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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를 만들어 낸 불교의 바닷길 ]
불교의 이집트 전파를 보여주는 아프리카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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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  2025 년 6 월 [통권 제146호]  /     /  작성일25-06-04 13:57  /   조회21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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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아프리카의 교섭은 역사적으로 가장 덜 연구된 영역이다. 아프리카의 인도양 창구는 홍해 주변이었다. 분명히 인도양의 유수의 고대항구는 아프리카, 특히 홍해를 통하여 이집트와 교류하고 있었다. 인도양 교역과 항해의 오랜 주역은 오늘날 파키스탄령의 항구들이었다.

 

서역으로 가는 출입처 바르바리콘 혹은 반호르

 

헬레니즘 시대 인도 북서부 중요 항구인 바르바리콘(Barbarikon)은 오늘날의 파키스탄 카라치 근해 인더스강 삼각주에 있었다. 인더스강 자체가 워낙 강줄기가 많이 변화해 정확한 위치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파키스탄 남부의 신드(Sindh)에 위치한 반호르(Banbhore)로 추정한다. 바르바리콘은 일찍이 『에리트레아해 항해서』에서도 바르바리쿰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된다. 

 

사진 1. 반호르(Bhanbhore) 요새 유적. 파키스탄 신드(Sindh)의 타타(Thatta) 지구.

 

바르바리콘은 고대 인도와 서아시아, 이집트로 연결되는 항구였다. 바르바리콘은 물품 수입을 넘어서 페르시아의 터키석과 아프가니스탄의 청금석을 이집트로 보내는 환적항이기도 했다. 인도아대륙 내에서는 아라비아해의 바리가자·소파라·무지리스, 동인도의 아리카메두·퐁디셰리, 벵골만의 탐랄립티 등으로 연결됐다. 육로로는 인더스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교통의 요지이자 간다리 지방의 중심인 탁실라(Taxila)를 거쳐서 간다라와 연결됐으며, 박트리아로 들어갔다. 박트리아에서는 육상실크로드를 통해 카스피해 아래쪽을 통과하고, 마침내 지중해 연안의 안티오크에 닿았다.

 

이 노선은 갠지스강 상류와 연결되어 불교왕국 마우리아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로도 이어졌다. 전략적으로 페르시아만에 쉽게 닿을 수 있었으며, 티그리스강을 북상해 육상실크로드와 만났다. 아라비아해의 소코트라섬을 경유해 홍해로 들어가서 알렉산드리아로 연결됐다. 바르바리콘은 인도아대륙의 교역로는 물론이고 인도양 무역로, 홍해 무역로, 육상실크로드 등이 모두 연결되는 전략적 항구였다.

 

사진 2. 해상 무역의 요충지 홍해의 아둘리스(Adulis) 항(붉은 글씨 부분).

 

반호르(Bhanbhore 또는 Bhambhore)는 기원전 1세기의 도시로, 바르바리콘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는 반호르 자체가 독립적으로 쓰이기도 했으므로 논쟁이 남아 있다. 반호르는 역사적으로 인도를 뜻하는 지역명인 신드에 위치했다. 그 위치를 둘러싸고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 대체로 반호르는 그리스인이 언급한 바르바리(Barbari) 또는 바르바리콘으로 추정하지만, 이들 역사적 도시가 모두 같다는 것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홍해의 바다 창구인 아둘리스

 

홍해에서 인도와 교섭한 곳은 아둘리스(Adulis) 항구이다. 아둘리스는 현재 에리트레아 북부 홍해 연안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는 베레니케 판크리소스(Berenice Panchrysos)로 알려졌다. 상아, 가죽, 노예를 비롯해 기타 내륙 수출품을 취급하는 상점이 모여 있는 정착촌이었다. 아둘리스를 적절하게 활용해 부를 축적한 악숨은 무역 강국이 됐다.

 

사진 3. 악숨 왕국과 악숨의 무역로.

 

아둘리스에서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은 인도양 환경과 관련 있는 프로젝트였다. 무역의 중심은 로마제국이었다. 2~3세기경 로마제국의 무역선이 이 항구를 자주 이용했으며, 비잔틴제국이 위치한 지중해권과 무역을 계속했다. 아둘리스는 상아와 노예, 향신료 등의 집산지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오는 무거운 물건은 대체로 아둘리스를 통해 내륙의 악숨으로 운반된 것으로 보인다. 비잔틴제국의 5세기경 바실리카 양식 건축물이 발굴되는 등 아둘리스가 동지중해 권역과 교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6~7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 건축에 필요한 대형 대리석 조각이 수입됐는데, 유사한 조각이 시리아나 악숨 등에서도 공통으로 발견된다.

 

6세기경에는 화려한 페르시아 배가 들어왔고, 스리랑카와도 교류했다. 악숨의 해양력은 스리랑카까지 뻗을 정도로 넓었다. 아둘리스는 520년경 아랍 남서부에 있던 유대인 왕국 힘야르를 침공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전쟁의 명분은 위기에 처한 기독교도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아둘리스에서 출발한 해군이 오늘의 예멘 해안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사진 4. 악숨의 선박 상상도.

 

기록은 제한적이어서 역사의 일부분만 알려줄 뿐이다. 홍해에서 활동한 악숨의 개별 상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상당히 많은 상선이 오갔을 것이다. 먼 훗날 이븐바투타는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칼리(Qali)에 들어갔을 때 500여 명의 에티오피아인을 본 것이다. 칼리는 오늘날 스리랑카 남단에 위치한 갈(Galle)을 말하며, 스리랑카 최대의 항구와 성이 있던 곳이다. 멸망한 악숨과 상관없는 이들이지만, 악숨인의 후손인 에티오피아인의 해양적 기질과 활동 반경을 잘 알려주는 목격담이다.

 

이집트에서 발굴된 고대 불상 

 

불교의 이집트 전파는 홍해에서 발굴된 불상으로 확실하게 입증된다. 28인치 크기의 불상이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국제항구 베레니케(아둘리스)에서 2023년 발견되었다. 최근의 일이다. 베레니케 프로젝트의 발굴 책임자는 새로 발견된 불상이 서기 90년에서 140년 사이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집트 관광유물부 관계자는 성명을 통해 높이 28인치(71센티미터) 크기의 이 불상은 붓다가 서서 왼손에 옷의 일부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붓다 뒤에는 햇빛이 아래쪽으로 내리쬐는 후광이 보인다. 불상 외에도 베레니케에서 별도의 산스크리트어 비문이 발견되었다. 

 

사진 5. 홍해 베레니케의 불상. 사진: Egyptian Ministry of Tourism & Antiquties.

 

지중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불상은 고대 로마와 인도 사이의 무역을 보여준다. 기원전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에 인도인이 살았다고 하며, 이 발견은 이집트에 살았던 인도인 중 일부가 불교도였음을 보여준다. 발굴팀은 이 불상이 베레니케에 사는 남아시아 출신 사람이 현지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유의할 점은, 불교가 아프리카 홍해변에 당도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것이 어떤 상가[僧伽]를 이루고 승원僧院을 마련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문명사적으로 인도양을 넘어서 불교가 아프리카 홍해변에 당도한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홍해의 베레니케는 로마가 지배하던 이집트에서 가장 큰 항구 중 하나였다. 베레니케는 이집트-헬레니즘 시대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개발한 홍해의 창구였다가 로마가 알렉산드리아를 접수한 이후에 로마의 홍해 창구로 바뀐다. 로마 영역으로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그리스인이 홍해와 인도양 항해의 주역이었다. 상아, 직물, 준보석과 같은 상품이 기원전 6세기경에 이 항구가 버려질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이 도시를 통과했다. 

 

로마와 고대 인도의 교류

 

최근 베레니케에서 문화적 혼합을 암시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중에는 아랍인 필립(Phillip the Arab)으로 알려진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포스(Marcus Julius Philippu) 황제 통치 시기의 산스크리트어 비문도 있다. 황제는 시리아에서 태어나 기원전 244년부터 249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했다. 이러한 발견은 로마제국이 고대 인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의 일부이다. 단순히 지나가는 상인이 아니라 정착 인도 상인 공동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제국과 고대의 여러 세계를 연결하는 무역로 중앙에 위치했던 이집트의 독특한 역할을 조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진 6. 베레니케의 불상이 발굴된 홍해 아둘리스의 유적지.

 

1999년 고고학자들은 베레니케 사원의 안뜰 바닥에서 17파운드의 검은 후추가 담긴 항아리를 발견했다. 당시에는 후추가 인도 남서부에서만 재배되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글로벌 경제’가 존재했으며 베레니케가 그 완벽한 예시이다. 베레니케에서 인도 상인이 브라흐미 문자로 남긴 명문도 수백 편 발견되었다.

 

인도양의 중간 거점인 소코트라에 명문이 동굴에 남아 있다. 인도인 중 세 명이 불교도로서 동굴에 왔음을 기리기 위해 명문을 남겼다. 인도와 홍해 중간 거점인 소코트라는 불교상인 교역망의 서쪽 끝이었다. 불교가 인도양 무역로를 통하여 전파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기존의 불교사에서 간과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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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분과학문의 지적·제도적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융·연구를 해왔다.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민족학 등에 기반해 바다문명사를 탐구하고 있다. 제주대 석좌교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역사민속학회장,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POCC) 등을 거쳤다. 『마을로 간 미륵』, 『바다를 건넌 붓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등 50여 권의 책을 펴냈으며, 2024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했다.
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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