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통불교론 제시는 功 친일논설 발표는 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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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5 월 [통권 제97호] / / 작성일21-05-04 15:16 / 조회5,216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5 / 최남선
3·1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일제강점기에 한국학을 일으킨 학자이자 문인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최초의 월간 잡지인 《소년》을 창간했고, 첫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또 출판사인 신문관과 한국의 고서를 발굴하여 펴낸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한국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도 최남선이 교열을 보고 신문관에서 간행한 책이다. 최남선은 불교를 전문으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한국불교의 특성을 통찰력 있게 간추린 글을 써서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1. 육당 최남선.
최남선의 호는 육당이며 서울의 중인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잡과 시험 합격 후 관상감 등에서 일했는데, 이러한 그의 가계는 조선 양반문화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갖는 배경이 되었을지 모른다.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들어갔다가 중퇴하고 1906년 와세다대 역사지리과에 입학했지만 한국과 관련된 학내 문제에 반발하여 다음 해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비록 짧은 유학 경험이었지만 근대의 새로운 문명을 접했고, 또 안창호, 이광수, 홍명희 등과 친분을 맺었다. 최남선은 조부가 존경했던 개화파의 유대치가 불교에 애정을 가졌다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불교에 호의를 가졌는데 10대 후반에 『금강경』을 읽을 정도였다. 그는 일본에 갔을 때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크고 특히 철학적으로 불교가 주목받는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1907년에는 일본에서 인쇄기를 들여와 신문관을 설립했고, 교양서와 전문서, 국문소설 등 다양한 분야와 주제의 책들을 간행했다. 1908년 11월 1일 잡지 《소년》을 발간했고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를 발표하는 등 언문일치의 신문학운동을 벌였다. 《소년》 창간호에 실린 “철썩 철썩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로 시작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의인화된 바다가 새 시대의 주역인 소년들에게 현실을 이겨내고 미래를 끌고 나가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이어 1914년에는 대중 계몽을 위한 문학잡지 《청춘》을 펴냈다.
1910년 10월에는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고전과 고서, 역사서를 편찬했는데 출판은 신문관에서 했다. 1918년까지 20여 종의 고전이 나왔고 여기에는 박은식, 장지연, 주시경 등 당대 일류의 학자들이 참여했다. 『동국통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 『택리지』, 『동국세시기』, 『해동제국기』, 『훈몽자회』, 『용비어천가』, 『지봉유설』, 『성호사설』, 『열하일기』 등 다양한 문헌과 『율곡전서』, 『이충무공전서』와 같은 전집류도 펴냈다. 또한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의 근대적 역사지리서와 최초의 국어사전 및 현대식 한자 사전도 간행되었다. 이처럼 조선광문회와 신문관은 근대 한국학의 형성에 산파 역할을 했는데, 상중·하 2책, 총 1,268쪽에 달하는 거질의 『조선불교통사』(1918)도 최남선이 교열하여 신문관에서 냈다.
최남선은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고 이 일로 2년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창간하는 등 언론인으로서의 활동도 했으며, 1925년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모임인 계명구락부에 참여했다. 1920년대 이후 그는 역사와 조선학 연구에 매진했다. 특히 민족의 기원을 탐색하고 민족사를 서술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며 그 결과로 1926년 ‘불함(不咸, Părkăn) 문화론’를 주창했다. 그에 의하면 인류 문명은 인도 유럽과 중국 계통, 그리고 밝음에서 기원한 불함 계통이 있다고 하며, 고대 극동 문화의 열쇠이자 핵심으로 단군을 지목했다. 1928년부터는 『조선사』 35책을 펴내는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사에 단군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조선역사』, 『단군론』, 『삼국유사해제』 등의 저서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불교에 대한 이해도 높아져 1930년대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강의를 맡기도 했다.
최남선은 1930년대 중반부터는 ‘전향’을 하여 뚜렷한 친일 행보를 보였다. 그는 조선과 일본 문화의 뿌리가 같다고 주장하며 신도神道의 보급에 힘쓰고 심전心田개발운동에도 가담했다. 1936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에는 만주로 가서 《만몽일보》의 고문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로 부임했다. 이 무렵 <전쟁과 교육> 같은 글을 써서 일제의 중국 침략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1941년에는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고 <나가자 청년학도야>, <아시아의 해방> 등의 글을 신문에 실었다. 1943년에는 일본에 유학한 학생들에게 학도병 지원을 권하는 강연 등을 했다. 이러한 친일 행적은 그의 이력에 주홍글씨를 남겼는데, 해방 후 3년 반이 지난 1949년 2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지만 반민특위가 친일파 출신 경찰에 의해 해체되면서 풀려났다. 그는 한국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했고 이후에도 글쓰기 활동을 계속했다.
최남선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 첫 번째 글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출간을 기념하는 「조선불교의 대관으로부터 조선불교통사에 급함」(1918)이다. 이 글에서 그는 일본 학자뿐 아니라 조선 승려들도 조선불교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서 무조건 경시한다고 비판하고, 자료 조사와 근대적 연구방법론에 의한 학술연구가 시급함을 역설했다. 나아가 한국불교가 불교 유통에서 중요한 계통이며 결론적 불교로서 교(교리)보다 학(연구)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당시 일본 학자들의 평가와는 달리 한국불교가 중국과는 다른 특수하고 독자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높이 평한 것이다. 또 한국사와 불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서민의 정신생활과 사회의 심령적 발전 측면에서도 불교가 유교보다 큰 역할을 했고 사회 세력과 문화적 영향력 또한 매우 컸음을 강조했다. 당시 최남선은 학문을 통한 민족의식의 함양과 고취를 추구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불교 전통에 대한 재해석과 가치 제고에 앞장선 것이다.
이후 최남선은 1930년 7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태평양 불교청년대회 때 발표된 「조선불교- 동방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라는 글을 썼다. 비록 직접 가지는 않았고 최봉수의 영문 요약본을 도진호가 배포했지만, 동아시아에서 한국불교가 갖는 위상과 특성을 부각하여 소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 글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 및 교리의 발전과 한국, 통불교의 건설자 원효, 불교예술사와 불교경전의 유통과 한국, 일본불교와의 비교와 동방문화에서의 한국불교 순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첫머리에서 동서 문명교류에서 동방 교통의 종착지인 한반도는 문화의 최후 정류지라는 지위를 가졌지만 그 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통불교, 전불교의 건설자로서 원효의 역할과 위상을 강조했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까지 원심적 분화의 경향을 띠며 전개된 데 비해 한국불교는 구심적 귀합을 특징으로 하며, 원효 단계에서 교학의 이론적 종합, 일승사상의 완성, 이론과 실천의 융화와 불교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국불교가 인도 및 서역의 서론적 불교, 중국의 각론적 불교에 대비되는 최후의 결론적 불교이며 한국이 동방문화의 교차점 역할을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최남선이 주창한 결론적 불교, 종합적 통불교론에는 한국불교가 일본과 다르고 또 독자성 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이면에 깔려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마쿠라 시대의 학승 교넨에서 시작하여 근대기까지 이어진 인도-중국-일본으로 연결되는 삼국불법전통사관에 대응하여 불교 유통에서 일본 자리에 대신 한국을 넣고, 또 일본불교의 종파적 특성과는 달리 여러 종파를 통섭하는 통불교의 특징을 장점으로 내세운 것이다. 최남선의 통불교론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문화적 교차의 지역적 특성 때문에 원효와 같은 통일적·결론적 불교가 완성되었다는 김경주의 글이 곧이어 나왔고, 신라 원효의 화쟁, 고려 의천과 지눌의 선교융섭, 조선의 참선·강경·염불을 겸하는 삼문수업을 근거로 한국불교의 통시대적 특성으로 통불교를 위치시킨 김영수의 연구가 이어졌다.
최남선이 제기한 통불교론은 이후 호국불교와 함께 한국불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널리 확산되었다. 회통과 원융을 내세운 통불교 전통은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비롯되었고 중생구제뿐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융화에서 그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는 논리가 퍼져갔다. 한편 최남선이 불교 유통의 역사에서 한국불교를 결론불교로 보고 통불교, 전불교, 종합불교의 구현자로 원효를 드높인 것은, 식민지 상황에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사상 등의 독자성을 세우고 학술적 가치를 발굴해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다. 1930년대 전반에 일어난 조선학 운동은 민족주의적 각성과 전통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통불교가 주목된 것은 일본불교의 특징인 종파불교와 대비되면서도, 보다 포괄적이고 우월하게 보이는 원융과 통합의 긍정적 이미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일본의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우월한 일본을 능가할 수 있는 한국의 독자성과 우수한 문화 전통을 찾아 자부심을 회복하려는 자의식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통불교론이나 불교통일론 같은 개념은 앞서 메이지시기 일본에서 이미 제기된 것이었고, 또 과연 통불교라는 개념이 한국불교사의 정체성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용어인지,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논거와 검증이 뒤따라야 한다. 회통이나 통합이 한국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또 신라의 원효, 고려의 의천과 지눌, 조선의 시대 상황과 사상적 과제, 각각의 문제의식과 지향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새로운 문제의식과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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