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름다운 불교의례 ]
지전 ❷ 내가 지은 빚은 얼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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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래 / 2025 년 6 월 [통권 제146호] / / 작성일25-06-04 13:28 / 조회202회 / 댓글0건본문
지전은 죽음과 관련된 돈이기에 수륙재·영산재·생전예수재 등 사후를 위한 의례에서 널리 쓰인다. 특히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에서는 지전이 핵심 요소로 등장하여, 지전을 머리에 이고 경내를 도는 신도들의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예수재는 윤달에 성행하여, 을사년 윤유월을 앞두고 ‘사후에 통용되는 돈’으로서 지전의 문화와 그 상징성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태어날 때 빌린 ‘수생전’
보편적으로 지전은 ‘망자가 저승에서 쓸 돈’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재에서는 이러한 의미와 더불어, 지전에 특별한 상징성이 부여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명부에서 ‘수생전壽生錢’이라는 돈을 빌려 생명을 받았으니, 그 빚을 갚기 위해 지전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수생전은 금전과 은전이 있어 이를 통칭하여 금은전金銀錢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자칫 방편적으로 여겨질 법한 ‘수생전의 빚 갚기’란 설정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살아있을 때 죽음을 준비하는 예수재가 ‘미리[預] 닦는[修]’ 의미를 지녔음에 주목한다면, 지전에 부여된 상징성을 올바로 새겨야 할 필요성이 크다.
예수재에서 설정된 빚은 ‘전생의 업’을 뜻한다. 아울러 이때 갚아야 할 빚은 ‘금전 빚’뿐만 아니라 ‘경전 빚’도 함께한다. 세상에 태어난 이는 누구나 빚을 안고 있는데, 그것은 경전을 보지 못한 빚과 금전적인 빚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이 도량을 돌 때 저마다 머리에 이는 함에는 금은전과 경전이 나란히 들어 있다. 『수생경壽生經』에는 빚을 갚는 방법으로, “『금강경』 등을 봉독하고 수생전을 불살라 명부전에 바치면 재앙에서 벗어나고 왕생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업을 빚으로 표현하면서, ‘경전 빚’은 소홀했던 수행으로 인도하고 ‘금전 빚’은 보시 공덕을 쌓아 업을 맑히도록 이끈다. 단순히 지전과 경전을 올려 빚을 갚고 내세를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수행과 보시로써 갚아 나가야 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공덕을 ‘빚 갚음’으로 돌리는 마음가짐은, 살아오면서 지은 크고 작은 업에 대한 참회를 새기게 한다. 자신이 공덕을 쌓는 그 자리를 오히려 잘못을 뉘우치는 자리로 삼음으로써 더 큰 공덕이 돌아오는 이치가 담겨 있는 것이다.
생사의 문제에서 수미일관한 불교의 가르침은 “죽어서 타력으로 지어주는 공덕보다, 살아서 자력으로 짓는 공덕이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예수재는 산 자를 대상으로 한 의례이니, 사후를 내다보면서 공덕을 짓고자 할 때 생전에 스스로 지어야 함을 일깨운다.
쌀과 재물을 많이 가져다가 재승齋僧을 공양하고, 당개幢蓋를 만들어 산골에 이리저리 늘어놓고, 또한 시왕의 화상을 설치하여 각각 전번牋幡을 두며, 한곳에 종이 1백여 뭉치를 쌓아두었다가 법회를 행하는 저녁에 다 태워버리고는 ‘소번재燒幡齋’라 이름한다.
조선 중기에 ‘소번재燒幡齋’라는 이름으로 예수재를 행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한곳에 종이 1백여 뭉치를 쌓아두었다가 다 태워버린다’라는 표현에서 당시에도 지전이 예수재를 특징짓는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깊고 무거운 업의 무게
그런데 빚을 갚는 방법이 간단하지 않다. 태어난 해의 육십갑자六十甲子에 따라 수생전의 금액이 달라서, 각자 자신에게 책정된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육십갑자별로 읽어야 할 경전과 금전의 양이 정해져 있어, 이를 ‘십이생상속十二生相屬’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가장 적은 금액을 할당받은 계묘생의 경우 1만 2천 관貫의 금액에 8권의 경전을 읽어야 하고, 가장 많은 을축생의 경우 28만 관의 금액에 94권의 경전을 읽어야 한다. 『수생경』·『예수천왕통의預修薦王通儀』에는 이처럼 태어난 해에 따라 갚아야 할 돈과 읽을 경전뿐 아니라, 빚을 헌납하는 창고와 창고 관리자의 성씨까지 ‘제15고庫 전田 조관曺官’처럼 상세히 실려 있다. 경전은 주로 『금강경』과 『수생경』을 봉독하고, 나중에 금은전과 함께 불사르도록 하였다.
갚아야 할 돈의 단위는 관貫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갚아야 할 금액이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의 값어치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는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이 유통되던 시대였다. 상평통보는 ‘엽전葉錢’이라 불렀는데, 식물의 잎을 뜻하는 ‘엽葉’으로 종이나 동전을 세는 단위로 삼았다. 동전을 셀 때 한 닢[葉], 두 닢 등으로 헤아리는 것도 잎에서 비롯된 말이다.
‘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화폐단위로, 1관은 10냥兩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1냥은 10전錢이고, 1전은 10문文이어서 ‘1관=10냥=1백 전=1천 문’이라는 십진법으로 돈 가치를 환산할 수 있다. 최소단위인 1문은 1푼이라고도 하여, 동냥하는 이들도 “한 푼 줍쇼.”라고 말한다. 조선 후기 한 냥의 화폐가치는 쌀값 등으로 환산해 볼 때 약 4만~5만 원에 해당하니, 한 푼(문)은 지금의 4~5백 원 정도 되는 셈이다.
따라서 1관은 40~50만 원이고, 천관은 4~5억, 만관은 40~50억이다. 십이생상속에서 가장 낮은 금액인 1만 2천 관을 갚자면 54억 정도가 필요하고, 가장 높은 금액인 28만 관을 갚자면 천억이 훌쩍 넘게 된다. 금액이 너무 커서 일반화폐로는 헌납하기 힘들기에 금은전으로 만들었던 셈이다.
이렇게 천문학적 금액을 설정한 것은 우리의 업이 그만큼 깊고 무거움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이다. 그 업은 과거 한 생의 것만이 아니라 무수한 전생의 업연業緣이 쌓인 게 아닌가. 어떤 일의 가치를 물질로 나타낼 때 금액이 높을수록 중대함이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업연의 위중함과 엄정함을 새기면서, 이러한 높은 금액의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 간절한 수행으로 악업을 녹이고 선업을 지어나가도록 이끈다.
그렇다면 금은전은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노스님들은 예수재가 들었을 때 가장 힘든 일이 ‘지전 만들기’라 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든 장엄을 직접 만들어 썼기에 큰 재가 들면 한 트럭 분의 종이를 들여와, 몇 달 전부터 승방에 지전·지화·번 만드는 스님들을 모시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지전 조성법에 대해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록이 전한다. 조선 전기 육화六和 스님이 편찬한 『예수천왕통의』의 부록 「조전법造錢法」에 당시 사람들이 지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록해 두어, 지전의 형태를 부분적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한 자 길이의 종이를 사용해 절반만 황색으로 물들인 뒤, 황색 면과 백색 면을 서로 교차하여 쌓아놓고 동그란 끌로 돈을 아로새겼다. 한 줄에 10문씩, 한 폭에 30문을 아로새겨 수없이 많은 문의 돈을 만들며, 이렇게 만든 지전은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구분 없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돈’이라 하였다. 황색과 백색 종이로 만든 지전을 각각 금전·은전으로 삼은 것이다.

이때 ‘동그란 끌로 돈을 아로새긴다’라는 표현만으로 구체적인 방법을 알기 힘들다. 따라서 이에 대해 “돈을 찍고, 각각을 동그랗게 오려낸 채 가운데 구멍을 뚫어 꾸러미 돈을 만들어 사용했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자 30cm의 종이에 돈 모양을 서른 개 정도 오려서 엽전 꾸러미처럼 꿰어 사용했다고 보기는 무리이다. 종이를 엽전처럼 낱낱으로 오리면 관리가 매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전승되는 ‘전통 지전’의 두 가지 모습을 통해 옛 조성방식도 함께 유추해 볼 수 있다.
지폐형 지전과 입체형 지전
먼저 전통 지전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것은, 사각의 종이에 둥근 엽전 모양을 파낸 지전이다. 한 장마다 금은전으로 환산할 수 있어 각자 갚아야 할 수생전의 금액을 맞추기에도 적합하다.
지전을 만들 때는 속이 비고 가운데 뾰족한 구멍이 뚫린 파이프 모양의 ‘정’을 사용하게 된다. 사찰에서는 이를 ‘돈정’이라 부르고, 지전을 만드는 일을 ‘지전 친다’라고 말한다. 정으로 황색·백색의 한지 묶음에 10개씩 아홉 줄의 지전을 치면 중앙의 송곳이 지전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서 엽전 모양이 되고, 연속으로 찍으면 길게 이어진 지전이 만들어진다.

두꺼운 종이 묶음을 관통하도록 매번 90회의 징을 일일이 쳐야 하니, 엄청난 노동이 필요한 고난도의 작업이다. 지전 치기를 마치면 가위로 둥근 모양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오리는데, 이 또한 힘이 들면서도 끊어지거나 틀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무렵부터 인쇄된 지전이 나오기 시작하고, 점차 우리가 쓰는 돈 모양으로 만들어 금액을 적은 지폐도 등장하였다. 십이생상속에 기재된 엄청난 금액을 감당하려면 고액권이라야 가능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두 장으로 대체할 고액권을 쓰지 않고 어느 정도의 두툼함으로 빚의 무게를 느끼도록 하였다. 일반지폐의 ‘한국은행’ 대신 ‘명부금고·명부은행 발행’이라 적고 지장보살·시왕 등을 그려 넣기도 하니, 빚을 갚는 데 필요한 일손을 덜면서 수생전의 권위는 커진 셈이다.
그런가 하면 통도사 등의 여러 사찰에는 엽전 모양을 새긴 지전목판紙錢木版이 전한다. 예전에도 일일이 손으로 만들지 않고, 목판으로 찍어서 사용하는 방식이 나란히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직접 만드는 것에 비하면 시간과 노력을 절감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전통 지전은 입체적으로 만드는 대형의 지전이다. 사각의 지전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성하되 수백 장의 큰 종이를 이어 종 모양을 이루며, 이렇게 만든 금전·은전을 법당이나 영단 양쪽에 걸어두면 의례의 위용이 더욱 돋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갚아야 할 빚으로서 수생전의 의미보다는, 천도의 대상인 영가·고혼의 왕생을 빌며 명부시왕에게 바치는 지전의 통합적 상징물에 해당한다.
전체 모양에서 엽전을 연상하기는 힘들지만, 가까이서 보면 종이를 접고 오려서 엽전 모양으로 길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가닥을 모아서 풍성하게 만든 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그물처럼 만든 주망朱網으로 덮어 아름답고 장엄한 위용을 자랑한다. 무속의 씻김굿에서 사용하는 지전을 보면 이를 축소하여 약식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금은전은 ‘걸 괘掛’ 자를 써서 괘전掛錢이라 하거나, 우산 모양이라 하여 전산錢傘이라 부른다. 전산錢山이라 부르는 이도 있으나, ‘산’이라는 말은 지전을 조성하게 된 유래와 관련해 부정적인 내용으로 쓰인 것이기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이와 관련해 『예수천왕통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남염부제南閻浮提 세계의 사람들이 예수시왕재를 올리면서 … 조전법造錢法에 따르지 않고 함부로 지전을 만들어 명부 시왕에게 헌납하니, 명왕이 이를 쓰지 않고 버리면서 지전이 쌓여 커다란 산을 이루었다.
이처럼 종이로 만드는 돈이라 하여 여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함부로 만들면 한낱 휴지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시왕이 자신에게 바친 돈을 보고 법식에 맞지 않으면 버림에 따라, 그러한 지전이 산처럼 쌓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전과 관련해 ‘산山’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

‘조전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전을 만드는 일보다 신성성을 불어넣는 의식이다. 이를 통해 명부와 소통할 수 있는 금은전으로 변환되니, 이를 ‘조전점안造錢點眼’이라 부른다. 불상·불화·탑·가사 등과 같이 삼보와 관련된 대상물을 조성한 뒤 생명을 불어넣어 신앙의 대상으로 변환시키는 의식을 점안點眼이라 하듯이, 속계의 종이를 초월적 세계의 화폐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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