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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저편 티베트 불교]
티베트 불교의 학문적 고향 비크라마실라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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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  2025 년 6 월 [통권 제146호]  /     /  작성일25-06-04 13:13  /   조회40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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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의 황금기에 빛났던 ‘마하비하라(Maha-Viharas)’, 즉 종합수도원 중에서 불교사적으로 특히 3개 사원을 중요한 곳으로 꼽는다. 물론 나란다(Nalanda)를 비롯하여 비크라마실라 그리고 오단따뿌리이다.

 

3대 마하비하라와 비크라마실라

 

현재 인도불교의 현실을 상징하듯 앞의 두 곳도 폐허로 변한 지 오래다. 그러나 비록 전성기 때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그간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1972∼1982)를 토대로 유적지遺蹟趾를 정리하고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놓은 상태이다. 나아가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도 방문객들에게 공개하고 있어서 전성기의 모습을 이미지화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진 1. 광대한 비크라마실라 유적지. 뒷부분에 대탑 유적지가 보인다.

 

다만 세 번째 사원인 오단따뿌리(Odantapuri)는 상황이 다르다. 나란다에서 지근거리(8km)에 있었고 기록상으로도 전성기 때의 이 사원은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고(주1) 한다. 그러나 현재는 완전한 폐허로 변해 그 유적지를 찾는 일조차 별 의미가 없다. 다만 이 사원을 모델로 하여 구루 린뽀체 빠드마삼바바에 의해 복원되었다는 티베트의 삼예(Samyes) 사원이 현존하고 있어서 그런대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오늘 순례의 목적지인 2번째 비크라마실라는 한역 경전에는 ‘초계사超戒寺’로 번역되고 있다. 인도불교의 대표적 랜드마크인 나란다(Nalanda)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에 끼친 영향력 면에서는 어느 곳보다 비중이 무거운 곳이기에 필자는 길을 나섰다.

 

사진 2. 출입구에서 바라본 유적지 원경.

 

우선 글을 이어가기 전에 자주 사용되는 ‘비하라(Vihara, 僧院)’에 대한 어원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사족을 붙인다. 불교미술사에서는 ‘사원’을 ‘비하라’와 ‘차이티아(Chaitya, 塔院)’로 구분하여 쓴다. 여기에 ‘마하(Mahā)’란 접두사가 붙으면 ‘위대한 사원 또는 대수도원’이라는 뜻이 강조된다. 그러니까 나란다와 비크라마실라 같은 거대한 사격寺格을 갖춘 사원을 ‘마하비하라’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수도 델리(Delhi, DEL)에서 기차를 타고 유적지에서 13km 떨어진 카할가온(Kahalgaon) 역에서 내려(주2) 택시나 로컬버스로 갈아타도 된다. 하지만 일정이 바쁘다면 델리공항에서 데오가르(Deoghar, DGH) 혹은 비하르 주도州都 빠트나(Patna, PAT)로 가서 다시 인근 도시 바갈뿌르(Bhagalpur)를 경유하여 38km 떨어진 유적지로 가면 된다.

 

사진 3. 순례길 오른쪽에 박물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비크라마실라 유적지는 진흙 회반죽으로 찍어 만든 붉은색 흙벽돌로 만든 건축물과 그 잔해들만 남아 있기에 전체적으로는 나란다와 거의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마치 요새와 같은 돌출부가 있는 정사각형의 성곽에 둘러싸여 있는 유적지는 한눈에도 당시 딴트라 불교의 근본 도량답게 만다라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앙에는 깔라짜크라 만다라(Kalacakra-M)를 상징하는 거대한 스뚜빠[大塔]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체 유적지의 랜드마크 노릇을 하고 있다. 

 

방문객들은 대문으로부터 연결되어 있는 순례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중앙 테라스로 모여들어 다시 위쪽 테라스로 올라가서 대탑을 돌게 안배되어 있다. 스뚜빠는 4각형 기단으로 시작하여 상부로 올라가면서 원형으로 변하는 설계도에 따라 건축되었다. 비록 상단부가 대부분 파괴되었을지라도 현재 남아 있는 높이가 15m라고 하니 전성기 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현재 순례길 곳곳에 놓여 있는 테라코타 불보살들은(주3) 대부분 상반신이 깨진 상태이지만, 설명문에 의하면 빠라(Palas, 8c~12c) 시대의 것들이 주류를 이르고 있다고 한다.

 

사진 4. 안내문에 따르면 “비크라마실라 유지는 한 면의 길이가 330m나 되는 성벽에 둘러싸인 정방형 모양으로 (중략)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다.”라고 한다.

 

비크라마실라의 설립

 

비크라마실라는 빠라제국의 다르마빨라(Dharmapala, 783∼820) 왕의 원력에 의해 건립된 작품이다. 당시는 인도 후기불교의 마지막 불꽃인 ‘바즈라야나(Vajrayana, 金剛乘)’, 즉 딴트라 불교가 성행하던 시기로 나란다와 함께 4백 년간 인도불교의 마지막 등불 노릇을 하였고, 나아가 동남아제국과 티베트로 딴트라를 전파하는 교두보 노릇을 하였다.

 

전대의 굽타왕조(Gupta)가 나란다에 올인하였다면 빠라왕조는 나란다에 이어 비크라마실라 그리고 오단따뿌리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당대 기라성 같은 대학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전성기 때는 108명의 교수(Āchārya)를 포함하여 1,000여 명 승려들이 거주할 정도로 그야말로 마하비하라였다.

 

사진 5. 비록 측면 근거리에서 본 기단부 테라스가 무너졌으나 그래도 웅장한 스뚜빠 모습.

 

당시 비크라마실라는 당대 유명한 딴트라 술사(Tantric preceptors)를 초빙하여 ‘6개의 문’을 지키게 하는 특이한 제도를 유지하였다. 여기서 특히 북쪽 문을 지켰던 나로빠(Naropa)가 눈에 띄는데, 그는 바로 티베트 불교 까규빠 종파의 시조 마르빠와 밀라레빠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의 중흥조 아띠샤와 구게왕국 전법

 

오늘 필자가 이곳을 방문한 근본 목적은 아띠샤 디빤까라(Atisha Dipankara, 阿底峡, 982∼1054) 존자의 체취를 맡고자 함이었다. 그는 오늘의 티베트 불교를 존재하게 만든 결정적인 인물로 이 사원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학자로 꼽히고 있다.

 

사진 6. 비크라마실라를 기록한 티베트 불교학자 따라나타의 역저인 『인도불교사』(좌). 사진 7. 아띠샤 존자의 생애를 기록한 티베트 불교학자 부뙨(Butön)의 『靑史(Blue Annals)』(우).

 

아띠샤는 벵골의 귀족 출신으로 젊었을 때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딴트라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나란다, 비크라마실라, 오단따뿌리 등에서 수학했다. 티베트로 가기 전에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주4) 제국에서 12년을 보내고 1025년에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세 차례에 걸친 공개토론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후에 다르마팔라 황제가 직접 세운 비크라마실라 원장에 추대되었다.

 

한편, 불교가 사라진 지 2백여 년이 되어가는 티베트에서는 새로운 법의 다르마(Darma, 法輪)가 돌아갈 시절인연이 무르익었는지 서부 오지 구게(Guge) 국왕 예셰외(Yeshe-Ö)는 불경을 번역할 원력을 세우고 사신들을 비크라마실라로 보냈다. 이에 당시 수도원장인 라트나카라(Ratnakhra)는 3년 후에 돌아온다는 조건으로 그가 티베트로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주5)

 

사진 8. 비크라마실라의 학장이며 티베트 불교의 중흥조인 아띠샤(Atisha) 존자의 탕카.

 

그리하여 아띠샤 존자는 1040년 설산을 넘어 마침내 구게왕국에 도착하여 3년을 머물면서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을 저술하여 후에 쫑카빠의 『람림Lamrim(도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저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그리고 중앙 티베트로 진출하여 주요 제자 드롬뙨빠(Dromtὅnpa)로 하여금 까담빠(Kadampa)를 창시하여 현재의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인 겔룩빠로 이어지게 안배하였다.

 

이 비크라마실라와 티베트와의 연결고리는 비단 아띠샤 존자에 머물지 않고, 역시 이 사원 출신인 까말라실라(Kamalasila)와도 연결된다. 바로 그 유명한 ‘삼예논쟁’의 인도불교의 대표선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그가 ‘삼예논쟁’에서 패했다면 현재의 티베트 불교는 어찌 변했을까?

 

사진 9. 아띠샤 존자의 소상.

 

3대 마하비하라의 최후의 날

 

투르크족 족장 무함마드 칼지(Muhammad Khalji)는 1193~1205년 사이에 비하르 지방을 습격하여 요새를 파괴하고, 모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곳의 재물을 약탈하고, 도서관을 불태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요새로 알았던 것은 사실은 불교사원이었으며, 군대나 주민으로 오해한 사람들은 수행하는 승려들이었다. 이로 인해 불교 역사상 최대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일부 이슬람 기록에 따르면 무함마드 칼지는 자신이 파괴한 요새가 사실은 순수한 ‘비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란다를 필두로 하여 비크라마실라, 오단따뿌리 사원을 차례대로 모두 말살한 변명으로는 이해불가이다. 얼마나 많은 서적을 태웠기에 그 연기가 3개월 동안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되었을까?

종교의 이름으로 이웃 종교에 가해지는 만행은 과거의 역사로 끝나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 자행되고 있는 ‘반달리즘(Vandalism)’의 광기狂氣는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일까?  

 

사진 10. 광대한 유지와 웅장한 대탑을 배경으로 서 있는 필자.

 

<각주>

(주1) 오단따뿌리의 도서관은 나란다(Nalanda)의 것보다 규모가 크고 건물도 높았고 불교와 브라만교의 방대한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2) 열차는 델리에서 비하르의 바갈뿌르까지 운행하는 기차 번호 12367/12368 <비크라마실라 익스프레스>가 운행한다. 또한 최근에는 콜카타에서 바라나시까지 강 크루즈가 시작되었으며, 비크라마실라 유적지에도 정차한다 한다.

(주3) Buddha, Avalokiteshvara, Manjusri, Maitreya, Jambala, Marichi 및 Tara, Vishnu, Parvati, Ardhanarisvara, Hanuman에 관한 것들이라고 쓰여 있다. 

(주4) 나란다에서 발굴된 고스라완(Ghosrawan) 비문에는 현대 인도네시아의 스리비자야왕국은 기부금에 대하여 “나란다의 다양한 우수성에 매료되어 그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데바팔라(Devapala) 왕에게 그 유지를 위해 5개 마을의 수입을 시주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는 팔라 통치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미얀마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온 승려들이 나란다로 왕래를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5) 하지만 아띠샤는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72세에 그가 사랑하던 설역 땅, 네탕사원에서 입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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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현재 10년째 ‘인생 4주기’ 중의 ‘유행기遊行期’를 보내려고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로 들어와 네팔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틈틈이 히말라야 권역의 불교유적을 순례하고 있다.
suri116@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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