃는 소리 옛적부터 지금까지 하늘 높이 울리네 三笑聲高古到今

 

이 시는 조선 초기의 승려 함허당涵虛堂 득통기화得通己和(1376~1433)의 <여산삼소도廬山三笑圖>이다. 여산삼소도는 중국의 여산 호계에서 있었다고 하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를 그린 것으로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호계삼소와 호계삼소도

 

그 고사의 내용은 이렇다. 중국 동진시대의 승려 혜원慧遠(334~416)은 여산 동림사東林寺에 머물며 수행하였는데, 호계라고 하는 절 앞의 냇물을 건너 세상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이 절에는 도교 수행자인 육수정陸修靜(406~477)과 유학자이자 시인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이 자주 찾아와서 마음으로 깊이 교유하였다. 하루는 이들을 배웅하면서 고담준론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호계를 건너고 말았는데, 이를 알아챈 세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이것이 바로 호계에서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는 뜻인 ‘호계삼소’의 고사이고, 이를 그린 것이 ‘호계삼소도’이다.

 

사진 1. 호계삼소의 일화를 기념하는 여산 동림사의 호계정. 정자 안에는 호계삼소 일화를 새긴 비석이 있다.

 

조선 초 세종대왕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8~1453)은 북송北宋 시대의 화가인 용면거사龍眠居士 이공린李公麟(1049~1106)의 그림에 원元 시대의 서예가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1254~1322)가 화제畫題를 붙인 호계삼소도를 본 뒤, 이를 모사하여 소장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시나 글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이를 모사하여 소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기화가 본 그림이 안평대군의 것인지, 이를 모사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초기의 유불교류

 

고려 말에 성리학性理學이 전래되면서 이단異端인 불교에 적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 강경한 불교비판론 또는 불교말살론이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금강산金剛山이라는 이름이 불교 경전인 『화엄경華嚴經』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그 이름조차 배척할 정도로 강경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적인 교유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어서, 강력한 불교 억지 정책이 시행된 15세기에도 승려들과 유학자들의 교유는 계속되었으며, 그 매개체는 시나 글이었다.

 

사진 2. 최북(1712~1786)의 호계삼소도.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기화가 남긴 시나 글에서도 유학자들과의 교유를 찾아볼 수 있으며, 당시 유학자들의 문집 속에서도 승려들과 나눈 많은 시와 글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호계삼소는 유불교유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절에 들러 스님 만나 찻상을 함께 하니 過寺逢僧共一床

한가로운 이 바쁜 이 서로 만나 둘 다 잊네 閑忙相會兩相忘

구름 높이 뜬 달 침상에 비치니 세상은 고요하고 凌雲月榻塵還靜

물기 스민 아담한 집은 더위조차 서늘하네 浸水風軒暑亦凉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는 손님의 꿈을 깨우고 報曉鍾聲醒客夢

숲을 뚫는 새소리는 길손의 옷자락을 흔드네 穿林鳥語動征裳

이에 다시 여산의 길을 생각해보니 從玆更憶廬山路

세 사람의 웃음소리 그대로 귓가에 들리네 三笑依然在耳傍

 

절에 온 선비를 대신하여 쓴 이 시에서도 기화는 호계삼소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로 보면 그 선비는 유학자였을 것이다.

유학자가 쓴 시나 글에서도 호계삼소를 인용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최숙정崔淑精(1433~1480)의 시가 대표적이다.

 

상인은 불교에 깊이 통달한 사람으로 上人深佛者

깨끗한 행위로 이미 무위에 이르렀네 業白已無爲

책 상자에는 맑은 글이 가득하고 篋貯靑牋軸

평상에는 고운 바둑알이 남아 있네 床留玉字棋

바람 맞으며 몇 구절이나 읊고 臨風吟幾句

우박 날릴 때 얼마나 놀았던가 飛雹戲多時

뒷날 삼소도를 그려도 三笑他年畫

혜원법사에게 어찌 부끄러우리 何慙遠法師

 

사진 3. 작자 미상, 중국 송宋 호계삼소도.

 

‘원상인에게 줌[贈元上人]’이라는 이 시에서 최숙정은 원상인의 인품을 찬상하면서 자신과 원상인의 교유가 호계삼소의 주인공들처럼 차이를 넘어선 아름다운 교유를 재현한 것이라고 자부하였다. 

 

같은 그림, 다른 시각

 

하지만 호계삼소도를 본 유학자들이 모두 같은 인식을 보여주지는 않았는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한 성삼문成三問(1418~1456)과 박팽년朴彭年(1417~1456)이 남긴 시와 글은 그 상반된 시각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안평대군이 소장한 호계삼소도를 본 뒤 안평대군의 요청에 따라 이 그림에 대한 시와 글을 남겼다.

 

정신으로 사귀니 어찌 다시 몸뚱이가 있겠는가 神交那復有形骸

함께 다리를 건너니 한바탕 웃음이 피어나네 偶過溪橋一笑開

천년 오랜 풍류가 어제 일 같으니 千古風流如昨日

그윽히 마주 보며 멀리 그때를 되돌아보네 宛然相對首長回

 

이 시에서 성삼문은 서로 다른 몸과 가르침을 떠나 정신으로 깊이 교유한 세 사람의 경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반면 박팽년이 남긴 글은 전혀 다른 인식을 보여준다.

 

불교 승려는 한 조각 구름, 들판의 학처럼 동서남북 어디나 뜻하는 대로 다니는데, 혜원스님이 호계를 넘지 않으려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지극한 도는 본래 언어가 미칠 수 없는데, 더불어 이야기한 것은 어떤 도인가? 아니면 그저 그런 이야기를 현묘하고 더욱 현묘하게 이야기하다가 맑고 텅 비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지경에 빠진 것인가? 그렇지만 그 마음과 정신이 융합하여 손을 맞잡고 이야기한 나머지 넘지 말아야 할 곳을 넘어선 것조차 몰랐으니, 그 마음에 스스로 얻은 것이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주1) <중략> 

 

그렇지만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유학자고, 한 명은 도사고, 한 명은 승려니, 뜻은 같다 해도 도는 본디 같지 않다. 그런데도 서로 기대어 선 것이 마치 가시나무가 지초나 난초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 차이를 살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주2)

 

여기에서 박팽년은 불교와 유교, 도교가 다른 길임을 강조하면서, 이들의 교유란 가시나무가 향기로운 지초나 난초와 함께 있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다른 글에서 “스님이 구하는 것은 내가 버린 것이고, 내가 구하는 곳으로는 스님이 갈 줄을 모르는 것이, 마치 남쪽으로 수레를 몰고 북쪽으로 깃발을 휘날리며 서로 등지고 달려가는 것과 같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여 불교와 유교가 가는 길이 정반대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나, 조정에서도 강력한 불교말살책을 주창한 것으로 볼 때, 그에게 불교는 유교와 공존할 수 없는 배척의 대상일 뿐 아름다운 교유의 상대는 아니었다.

호계삼소에 대한 유학자들 사이의 인식의 차이는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다음 글에서도 볼 수 있다.

 

상원군祥原郡의 침소 병풍에 삼소도에 붙인 다음과 같은 시가 있었다.

 

혜원공은 잔꾀 많고 교활하니 遠公細而黠

다짐 어긴 줄 모르지 않고서 破戒非不知

짐짓 호계의 흥취를 가장하여 暫寄虎溪興

크게 어리석은 서생을 속였네 欺謾措大癡

 

이에 그 시의 운을 따서 짓는다.

 

짧게 살아서는 오래 사는 것에 어둡고 少年昧大年

작은 지식으로는 큰 지식에 어두운데 少知昧大知

시 지은 이 또한 서생이니 題詩亦措大

도연명과 육수정의 어리석음을 어찌 알겠는가 安知陶陸癡

 

남효온이 본 시는 이종준李宗準(?~1499)의 ‘삼소도에 부침[題三笑圖]’이다. 이종준이 상원군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만들어 남긴 병풍을, 뒤에 지방관이 된 남효온이 보고서 이런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사진 4. 중국 보하普荷(1593~1673)의 호계삼소도.

 

이종준은 이 시에서, 교활한 혜원이 스스로 세운 다짐을 어겼다는 것을 알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크게 웃었는데, 도연명과 육수정이 덩달아 함께 웃음으로써 혜원의 잔꾀에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드러냈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이에 대해 남효온은 한낱 서생인 이종준의 그릇이 저들의 경지를 담기에는 너무 작고,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한 것이라고 비꼰 것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존의 꿈

 

같은 고사를 접하고 같은 그림을 본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시각과 입장이 이처럼 다르다는 것은, 불교와 유교라는 서로 다른 가르침의 경계를 넘어서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깊이 교유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비록 역사적 사실은 아니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의 마음이나, 그 고사를 굳이 그림으로 표현한 이공린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천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다종교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살아있는 듯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를 넘어 아름답게 공존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호계삼소도에 실린 바람이고, 오늘의 우리가 실현하고픈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간절한 꿈일 것이다. 

 

<각주>

(주1) “浮屠如孤雲野鶴 東西南北 惟意所在 遠師所以不過虎溪者 何意耶 至道本非言語所及 其所與語者 何道耶 無亦一般說話 玄之又玄 淪於淸虛無用之地也耶 然其心融神會 握手譚論之餘 自不知過於所不過之地 所以自得於其心者 吾不知何如耶.” 〈삼소도에 붙임[三笑圖序]〉

(주2) “然之三人者 一儒冠 一道服 一緇流 志雖同 道固不同 相倚而立 若荊棘之間於芝蘭然 觀此圖者 不可無藻鑑於其間也.” 〈삼소도에 붙임[三笑圖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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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당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태동고전연구소 지곡서당 3년 한문연수과정 수료하고 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등에서 연구원 역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동국대학교 학술원 한문아카데미에서 불교한문 강의. 현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구화불교한문연구소 소장.

padmahd@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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